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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철근육 Nov 03. 2017

자신을 위해 육아를 하는 부모들.

육아에 부모의 자격지심을 투영하면 안 된다.

아이를 키울 때 첫 3년이 유독 힘든 건 말이 안 통하는데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엄연히 나와 다른 또 하나의 인격체인데 말이 안 통하니 그것을 체감하기 힘들다. 엄마와 아빠는 자고 싶은데 아이는 늦게까지 말똥말똥하거나 우는데 배가 고픈 건지 아픈 건지 알 길이 없다거나 하면 엄마 아빠는 진심 힘이 든다. 생긴 건 인형 같고 귀여운데 인형과 달리 내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래서 아이가 말을 하기 시작하면 한결 낫다. 뜻이 달라 다툴지언정 내뜻을 전달하고 아이의 뜻을 받아볼 수 있다.


문제는 이때부터 부모의 개입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해해야 하는 부분에서 설득을 하려 드는 경우를 생각해보면 된다. 아이는 논리가 당연히 부족할 수밖에 없는데 어른은 그것을 논리로 누르려한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보면 우리가 일상에서 논리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말을 몇 마디 더 붙일 수 있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누구도 매번의 대화에서 엄밀한 논리 법칙을 따르지 않는다. 내가 내 주장에 맞는 몇 마디를 상대방보다 더 붙일 수만 있으면 논리적이란 표현을 듣는다. 그 대화가 우연히 삼단 논법에 해당하고 내가 그것을 깔끔하게 이행했다거나, 귀류법인 논쟁이라 내가 반증으로서 모순을 증명했다거나 하지 않는 이상 말이다.  


아이는 말을 이어가는 능력이 약할 수밖에 없다. 어휘 자체가 부족하다. 어쩌면 아이는 어른의 설득에 넘어가기보다는 그냥 자신의 방식으로 참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부모는 자신이 아이를 설득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이 올바른 방향을 제시했다고 생각한다.


친구를 괴롭히지 말라거나 위험한 것을 피하게 한다거나 나쁜 말을 쓰지 말라는 정도는 괜찮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상을 심어주는 모습을 보면 나는 반감이 생긴다. 아이의 선호에 어른의 가치관이 개입하는 것 말이다.

나심탈렙이 얘기했다. 사람은 좋아하는 것에 의해 움직이기보다는 정말 싫어하는 것을 피하고자 움직이게 된다고 했다. 나는 이 구절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이내 일상에서 사람들의 행동과 말을 관찰하는 데 곧잘 적용해 봤다. 그 정확성은 때론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어른들이 아이에게 투영하려는 가치관은 대개 자신들이 겪었던 약점과 연관돼 있다. 좋게 얘기하자면 내가 겪은 수모를 너는 겪게 하지 않겠다는 해석이 된다. 하지만 그들이 놓친 것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아직 내 아이는 그런 수모를 겪어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둘째는 아이에게 그런 수모를 겪지 않게 하려는 의무의 당사자는 여전히 부모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다.


돈이 없어 수모를 겪었다면 아이에게 돈돈돈 할 것이 아니라 자기가 돈을 더 아끼고 버는 게 맞다. 무지하다 욕을 보였다면 빚을 내가며 아이에게 과외를 시킬 것이 아니라 자기가 계속 독서하고 공부하여 이를 극복하는 게 맞다. 즉, 아이에게 최대한 자격지심이 없는 부모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자신이 부족한 부분은 그것으로 인해 힘들었노라며 아이가 좀 더 컸을 때 대화로 푸는 게 옳다고 본다.


아빠는 돈이 없어 서러웠단다.라는 솔직한 대화에, 아이는 돈에 집착하기보다는 가난한 사람을 돕는 자선가로 클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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