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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회 Feb 25. 2021

이웃

영웅을 꿈꾸며

한 시간째 증인신문 중이다. 아직 세 명의 증인이 더 남았으니 재판이 몇 시에 끝날지 모르겠다. 아파트 이웃 주민끼리 한쪽은 피고인, 다른 한쪽은 증인으로 법정에 섰다. 증인 아주머니의 목에 핏대가 섰다. 감정이 격해지니 목소리도 갈수록 커진다. 흥분하니 동문서답이다. 상황이 이러니 증인 신문이 길어진다. 피고인과 증인이 서로를 비웃고 조롱하다가 제지를 당한다.


이웃 간에 형사 소송. 내가 가장 싫어하는 재판 유형 중 하나다. 이전 아파트 입주자 대표회의 대표와 현재 대표 간의 이권다툼이 발단이 되어 횡령, 명예훼손, 모욕죄 다투는 경우도 있고, 층간소음 문제로 폭행, 주거침입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사안은 다양하지만 이웃 간의 형사사건을 볼 때마다 씁쓸하다.



나는 이웃에 대해 좋은 기억이 더 많다. 누이가 결혼할 때 앞집 아주머니가 관광버스에 올라 멀리까지 따라가셨다. 손님들을 엄청 챙겨주시니까 친척들이 자신이 모르는 친척이 있는 줄 알았단다. 지금도 어머니와 같이 김장이나 나물을 하고 반찬도 나누며 형님, 동생으로 잘 지낸다.


초등학생 때는 동네 친구한테 맞은 적이 있다.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괴롭히는 사람은 가정교육을 제대로 못 받은 것이므로 그 부모에게 사과받을 일이라고 생각했다. 너보다 약한 나를 때리는 거 보니 가정교육을 잘못 받은 것 같다며 친구의 집에 찾아갔다.


친구 부모님께 정중하게 인사를 드리고 상황을 설명했다. 친구 부모님은 방으로 도망친 자기 자식을 불러내어 혼내고 사과를 하셨다. 화해의 의미로 맛있는 걸 해주시기도 했다. 친구도 부모님을 걱정시키는 게 싫었는지, 나를 때리는 일이 없어졌다. 친구와 다시 사이좋게 지내게 되었다.


애들 싸움이 어른 싸움으로 번지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이웃 아이가 부모한테 심하게 혼나면 말려주나, 집에 문이 잠겨서 못 들어가고 있을 때(그 시절 집들은 도어록이 없었다)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보호해 주셨다. 부모님 외에도 그런 이웃 어른이 있었기에 내가 온전히 자란 것 같다. 내 기억 속의 이웃은 그렇게 어른스러웠다.



한 번은 아파트 단지에 불이 난 적이 있다. 단지 한쪽에 박스를 모아놓았는데, 중고등학생들이 박스 위에서 놀며 라이터로 장난을 치다가 박스더미에 불이 붙었다.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불이 커지자 그들은 도망갔다.  


검은 연기가 크게 퍼지니 이웃 주민들이 하나씩 집에서 나왔다. 그런데 멍하게 불구경만 하고 있었다. 안 되겠다 싶어서 집으로 달려갔다. 세숫대야에 물을 받아와서 불위에 뿌렸다.

“촤악!” 소리와 함께 불위로 물이 뿌려졌지만 어림없었다. 애초에 세숫대야에 받아온 물로 꺼질 수준이 아니었다. 하지만 초등학생의 어설픈 노력이 각성효과를 일으켰을까?


마침 주말이라 아저씨들까지 모두 집에 있었다. 사람들은 ‘아차!’하는 표정을 짓더니 다들 집으로 뛰어갔다. 몇 분 후 양동이에서 호스까지, 각자의 화재 진화 도구를 든 수많은 이웃들이 허술한 옷차림으로 뛰어왔다.


합동 물세례 공격이 전개되니 불은 금방 진화되었다. 소방차가 도착하기도 전이었다. 러닝셔츠와 반바지 차림에 슬리퍼를 신은 배 나온 이웃 아저씨, 몸빼바지를 입고 빨간 고무장갑을 낀 아주머니들의 뒤로 망토가 펄럭이는 것 같았다. 나는 이 듬직한 일상의 영웅들을 곁에 두고 살고 있었다.




요즘 철 지난 KBS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에 푹 빠져 있다. 이 드라마에는 동백이의 이웃들이 감초로 나온다. 옹산 게장 골목 아주머니들은 옹산에 연고도 없으면서 이곳으로 이사를 와서 술집을 차린 미혼모 동백이를 미워하는 것 같다. 그런데 잘 들여다보면 동백이와 그 아들 필구를 챙긴다.  동백이가 연쇄살인마에서 살해 협박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서로 돌아가며 동백이 가게와 귀갓길도 순찰한다. 살인범을 두려워하기보다 동백이를 지켜주는 쪽을 택한다. 연쇄살인마에 대항해 이웃을 지키겠다는 옹산 게장 골목 주민들. 그 이웃들을 마블의 히어로 어벤저스에 빗대어, 17화 제목이 옹(산 어)벤져스다.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17화 "옹벤져스"의 한 장면, 이웃들이 동백이의 귀갓길을 지켜주고 있다.


언젠가부터 민영아파트 주민이 LH 휴먼시아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을 휴거(휴먼시아 거지)라고 부르는 삭막한 세상에 되었다. 층간 소음이나 단지 내 이권다툼, 아파트 경비원에 대한 갑질 뉴스를 접한다. 그리고 뉴스에서 본 이웃 간의 모욕과 폭행, 협박을 나는 다시 일터에서 사건으로 본다. 이웃 간에 그렇게 서로 멸시하고 싸우면서 비싼 아파트에 사는 자부심이 생기는지 모르겠다.


서로 이해하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 살고 싶다. 법정에 불려 와서 이웃끼리 얼굴 찌푸리는 일 없길 희망한다. 우리 이웃들이 옹벤져스처럼 서로를 지켜주는 일상의 영웅이길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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