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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띤떵훈 Feb 12. 2018

나는 너무 특별해

ㅇㅈ?ㅇ ㅇㅈ

   오랜만에 집 와인잔을 용도에 맞게 사용한다. 와이프가 취향 없음을 탓할지언정 내겐 싸구려 팩 와인이 제격이다. 5불짜리 와인이나 500불짜리 고오급 와인이나 혀가 느끼기엔 거기서 거기기다. 비싼 와인은 비싸서 맛있네, 싼 와인은 싼데도 맛있네.라며 박수친다. 집에 와인이 없는 날이 없다. 떨어질 때쯤 구비하지만, 잘 마시지 않기도 하다. 4L 들이 팩 와인에서 내 몫은 500ml가 되지 않는다. 술 좋아하는 와이프가 일 끝나고 3.5L를 마신다. 



자주 마시지 않기에 혼술용 와인은 과한 인상을 갖는다. 단골 혼술 친구는 맥주다. 집에서 글 쓸 때 주로 주종을 바꾼다. 깊게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 와인이 필요하다. 작가혼을 불러일으키는 마법의 액체는 아니고, 민망함을 잊을 취기가 필요한 것뿐이다. 오늘 그 약간의 취기로 글을 쓴다. 



자신을 소개할 때 자주 쓰는 수식은, 긍정적, 즐거운, 유쾌한, 소박한, 웃긴, 실없는, 쪼다같은 등이다. 전반부 수식의 이유는 기본적으로 인생이 즐거움의 연속이라고 믿고, 실제로 그런 삶을 영위하기 때문이다. 후반 수식의 이유는 폼 재지 않는 탈허세의 삶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가끔 정반대의 수식을 가져올 때가 있다. 지금 같은 때다. 1년에 한두 번, 이유 없이 우울하다. 파고들면 어딘가에 이유가 있다. 이유를 외면하면 금세 우울을 극복하지만, 정면으로 마주할 때는 우울의 체류 기간이 길어진다. 낯선 나와 상대하기 위해 허세의 잔을 든다. 



세상에는 잘난 사람이 많다. 기죽지 않기 위해 자신에게 누구 못지않게 잘났음을 말한다. 근거의 실체가 없음을 의심하는 시간이 늘어나고, 의심이 쌓이면 우울해진다. 주변 잘난 사람의 역할은 우울의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 소셜 미디어의 병폐를 말할 때, 잘난 상대와 자신의 현실의 괴리에서 오는 우울이 첫 번째로 꼽힌다. 합리적으로 사고하고 선별적으로 수용해서 나는 영향을 안 받을 거라 자신하지만 가랑비에 옷이 젖는다. 인터넷에서 더 잘난 사람들을 보게 되면 내가 가진 게 보잘 것 없음을 깨닫는다. 



호주 생활 6년 차다. 돌아보면 나쁘지 않다. 사업을 시작했고, 꾸준히 공부했고, 괜찮은 사람들과 관계도 쌓았다. 높은 평가를 하는 항목은 2가지다. 많은 돈을 벌었단 것과, 배움의 끈을 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30대로 접어들자, 친구들과 수입 격차가 좁혀졌고, 배움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인 이들을 보게 된다. 유튜브에는 영어 컨텐츠 제작자가 많다. 국경의 제약을 넘어 저마다의 방법으로 탁월한 성취를 보인다. 그들과의 비교는 회초리보다 따끔하다. 아직도 고객들과 대화할 때 말을 버벅인다. 못난 나의 모습을 볼 때, 잘난 이들을 떠올리면 내세울 게 없이 나이만 먹은 인간이 된 기분이다.



무능한 인간이 될 때 와이프와 자신을 비교하는 것은 추천할만한 일이 아니다. 명문대 출신 부모 밑에서 자란 그녀와 고물상 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란 나의 스펙을 비교한다. 와이프는 아시아 출신으로는 드물게 호주 문화재 업계에 경력을 쌓고 있다. 대학원을 마치고 업계에 뛰어든 그녀와 서른 넘어 대학 입학하는 나의 거리차는 상당하다. 잘난 남편 만나 부럽다 너스레 떠는 것을 그만둬야 할까.



떨어진 자신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잘하는 것, 그러니까 자신의 특별함을 인증할 소재를 찾는다. 마지막에 나오는 게 글쓰기다. 몇 마디로 자신을 다독인다. '프로 작가 뺨 치고 쓰러진 사람 일으켜서 몇 대 더 때릴 정도로 썼잖아. 꾸준한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데. 너만큼 자아가 강한 인물도 없지. 그 정돈된 문장은 어떻고. 너의 문장, 아름다워. 너의 문장에게 건배.' 칭찬에 혹한다. [우울 안녕 자신감 어서 와] 의 새 시즌의 시작이다.



우울할 때 글을 쓰는 이유는, 어울리지 않게 와인을 몇 잔이나 마시며 쓰는 이유는 자신이 특별한 존재라고 납득시키기 위해서다. 정답을 갖고서 자신에게 묻고 답한다. 인정? 어, 인정. 술에 취하고 나에 심취한다. 읽는 것도 한 역할 한다. 와인잔을 들고 대단한 사람이 된 것처럼 인터넷을 탐험한다. 영향력 있는 누군가의 글을 평가한다. 발견한 잘못을 자신을 올리는데 사용한다. 이렇게 글 쓰는 능력이 부족해서야 원. 글 좀 쓰는 나였다면 이렇게 안 쓰지. 암, 그렇고말고. 내 블로그로 돌아와 전에 쓴 글을 몇 줄 읽고는 인터넷 창을 꺼버린다. 하하하... 내가 좀 바빴나 보다. 대충 쓰면 누구도 잘 쓸 순 없지. 그럼! 그렇고말고. 아 출출한데 뭣 좀 먹어야겠다. 어쨌든 난 특별해. 



무기력할 때는 잘하는 일에 집중한다. 자학과의 전투에서 마지노선이 글쓰기다. 더 이상 뒤로 갈 수 없다. 무능한 인간이 아니라고 글 뒤에 숨어 적에게 총을 난사한다. 참호가 부실하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한다. 우울을 떨쳐낼 때까지는 막연히 글 좀 쓰는 자신에 집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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