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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띤떵훈 Jul 18. 2018

신이 없어야 하는 이유

영원의 공포

 



 일하는 중에 맥도날드에 들렸다. 점심으로 빅맥 세트를 먹었다. 식사하며 직원분과 이야기를 나눴다. 전날 그녀에게 타임 패러독스란 영화를 소개했다. 그녀는 귀가 후에 바로 영화를 감상했고, 만족스러웠다고 말했다. 내가 영화 감독인 양 으쓱했다. 기세를 몰아 시간에 관한 다른 영화를 추천했다. 사랑의 블랙홀이란 작품이다.  그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기자인 남자는 시골 마을에 취재하러 간다. 현지 호텔에서 일어나 하루를 시작한다. 잘 안 풀리는 하루를 보낸다. 폭설 탓에 시골 마을을 벗어날 수 없다. 다시 현지 호텔에서 일박을 한다. 눈을 뜨니 어제다. 하루가 영원히 반복된다는 줄거리.

남성의 반응은 어떨까? 처음엔 불신, 그다음엔 일탈이 주는 흥분, 그다음엔 분노 마지막은 순응 혹은 해탈. 같은 하루지만 다른 남자 주인공의 반응을 보는 것은 흥미로웠다. 그러다 직원분이 만약 나의 하루가 반복된다면 어떨 것 같냐고 물었다. 나는 지옥일 거라고 말했다. 영원을 상상하는 것은 신이 없어야 할 당위를 제공한다. 전제가 있어야 하루를 긍정할 수 있다. 이 질문과 사색을 끌고와 글로 정리한다. 흥미로운 작업이 될 것이다. 

전제 -반복에 끝이 정해진 경우


공든 탑이라는 개념이 없다. 모든 것이 모래성이 된다. 기술의 발전이나 명성을 날리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 시간의 관념을 모두가 공유해야 유효하다. 시간이 나에게만 적용된다면 어떤 발전도, 명성도 얻을 수 없다. 명성은 알겠는데, 발전은 왜 없지? 영원한 시간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할 수 있다. 어떤 분야에서도 성취를 얻는다. 그러나 인정해주지 않으면 소용없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간단한 이치다. 수요와 공급. 발전할 필요가 없기에 자연히 발전도 없다. 

반복의 끝이 정해진다면 이야기는 다르다. 반복의 끝에 인정받을 수 있는 환경이 있다.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단 기약이 있다면 즐거이 학문이나 기술을 갈고닦을 수 있다. 언젠간 노력을 보상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삶을 긍정하게 만든다.
*다만, 기술 발전이란 측면에서 영화감독과 다른 시각을 갖고 있다. 영화에서 주인공은 허무와 무기력을 극복하기 위해 악기(피아노)를 배운다. 나의 하루는 반복되고 기술의 축적이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나는 아니다. 지식의 축적이나 지식을 토대로 얻을 수 있는 기술의 축적은 가능하다고 보나, 신체를 사용해 얻을 수 있는 기술은 발전이 불가능하다. 왜냐면 몸이 매일 리셋되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자살하거나 고의로 자신의 신체를 훼손해도 다음날이면 멀쩡히 돌아온다. 이는 신체가 매일 리셋됨을 알려준다. 신체를 사용하는 기술을 얻기 위해선 몸을 그에 맞게 변형시키는 작업이 필요하다. 악기를 다루는 것도 마찬가지다. 악기는 몸으로 연주하는 것이다. 악기에 몸을 맞춰가는 연습을 통해 발전하는 것이다. 그 이유 때문에 매번 악기에 낯선 신체는 일정 이상의 성취를 얻을 수 없다.


반복에 끝이 없는 경우

인간은 생명이 유한하기에 가치 있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지금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이 없어진다. 시간의 제약에서 벗어나면 지금일 필요가 없다. 시간을 재화로 보면 이해가 쉽다. 희소성은 상품의 가치를 높인다. 우리는 다이아몬드나 기타 귀금속을 비싼 값을 치르고 산다. 왜? 희귀하니까. 그러나 우리는 공기나 흙, 물을 구매하는데 큰돈을 들이지 않는다.(그것이 특별한 용도로 사용되는 제품이 아니라고 가정한다) 시간도 마찬가지다. 희소성이 있기에 가치를 인정받는다. 시간의 신세는 금에서 돌로 전락한다. 

누군가 같이 영원할 수 있는 이가 있다면 상황은 그나마 낫다. 나를 이해해주는 이는 존재만으로 위안이 된다. 다만 함께 영원할 이가 없다면 의미 없다. 

죽음이 주는 공부 죽음이 없는 공포 중 어느 게 더 클까? 당연 죽음이 없는 공포다. 영원함은 그렇게 무섭다. 끝이 안 보이는 바다가 공포의 존재이듯, 끝이 안 보이는 삶도 공포다. 나는 왜 태어났고 왜 살까?라는 물음을 일생 동안 찾아 헤맨다. 그것이 철학과 신학, 예술을 불러왔다. 허무함을 극복하기 위해 필수적인 도구다. 이 허무는 인생의 길이가 늘어난 만큼 늘어날 것이다. 처음부터 영생이었다면 모르겠지만, 인간의 본질적 한계다. 우리는 모르는 것, 미지의 세계에서 설렘을 느낀다. 새로운 것을 배운다. 그러나 영원한 삶에서 새로움은 점점 줄어들고, 모든 것은 내가 아는 게 된다. 설렘도 없고, 감정의 진폭도 0에 수렴할 것이다. 내가 나로 존재하려면 의미가 필요하다. 의미가 없는 세계에서 살아가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나를 잊고 사물이 되는 방법 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끝없는 공포에 맞서는 유일한 방법이 나를 버리는 것이다. 

덕분에 종교가 주장하는 천국도 내겐 지옥이다. 영원한 삶을 약속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신이 없어야 하는 이유다. 지옥도 지옥이고, 천국도 지옥일테니. 혹시나 신이 있다면, 그 신이 인간을 사랑한다면, 관념에만 머물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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