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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띤떵훈 Aug 09. 2018

지금 소설이 내게 줄 수 있는 모든 것

노찬성과 에반



 어제 도서관에서 책 2권을 빌렸다. 이방인 패러디 소설과 김애란의 바깥은 여름이다. 바깥은 여름은 순전히 저자 이름 때문에 골랐다. 저번 달에 같은 저자의 다른 작품인 두근두근 내 인생을 읽었다. 저자가 머릿속에 각인됐다. 어제는 뫼르소 살인 사건을, 오늘은 바깥은 여름을 챙겨 나왔다. 목차를 보고서 깨달은 점 2가지. 1. 단편집이다. 2. 이동진의 빨간 책방 선정 도서였다. 어쩐지 낯이 익었다. 빨책의 열혈 청취자로서 거의 모든 에피소드를 들었다. 3 시간 넘게 책 이야기를 들어놓고 책 제목을 잊어버렸다. 치매를 의심해야 한다.


 분량이 많지 않아 완독에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으리라. 후다닥 읽고 읽은 책 목록에 책 한 권 추가할 예정이었다. 두근두근 내 인생은 나쁘지 않았지만, 좋지도 않았다. 저자 이름 때문에 골랐다는 의미는 이렇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은 접근성이 좋다. 사람은 선택지가 많을 때 아는 것을 선택할 확률이 높다. 천 개의 책을 눈 앞에 둔 내가 그랬다. 두근두근 내 인생은 문학적인 경외를 느끼게 만드는 작품이 아니었다. 그냥 그런 한국 소설 중 하나였다. 독서 후에 저자의 수상 내역을 납득할 수 있냐 묻는다면, 나는 잘 모르겠다 답할 것이다. 이번 책은 달랐다. 후다닥 넘길 수가 없었다. 


책엔 총 7 개의 단편이 수록됐다. 좀 전에 2 편을 읽었다. 속도를 냈다면 2 시간 정도 후엔 마지막 장을 덮었으리라. 2 번째 작품 노찬성과 에반을 읽고 페이지를 넘길 수 없었다. 빨책을 통해 작품의 대략적인 스토리를 들었다. 그 사실이 멜랑꼴리한 감정이 넘쳐 흐르는 것을 막지 못했다. 이동진의 영화평을 빌려온다면, 이 작품은 소설이 지금 내게 줄 수 있는 모든 것이다. 규정할 수 없는 감정의 파편이 쏟아졌다. 


일전에 언어가 규정할 수 없는 관념을 주제로 글을 썼다. 남의 감정도 그렇고 내 감정도 그렇다. 나의 모든 생각과 감각을 담을 수 있는 몇 개의 명쾌한 단어와 표현은 없다. 답답함의 반작용으로 많은 규정을 배운다. 세상을 규정하며 답답함을 해소한다. 인문학은 여러가지 규정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실제 생활은 그렇지 않다. 완벽한 규정은 없다.


나의 관념을 동굴로 비유한다. 인문학 서적은 정밀한 드릴이어서 제조자의 의도에 맞춰 규격화됐다. 드릴은 정해진 만큼의 깊이와 넓이의 구멍을 낸다. 소설은 관념을 터트릴 이야기의 폭약이다. 폭약이 터졌을 때 동굴이 얼마큼 파괴되고 변형될지 알 수 없다. 폭약 제조자도 모르고 폭약을 사용하는 나도 모른다. 폭발이 있던 곳으로 돌아가 변형된 형태를 조사한다. 폭약의 위력은 저마다 다르다. 노찬성과 에반은 강력했다.


간략히 줄거리를 정리한다. 할머니와 둘이 사는 노찬성은 외롭다. 할머니는 일하느라 힘들고, 자신은 할 게 없어 힘들다. 그러다 할머니가 일하는 휴게소에서 유기견을 발견한다. 노견에게 에반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함께 살게 된다. 애정을 갖고 개를 돌본다. 몇 년 후 개는 암에 걸리고 동물 병원에선 안락사를 권유한다. 에반을 위해 노찬성은 전단지를 돌려 병원비를 모은다. 살 게 하나 둘 생겨 안락사를 차일피일 미룬다. 그러다 에반은 차도에 뛰어들어 생을 마감한다. 


첫 2편은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고 남겨진 자가 느끼는 외로움을 다룬 소설이다. 노찬성은 아버지의 부재를 에반을 통해 치유하려 한다. 에반과 아버지는 공통점이 있다.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보험 사고로 자살하고, 에반은 노찬성이 안락사에 쓰는 돈을 자신이 원하는데 쓰라고 자살한다. 실제 에반이 그런 의도로 자살한지는 모르나 노찬성과 나는 그렇게 받아들인다. 종이를 사이에 두고 노찬성과 공감한다. 


짧은 소설이지만 여러 상징이 있다. 나는 상징을 좋아한다. 직접적이지 않아서 생각할 여지를 많이 준다. 상징도 직, 간접적인 게 있다. 그중 간접적인 게 좋다. 예를 들면 이렇다. 1. 여자는 너무 슬펐다. 2. 여자는 눈물을 흘렸다. 3. 여자는 한 손으로 거친 자신의 팔꿈치를 만지작거렸다. 1은 대놓고 감정을 드러냈고, 2는 직접적 상징, 3은 간접적 상징이다. 간접적 상징을 좋아하는 이유는 문학적이고, 발견하는 재미를 주고, 해석할 여지가 많아 다양한 관념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김애란은 책에서 3의 상징을 능숙하게 다뤘다. 


할머니는 담배를 피우기 전에 신에게 용서를 구한다. 습관적인 말하기다. 잘못임을 알면 하지 말아야 하는데, 매번 용서를 구할 것을 알면서도 용서가 필요한 짓을 한다. 담배 연기는 질 나쁜 소문처럼 폐를 잠식하고, 할머니는 소문의 최초 유포자로서 죄책감과 즐거움을 만끽한다. 어쩌면 해서는 안 되는 일, 타부가 주는 쾌락에 중독된 것이다. 마지막에 노찬성은 용서란 단어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러나 뱉을 수 없다. 용서란 말을 입에 올리면 내 잘못이 너무 가볍고, 일상적인 게 된다는 것을 표현할 순 없지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가해자의 입에서 나오는 용서는 거짓이며, 나에게 위안을 주기 위함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 나는 보딩 게이트에서 한국행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를 위해 지금까지 쓴 돈과 노력, 수고를 계산해서 할 만큼 하지 않았나 물었다. 용서를 위한 밑밥이었다. 그때 나는 슬픔 뒤로 괴로운 일 년의 종지부로써 일종의 해방감을 느꼈다. 해방감이라는 단어는 엄청난 죄책감을 불러왔다. 그 죄책감을 씻어내기 위해 하늘에 용서를 구했다. 그 용서를 구하는 행위엔 어느 정도 타당성과 근거가 있다. 이 정도면 염치없는 것은 아니라며 나를 보호했다. 짧은 글은 그날을 비췄다. 나는 읽기를 멈췄다.


어떤 일은 평생 잊을 수 없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내게 어머니의 사망이 그렇다. 아들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지 못했다. 더 잘할 수 있었다고 다그친다. 핸드폰 만졌던 시간에 그녀의 얼굴을 물티슈로 닦아줄 수 있었다. 친구를 만났던 시간에 곁을 지킬 수 있었다. 맥주 마셨던 시간에 그녀 목에 낀 가래를 빼낼 수 있었다. 누가 완벽하냐, 너는 충분히 잘했다는 타인의 위로에 용서란 단어를 감히 입에 올리려 한다. 그러나 아무리 위로를 받아도 나의 잘못은 지울 수 없다. 내가 내린 답은, 나는 용서를 구해서는 안 된다. 덮을 수 없는, 평생 가져가야 할 죄책감이기 때문이다. 어린 노찬성도 마찬가지다.


소설은 잊어선 안 되는 것들을 상기시킨다. 웃음과 상처 위에 덮인 시간을 털어낸다. 노찬성과 에반은 짓궂게도 상처 위의 시간을 완벽히 털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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