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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띤떵훈 Aug 16. 2018

나와 세계

나는 뭐고 세상은 뭐야?


철학자들 said


세상은 완벽한 관념의 세계의 복제다.

우리가 보는 세상과 물자체의 세상은 나눠졌다.

세상에서 확신할 수 있는 사실은 내가 생각한다는 것이다.

세상은 항상 나은 방향으로 나아간다.

세상은 4개(땅 불 물 흙)으로 구성됐다.

세상은 신이 만들었다.

세상은 하나의 원소로 구성됐다.

우리의 본질적 한계로 온전한 세상을 알 수 없다.

우리는 시,공간에 제약을 받는다. 그렇다 해도 세계가 우리와 분리되었다고 할 수 없다.

우리는 욕망에 지배를 받는다. 욕망을 최대로 줄여야 한다. 욕망은 고다.

우리는 무의식에 지배를 받는다.

우리는 부조리에 둘러싸여 있다. 우리를 통제하려는 사회(시스템)에 영향을 받는다.

인간은 세계의 중심이며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세상은 우리의 의지와 외부의 표상으로 구분

세상은 기의와 기표로 구분

세상은 상징으로 구성되었고, 우리를 절대적으로 만족시킬 수 없음

완벽한 쾌락, 불편한 쾌락이야 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선한 것임

우리는 이타적이길 강요하는 세상에 반기를 들어야 한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세상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이성을 통해 세상을 이해해야 한다

세상은 매 순간 변한다. 우리도 매 순간 변한다.

세상을 규정하기로 이해해야 한다

우리의 언어는 세계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우리의 언어는 우리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의 이성은 신에 앞선다

인간은 이성을 통해 세상을 지배할 것이다

인간의 이성을 불완전하다



나 think


인간은 태생적으로 완벽하지 못하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수 없고, 그 교차점에서만 살아 사유할 수 있다. 우리의 문화와 언어는 사회를 완벽하게 이해하거나 표현할 수 없다. 우리의 생각도 완벽히 규정될 수 없다.


신, 혹은 고도로 발달된 문명사회에서 '나'라는 존재를 만들었다.


나는 육체가 없고, 정신으로만 구성됐다. 컴퓨터 알고리즘, 혹은 신호 같은 것이다. 프로그램 속에서 세상이라는 다른 정보 기호를 감각을 통해 받아들인다고 '이해'한다. 사실은 이 모든 세계가 거짓이고 환상이다.


만약 육체가 있다면 인간의 육체가 아닐 확률이 높다. 나는 내가 경험한 것을 기준으로 생각한다.


인간이란 개체는 전 우주의 수많은 종 중 하나이다. 또한 동일 개체에서도 진화를 거듭해 활동, 사유 양식이 변한다. 어쩌다 보니 이런 형태로 활동하는 것이다. 원래의 세계에서는 다른 모습일 것이다. 무한대의 가능성 중에 현대 인간의 모습을 했을 확률은 낮다. 그야말로 무한대 분에 1이다.


나는 복제품일 수 있다. 신보다는 고도로 발달된 문명 속 전자 기호일 확률이 높다고 본다. 시중에 판매되는 지구 세계 나라는 캐릭터다. 그렇담 내가 한 명이라는 생각도 잘못됐다. 나는 여러 복제품 중 하나로, 구매자의 컴퓨터 소프트웨어에서 재생되는 관념이다. 무수한 내가 저마다의 지구에서 살고 있다.



복제품의 사용처


1.

복제품으로서 개미처럼 관찰의 대상일 수도 있다. 드라마나 영화 같은 비디오 작품을 감상하듯 나의 인생을 구경하는 셈이다.


2. 풋볼 마스터처럼 플레이어가 일정한 변수를 제공해서 플레이하는 것이다. 육성 시뮬레이션 게임이다. 교육과 우연, 시련, 행운 등을 구매해서 나에게 제공한다. 그럼 그 이벤트들을 통해서 내가 성장한다. 자유도가 높은 게임으로 나의 미래도 전부 다르다.


3. 2번과 비슷하지만 플레이어가 직접 나와 링크해서 내가 된다. 환경만 설정하고, 나는 내가 플레이어란 사실을 망각한 채 지금을 사는 것이다. 고도로 발전한 문명에서는 수명이 무한대에 가깝다. 거의 모든 경험을 해서 무던해지고, 우리의 뇌처럼 생각하는 기관에 자료를 업로드해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지식을 갖게 된다. 새로운 경험과 자극이 필요한 그들은 100년짜리 게임을 하는 셈이다. 결국 내가 죽거나,  게임의 승리, 패배 조건을 달성하면 게임은 엔딩을 맞이한다. 나는(이 문맥에서 나는 2개다. 캐릭터가 아닌, 이 전자 세상 밖의 진짜 나)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며 원래의 기억을 되찾는다. 이 세상에서만 새로움과 설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게임이 끝나면 다른 세상 속 다른 형태를 가진 창조물의 속으로 들어가 다른 에피소드를 경험한다.


3-2 위의 경우 왜 이 세상의 통제자이자 절대자가 될 수 있는 플레이어인 '나'가 굳이 흙수저에 꽃미남 아닌, 우리 문명에서 숭배받는 인물이 아닌 캐릭터로서의 나를 골랐을까? 다양한 잘난 캐릭터를 플레이해봤으니 적당히 행복한 나라는 인물도 플레이하는 것이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영원에서 그 고통은 찰나다. 또한 외적인 요소는 행복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나라는 캐릭터의 엔딩을 보면 이를 발판 삼아 정말 처절하고 지옥 같은 힘든 여건에 놓인 비참한 누군가를 플레이할지 모른다. 무한대의 삶을 사는 인물에게 인간 일생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고 단순한 놀이니까.


4. 플레이어가 없는 경우도 있다. 그냥 만들어놓고 재생되는 셈이다. 무한히 반복되는 프로그램 속에서 유저 없이 무한 루팅하는 프로그램으로 존재한다. 컴퓨터는 수 천만의 연산을 순식간에 한다. 나의 인생이라는 것도 그 연산 중의 하나다. 알파고 같은 자기 학습 프로그램이 인생에서 얻는 경험과 배움을 획득한다. 나는 수 조, 수 경, 수 해, 그냥 무한대의 연산 중 하나로 인생을 산다고 믿지만 실은 그 시간은 찰나로 기기화된 정보 속에서 그렇게 느끼는 것뿐이다.


복제품의 엔딩


1. 알파고 같은 프로그램이다. 다른 경험을 쌓기 위해 다른 인생(연산)을 시작

2. 오류로 무한히 루팅 (니체의 영원회귀)와 같다

3. 플레이어의 엔딩으로 플레이어가 원래 세계로 복귀(나는 플레이어기도 하고 캐릭터이기도 함)

3-1 엔딩이라면 죽음이 엔딩일 수 있음

3-2 설정된 특정 이벤트를 했을 때 엔딩일 수 있음- 발명, 발견, 누구를 만남 등

3-3 플레이어가 설정한 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종료될 수 있음. / 예를 들면, 인간의 관념으로 30 년을 살면 자동으로 종료 설정이라고 종료 기점을 설정

3-4 이 세계에서 진짜 세계의 존재와 나의 존재를 깨달았을 때

엔딩일 수 있음 (3-2와 비슷하면서 다름)


일단 3-4는 아님. 실재의 세상을 알게 되는 3-4가 엔딩이라면, 나는 아직 이 세계에 존재할 수 없음.

3-4가 맞다면, 진짜 세계의 존재를 어느 정도 수준까지 알아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야 함. 철학과 경험, 이 세상 속 과학 기술의 진보를 통해 더 선명히 진짜 세계의 존재를 이해하면 엔딩.


4. 엔딩이 없는 게임으로, 토막토막 난 에피소드를 플레이하고 다시 현실 나로 돌아가는 것. 플레이어가 한 명이 아닐 수가 있음. 그러나 인간이라는 본질적 한계, 프로그래밍을 통해 그들은 다른 사유가 불가능하며, 지금까지 캐릭터로써 나라는 인간이 경험하고 배운 것에 한정해서 사유할 수 있음. 그래서 다수가 플레이를 해도 나는 나 하나만 인식할 수 있음.



'나'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위의 상황에서 나는 육체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다. 이 관념이 '나'다. 그러나 이 육체를 벗어난 나를 경험하거나 기억하지 못 하기에 육체도 나라고 말한다. 관념을 공유하는 인물이 모두 나인가? 그렇다면 나는 여럿이다.


1. 정해진 스토리로 인생이 진행되는 경우, 이 복제품을 플레이하는 모두가 나다.

2. 스토리에 변수가 추가된다면, 나는 무한하다. 인간 인생처럼 무한한 방향으로 성장해서.


'나'는 유일하다고 할 수 없다. 내가 무한하다는 이론에 설명을 더하면, '나'의 근거는 기본 사유와 행동 메커니즘 + 경험이다. 출발선이 똑같아도 경험을 통해 다른 개체가 된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까지 경험한 나를 시간과 공간을 통제해 박제하고 저장하면 나는 고정된 상태로 영원히 존재할 수 있다. 그 기록을 복사 붙여 넣기 하면 지금까지의 유일했던 나는 다시 무한히 증식한다. 그러나 플레이하는 순간, 다른 나로 다시 퍼져간다.


결국, 나는 하나가 아니다.

 경험을 통해 변한다. 변수로 다른 나를 만든다. 그러나 시간을 거꾸로 감으면 나는 다시 하나로 돌아간다. 육체는 내가 아니라고 했는데, 지금까지의 경험은 육체를 통해 일어났으므로 육체 또한 나라고 정정해야 한다. 식으로 만들면,

나= 타고난 신체+경험의 총체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면 내가 소중하고 최고고 유일하다는 생각을 버려야 함.



그러나 하나가 아니라고 소중하지 않은가? 아니다. 복제품이어도 일단은 사유하는 나는 내가 소중하다. 그런 메커니즘이 기본으로 설정됐다. 어쨌든 나는 무한의 일부다. 우리 세계(우리가 인식하는, 사실 우리라는 말도 어폐가 있다. 나 말고는 모두 설정된 배경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가 느끼는 세계)는 가짜다. 그러니까 이 글을 보고 있는(보고 있다고 믿는) 당신들도 나라는 전자 기호의 배경일뿐이다. 그러나 여러분은 배경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세계가 그렇게 세팅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사실을 확정할 수 없다. 나를 위해 존재해주는 당신들(NPC)에게 고맙고 미안하다. 나는 무한대 중 하나고, 당신들은 그 하나를 서브하는 구성요소기 때문이다. 내가 특별하지 못해 미안하다.


사실 생각이라는 것은 지금 이 세계에 나밖에 할 수 없다. 나도 이미 짜인 메커니즘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비슷한 메커니즘으로 같은 종으로 설정된 이들도 움직일 것이다. 내가 이 세계가 진실이라고, 모두 나처럼 사고가 가능한 실재라고 믿게 하려면 말이다. 그러나 아직 엔딩을 보지 못 했기 때문에 여러분은 배경임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배경보다 나은 게 있는가? 어차피 나도 프로그래밍한 것 중 하나인데. 껍데기일 뿐이다.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 게임에서 내가 플레이하는 캐릭터는 한 명이다. 어느 하나 실재가 아니지만, 나는 주인공에 더 애착을 느낀다. 주인공의 관점으로 세계를 보고 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게임이 끝나면 어떤 의미도 남지 않는다. 기억 속 조각일 뿐이다. 나도 기억 속 조각이고, 당신들은 그 조각을 감싸는 포장지다. 나중에 이 연산이 끝나면(엔딩) 껍데기 세계에 껍데기들로 폭로될 숫자들. 숫자가 숫자에게 말한다.



아쉽게도 내가 전자 기호, 복제품이라는 확신이 없다. 확신이 있다면, 거리낌 없이 옆에 앉아 있는 인물들을 다 죽이거나, 이 연산 세계관에서 일탈이라 불리는 행위를 마음껏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세계에 깊이 종속되어 있다. 주변에 있는 인물들을 죽인다는 말에 주변 인물이 심각하게 받아들이면 큰일 난다는, 뉴스에 나오는 미친 범죄자의 생각 메커니즘으로 방영될 수 있다는 위기가 오기 때문이다.


죽인다는 표현을 순화해서 바꿔야 한다는 생각 = 나의 생각에 확신 없음의 방증


어쨌든 바꾸지 않았다. 나름의 탐구하고 생각을 이어가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그러나 이 세계가 거짓이라는 확신이 있어도 나라는 연산은 이 세계 밖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 (내가 플레이어로서 소프트웨어 밖으로 나가지 않는 한)

 그렇다면 이 세계에서 이런 의심을 품고, 그냥 남에게 덜 피해 주는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

그러나 그렇다면 너무 멋없는 복제품이며 수동적이다. 라캉의 말대로 일탈과 나를 규정하는 타자들을 부수고 일어나 나로 존재하고 싶다. 나라는 게 유일하지 않지만, 복제품 중에서도 괜찮은 복제품이 되거나 만약 모든 인생이 동일하다면 조금 더 흥미로운 인생을 재생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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