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띤떵훈 Sep 04. 2018

O사 시계

쇼핑으로 본 나





 얼마 전 생일이었다. 와이프가 생일 선물로 받고 싶은 것이 있냐고 물었고, 나는 없다고 답했다. 매주 일요일에 지역 플리마켓에 간다. 판매자들은 일정 금액을 지불하고 자리를 빌려 사용하다 질린 상품을 판매한다. 소비자인 나는 발품 팔면서 갖고 싶었던 브랜드 신발과 옷을 저렴하게 구매한다. 마켓을 다니고부터, 소매가는 내가 얼마나 물건을 잘 샀는지  확인하는 용도다. 정가로 옷을 사는 것은 낭비가 됐다. 옷을 좋아해서 주변인들은 생일 선물을 옷으로 줬다. 매주 옷 쇼핑하다 보니 옷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정가주고 산다면) 아무것도 갖고 싶은 게 없다는 말이다.



생일상은 비싸야 한다는 와이프 말을 안 듣고, 회전 초밥집에서 조촐하게 식사했다. 당위에 휘둘리지 않으며, 합리적이며 소박함을 사랑하는 인물 코스프레를 하던 중 경매 사이트에서 O사의 빈티지 시계를 다. 빈티지 시계라 네임밸류에 비해 금액대가 높지 않았다. 이제야 갖고 싶은 생일 선물이 생겼다. 경매에 참여했다. R사에 다소 밀리지만 O사 역시 긴 역사를 지닌 브랜드다. 390불까지는 써도 된다고 와이프가 허락했다. 경매 종료가 가까워지자 무리했다. 440불까지 입찰금을 올렸으나 475불을 제시한 회원에게 졌다. 떠난 시계가 눈에 아른거렸다. 깨끗하게 승복하지 못해 다른 O사 시계를 찾아봤다.


액세서리 착용을 꺼리지만 유독 시계와 안경만은 애용한다. 차이라면 안경은 고가고, 시계는 저가다. 두 카테고리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안경은 시계보다 저렴하다. 50만 원짜리 안경은 고가고, 50만 원짜리 시계는 저가다. 브랜드 시계는 몇 천, 몇 억 원을 호가한다. 덕분에 그간 일본 C사와 S사의 제품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무의식적으로 신분 탈피의 계기가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


결말을 말하자면, 초기 버짓의 2배에 가까운 돈을 써 상위 모델을 구매했다. 끝모르는 허영이 일을 저질렀다. 한국 셀러에게 시계를 구매했다.버른에 놀러 오는 친구에게 구매대행을 부탁했다. 먼 길을 돌아 손목에 그 시계가 안착했다. 와이프의 맹렬한 비난을 견딜만한 가치가 있었다.



손목으로 시선을 돌릴 때마다 가슴속에 충만함이 차오른다. 이렇게 아름다운 시계가 내 손목에 있다니!!! 감탄에 느낌표가 몇 개씩 따라붙는다. 아마 이 브랜드 시계를 착용한 사람들을 통계 냈을 때 나는 소득분포의 최하위에 위치할 것이다. 성공한 사업가, 혹은 건물주, 혹은 그들의 자식이 차는 시계다. 나 같은 인물이 감히? 그런 이미지의 괴리에서 오는 묘한 승리감과 성취감이 나를 고취시킨다.



시계의 기능을 보고 구매한 것이 아니다. 시계를 볼 필요가 없다. 항시 휴대하는 말 그대로 휴대폰이 주머니에 있다. 시간을 알려주는 것은 물론, 스케줄 정리까지 해주는 만능 비서다. 계의 본질은 진작에 쇠퇴했다. 포스트 모더니스트의 관점에서 본질을 상실한 물체는 아름답다. 아무리 낮은 오차율이라도 핸드폰보다 정확할 수 없다. 매번 재부팅할 때마다 서버에서 보내주는 공식 시간을 액정에 띄운다. 본질을 잃고 극단의 미를 추구하는 셈이다. 오로지 치장을 위해 존재한다. 시간을 알려주는 기능은 단지 멋에 과도하게 신경 쓰지 않는 이미지을 얻는데 필요한 발판이다.  시계란 액세서리는(기본 디자인의 경우) 유행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현재 차고 있는 시계를 구매하기 전에 훨씬 저렴한 가격에 다른 제품을 구매했다. 배송을 기다리는 단계에서 시계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환불했다. 액세서리니 작동 여부는 상관없어야 맞다. 그러나 훨씬 많은 돈을 투자해 작동하는 제품을 구매했다. 시계바늘이 움직이지 않으면 멋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사람이라는 낙인이 찍힌다. 기능은 필요 없으나 기능은 해야 한다는 아이러니.



이번 시계 구매를 위해 며칠을 투자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한국, 호주, 해외 사이트들에서 매물을 검색했다. 그러다 시계가 정상작동하며, 외관이 깨끗하고 가격까지 저렴한 제품을 발견했다. 설명문을 읽고 사지 않았다. 시계의 쿼츠가 O사 정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판매자는 고장 난 쿼츠를 사제 쿼츠로 교체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다른 문제 제기. 이 시계는 정상적으로 작동하기에 합리화가 가능하다. 외모에 신경 쓰지 않는 이미지를 주고 멋까지 챙길 수 있으니 구매 조건을 충족한 것이 아닌가? 아니다. 나는 브랜드의 이미지를 구매한 것이다. 로고가 주는 아우라를 웃돈 얹어 샀다. 만약 시계의 일부가 정품이 아니라면, 그 아우라의 강도는 약해진다. 시계를 까보기 전에 누구도 알 수 없다 해도 마찬가지다.



또한 내 구매력을 자랑하는 용이기도 하다. 시계를 모르는 사람에게도 아우라를 전달할 수 있다. 단순히 시계의 금액을 말하는 것이다. 내가 이 시계를 손목에 감기 위해 얼마큼의 노력과 금액을 투자했는지 언급함으로써 시계에 관심 없는 이들에게 아우라를 불러일으킨다. 자본주의 사회에선 돈이란 확실한 가치 판단 기준이 있다. 수치를 통해 순간적으로 아우라를 전달한다. 구매 금액이 줄어들면 타인에게 끼치는 영 또한 줄어든다.



결국 라캉의 말대로 나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사치품은 그 명제의 실체화된 예다. 이상적 자아를 실현하기 위해 O사의 시계가 필요하다 판단했다. 이것은 실제로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관습과 문화가 만들어낸 가치다. 아무리 자유롭고 싶고 내 판단에 따라 살고 싶어도 결국 나는 타인을 위해 사는 셈이다. 그러나 한편 이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나의 욕망을 채워줄 팔루스인 O사의 시계를 사서 충만한 기분을 즐기면 된다. 그 사실을 아는 것으로 만족한다.

작가의 이전글 풍경의 쓸모 +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