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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띤떵훈 Aug 23. 2018

풍경의 쓸모 +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김애란 톺아보기

풍경의 쓸모


스토리- 시간제 강사인 나는 교수 대신 교통사고 가해자가 된다. 이를 이유로 곽 교수가 자신을 교수 자리에 꽂아줄 것을 기대한다. 한편 예전에 다른 살림 차려 집 나간 아버지가 돈을 빌려달라 부탁한다. 결정된 것 없이 가족들과 태국 여행 떠난다. 임용 결과를 기다리는 한편, 아버지의 연락을 무시한다. 한쪽에서 연락이 오길 바라고, 다른 한쪽에선 연락이 오지 않기를 바란다. 곽 교수의 고춧가루로 임용은 실패한다. 동시에 돈을 빌리지 못한 아버지가 파트너의 부고를 전한다. 귀국 비행기를 타고 돌아오며 생각에 잠긴다.


주인공은 아버지의 최소한의 서포트와 몇 년에 한 번씩 형식적인 축하를 받았다. 성장 과정에서 아버지에 대한 적개심이 생겼다. 아버지의 축하와 관심은 되려 불만의 원인이다. 당연한 행동을 이유로 자신에게 무언가 요구하는 것이 월권으로 느껴진다. 반면 곽 교수로부터 무언가를 요구한다. 자신의 희생으로 곽 교수는 정교수로 승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곽 교수는 물밑으로 나의 임용을 방해한다.


주는 입장에선 준 것에 상응하는 대가를 기대한다. 내가 받는 입장에서는 상대가 내게 베푼 호의로 대가를 요구하는 게 불쾌하다. 풍경의 쓸모에서 나는 요구받는 입장과 요구하는 입장에 처한다.


지방에 있는 대학으로 출근할 때 나는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출퇴근 길은 내가 처한 현실을 실감하게 만든다. 불편하고 어색하고 지루한 시간이다. 시간제 강사의 현실은 강사란 타이틀에 비해 대단하지 않다. 그에 상응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만, 현실은 만원 버스에 학생들과의 어색한 동승이다. 여기서 풍경은 나를 돌아보게 만드는 매개체다.


나는 아버지에게 버림받았다. 그의 새 파트너 때문이다. 나를 버리게 만든 주범의 병환이 아버지가 내게 돈을 빌리는 이유다. 나는 그의 부탁이 괘씸하고 그가 더 고통받았으면 한다. 일종의 복수다. 그를 용서할 생각은 없지만, 아버지의 도리를 행하는 것까지 막을 생각은 없다. 그의 호의는 받으나 부탁은 받지 않는다. 결국 내가 아버지를 버리게 된다. 나는 곽 교수에게 버림받는다. 그는 내게 은혜를 입었음에도 은혜를 갚지 않았다. 내가 그것을 빌미로 자신을 이용할 거란 걱정 때문이다. 아버지가 그간의 도움을 빌미로 돈을 요구한 것처럼 말이다. 나는 요구를 할 권리가 있었고, 요구를 거절할 권리가 있었다. 나는 결국 거절했고 거절 받았다.


마음의 짐의 무게는 상대적이다.


나는 생업을 위해 서울이라는 중심에서 멀어진다. 중심의 안과 밖이 나뉜다. 나는 핸드폰 속에서 겨울을 본다. 지긋한 여름이 싫어서다. 핸드폰 안과 밖에서 계절이 갈린다. 중심이라는 것은 내가 정한 기준이다. 나의 중심, 즉 나의 기준에서 벗어나는 것이 불쾌하다. 경계면의 밖으로 인도하는 풍경 (여름과 지방 가는 버스)가 싫은 이유다. 나의 기준에 맞추면 아버지는 내게 부탁을 하면 안 되고, 곽 교수는 나의 채용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 그러나 세상 일은 내 마음대로 풀리는 것이 아니다. 그런 세상사를 임용 실패와 아버지 파트너의 부고가 상징한다. 여름은 우리가 거부한다 해도 찾아온다.


+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바깥은 여름의 마지막 단편이다. 새로운 글을 쓰는 것보다 기존 글에 연결해서 쓰겠다. 이어지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이 단편뿐만이 아니고, 책 전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까 한다.



책을 읽고 든 생각은 상징이 많다는 것이다. 그 상징을 효과적으로 유려하게 사용했다. 이것이 프로 작가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마지막 작품 역시 상징이 많았다. 매 페이지, 매 표현이 상징이었다. 개울물에 쓸려가는 학생을 구하는 남편의 모습은 세월호 사건을 떠올리게 만든다. 남겨진 자가 느끼는 쓸쓸함, 감사의 인사를 하지 않는 학생 가족에 대한 원망 등을 말한다.


수동적으로 시간을 받아들인다. 더 빨리 가려고 노력하거나 천천히 가려 노력하지 않는다. 남겨진 자는 의미 없는 세상에서 하루하루를 받아들일 뿐이다. 그러나 피부병이 생기면서 하루를 실감한다. 등과 배, 허벅지와 엉덩이에 열꽃처럼 각질이 흉을 남긴다. 남겨진 자가 느끼는 고통이 관념에서 현실계로 넘어온다. 그를 통해 나는 부재의 고통을 맛보고 있음을 실감한다.


그 고통을 가지고 한 달 가량의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다. 우체통에 피해학생의 가족이 쓴 우편이 있다. 그녀는 몸이 불편해 바로 감사와 사과의 말 등이 섞인 인사를 늦게 했음을 알린다. 남편의 손을 내민 행위가 얼마나 큰 위안이었으며 의미였는지 말한다. 그제서야 나는 남편의 행동이 마냥 원망스럽지 않다. 의미가 있다. 삶을 존중하고 아끼며 자신의 본분을 다한 의미 있는 행동이었다. 어른,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남편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숭고함을 보낸다.


여기서 시리는 남겨진 자의 고통을 드러내는, 공허한 마음을 드러내는 상징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사는 세상에서 진심을 터놓고 말할 곳이 없다는 아이러니. 시리는 나의 말을 들어준다. 그러나 이해하고 공감하지 못한다.

우리는 세상에서 저마다 의미 있는 존재다. 함께 사는 사회에서 묵묵히 나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평범하지만 위대하다. 시리의 말을 사망한 학생의 누나가 반복한다. 남겨진 자가 갖고 가야 할 쓸쓸함은 나눔으로(공감과 이해) 줄어든다.


왜 사촌 언니는 나를 생면부지의 타국으로 불렀을까? 그녀 나름의 배려였다. 남겨진 자에게 위로를 건네는 셈이다. 나는 왜 그 부탁을 수락했을까? 남편의 부재를 알리는 현실과 함께했던 공간을 잠시 떠나고 싶었던 것이다. 외부에서 그 고통을 잊으려 하지만, 잊을 수 없다고 몸에 난 상처는 말한다. 시리 또한 거든다. 누구도 자신을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다.  



나는 내 몸에 난 상처를 누구에게도 보이려 하지 않는다. 이 흉이 나으려면 시간이 지나는 수밖에 없다. 옷을 입으면 누구도 상처를 볼 수 없다. 마찬가지로 나는 남편의 부재를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다. 멀쩡히 살아가는 누군가를 연기하지만, 누군가는 그것을 알아주길 바란다. 그 경계에 시리가 있다. 나는 시리에게 나의 상처를 털어놓는다. 털어놓을수록 더 공허하다. 철저히 나의 아픔을 숨기게 된다. 피부병처럼 남편의 부재도 시간만이 해결해주리라 믿는 순간, 작가는 희생자의 누나의 입을 빌려 남겨진 자에게 손을 건넨다. 김애란의 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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