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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띤떵훈 Nov 09. 2018

생일 축하 편지 to 와이프

와이프에게,

너를 처음 만난 날을 떠올린다. 친구 송별회 파티였다. 입 크고 마른 여자가 성큼성큼 우리 곁을 지났다. 지나 갔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돌아와서 송별회 주인공에게 인사를 건넸다. 너는 눈이 나빠서 그냥 지나칠 뻔했다고 말했다. 줄리아 로버츠처럼 큰 입으로 시원하게 웃고 자리에 앉았다. '너를 보고 한눈에 알아봤다. 네가 나의 부인이 될 거란 것을'이란 표현은 그날에 없다. 단지 너는 술 좋아하는 입 크고 마른 친구였다. 잘 마시는 친구 사이에 껴서 깔깔대며 술을 마셨다. 나는 고상한 성격의 소유자여서 너와 맞지 않았다.


술이 좀 들어갔는지, 너는 볼륨 조절에 어려움을 겪었다. 옆 옆 테이블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옆자리에 앉은 것 같았다. 어찌나 소리가 컸는지, 다른 고객들 보기 민망해서 모른척하고 싶었다. 듣기 싫어도 너의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두 가지에 놀랐다. 첫 번째, 욕을 많이 해서. 두 번째, 생각보다 똑똑해서. 난 내 잘난 맛에 산다. 내 지적 허영을 채워줄 대화상대를 원한다. 너의 목소리가 가게를 몇 번 채우고 나서야 너의 지적인 면을 인정했다. 일본 말도 잘하고, 자기 생각도 있고, 말도 야무졌다. 술자리 예절이 다소 거칠지만, 친구로 두기에 부족함 없었다.


후에 티피컬 코리안으로 나를 봤다는 너의 말이 설명하듯, 너는 내게 관심이 없었다. 너의 관심을 끌기 위해 멋들어진 일본어를 선보였다. 내가 1급 자격증 소유자로서 당당하게 일본말을 하자 너는 존나 못한다고 말했다. 그렇게 송별회는 끝이 났다.


몇 달이 지났다. 그간 아무런 연락을 하지 않았다. 우리가 서로 알고 있는 친구는 작은 가게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입 크고 술 좋아하고 똑똑한 너의 존재가 기억 속에서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이번 기회에 내가 친구로서 나쁘지 않은 재목임을 보여주고자 했다. 우리는 같이 전시회를 갔다. 너는 그곳에서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엄청 찍었다. 사진 찍는 걸 좋아하는 친구였다. 내가 네 모습을 핸드폰이 담으려 하자, 너는 신나서 포즈를 취했다. 찍히는 것도 좋아하는 친구였다. 너의 사진 셔틀이 되고, 우리는 친구가 됐다.


만나는 빈도가 늘고, 이야기가 쌓였다. 술 몇 번 사주자 더 친해졌다. 그사이 내가 알게 된 것은, 네가 생각보다 '더' 똑똑하다는 점과, 훌륭한 유머 감각의 소유자란 점이었다. 함께 있는 시간이 즐거웠다. 거기에 영양가도 있었다. 너는 예능 프로그램 단골 홍보 멘트처럼 유익함과 재미를 한 번에 준다. 이런 보기 드문 인재는 오랫동안 곁에 둬야 하는 법이다. 사진 찍어주고, 술 사주고, 술주정 받아준 결과, 법적으로 곁에 머물게 됐다. 가끔 고성 핑퐁을 통해 이웃집에 피해를 주지만, 너와 함께 하는 시간이 좋다. 이렇게 남편 신분으로 생일 축하 편지를 쓸 수 있어 영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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