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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띤떵훈 Dec 09. 2018

 A 씨와 나의 아비투스



요즘 A 씨를 자주 만난다. 나보다 4살이 어리지만, 대화 상대로 부족함이 없다. 그를 처음 만난 장소는 독서 모임이다. 모임원은 20 명가량 되지만, 매번 이야기하러 오는 인물은 많지 않다. 항상 나오는 인물은 4 명이다. 모임장, A 씨, 나, 국어교사 출신 동갑 친구. 자주 보면 정이 생긴다. 독서 모임에 애정이 있는 나는 정에 유대감을 추가한다. 모임에서 그는 타인의 말을 경청하며 소신 있는 발언을 한다. 자기 생각이 있는 사람과의 대화는 환영할만 하다. 그와 내가 비슷한 생활 패턴을 갖고 있음을 안 것은 최근이었다. 치과 의사인 그는 예약이 있을 때만 출근한다. 12시~2 시 사이에 퇴근에, 반나절의 자유란 호사를 누린다. 한량 둘이 카페에 모여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게 된 배경이다.

같은 한량이지만, 뒤에 있는 배경은 다르다. 치과의사인 그와 자영업자인 나는 근무 시간과 수입이 비슷하다. 이타적인 모습도 동일하다. 나는 집안이 더러워 고통받는 이들을 돕고 그는 치통을 호소하는 이들을 돕는다. 주는 직업에 귀천을 나누는 일에 덜 열심히다. 그러나 치과의사와 청소부 사이엔 인식 차이가 존재한다. 비슷한 듯 다른 우리에겐 어떤 배경 차이가 있을까?

제목에 나온 아비투스는 계급에 따른 생활양식이 존재한다는 이론이다. 부르디외가 처음으로 언급한 개념이다. 우리의 행동의 근간에 자리한 무의식적 성향을 간파한 것이다. 나의 아비투스는 노동자다. 운동부 출신의 아버지는 고졸이고, 동대문에서 장사하고, 머리 잘랐던 어머니는 초졸이다. 두 분 다 배움에서 즐거움을 찾지 않았다. 하루하루의 노동에서 삶의 양식을 얻는, 소박함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특히 아버지의 경우는 정도가 심하다. 그와 함께한 나의 모든 인생을 통틀어 그가 책을 읽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의 취미는 6시 내 고향 보고, 동내 어른들과 소주잔 부딪치는 정도다. 10대 시절 나의 생활양식은 그에게 규정됐다. 슈퍼에서 가장 저렴한 제품을 고르고, 병원비를 아끼기 위해 약간의 고통은 감내한다.

A 씨의 입을 통해 그의 부모님을 알게 됐다. 파편이 하나 둘 모여 인상을 완성했다. 최초의 파편은 독서 모임에서 등장했다. 경제학 책을 다루던 때였는데, 우연히 주식 얘기가 나왔다. 나는 NC소프트와 네이버의 주주임을 밝혔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공교롭게도 그 두 회사에 몸담았던 적이 있음을 알려줬다. 그의 아버지는 네이버는 창립 멤버였고, NC소프트의 CFO를 역임했다. 대기업의 CFO란 타이틀은 대략적인 가정 환경을 그리기에 충분한 물감을 제공했다. 몇 번의 만남 뒤에 그가 치과 의사가 된 계기가 그의 어머니 때문이었음을 알게 됐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서울대 동문인데, 30대가 돼서 직업에 염증을 느끼고 7 개월의 준비를 거쳐 재수능을 봤다. 그 7개월의 노력으로 치대에 입학했다. 치과 의사가 나쁘지 않은 직업임을 자식에게 알려주고, 그 길을 밟길 권유했다. 착한 A 씨는 호주 고등학교에서 상위 0.3%의 성적을 얻어 치과 의사가 됐다.

한 쪽 부모는 여전히 하루 벌어 하루를 살고, 다른 한 쪽은 은퇴해서 자본이 주는 불로소득을 통해 편안히 여생을 즐긴다. 글에서까지 우열을 나누고 싶지 않다. 그냥 다른 공간에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인생을 산다고 정리한다. 반면 그들의 자식은 같은 취미를 갖고, 한 공간에서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눈다. 

나는 준-자본가가 됐고, 부모와 다른 방식으로 살고 있다. 그럼 부르디외의 아비투스 이론은 틀린 것일까? 아니, 온전히 노동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니 맞는 것인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린 걸로 해두자. 어떤 요소가 나를 우리 부모님의 아비투스에서 벗어나게 만든 것일까? 새로운 가족이다. 이인 가족을 구성하는 다른 한 축은 와이프다. 와이프는 경제적으로 굉장히 풍요롭지 않지만, 지적으로 충만한 가정환경 속에서 자랐다. 정치적, 사회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법을 알고, 목소리에 근거를 싣는 법도 안다. 그녀와의 동거는 나의 소비와 세상을 대하는 방식을 서서히 바꿨다. 그전에도 앎에 대한 갈증, 지적 허영은 있었다. 다만 생각은 쌓이기만 하고 실천함에 있어 미적지근했다. 그녀가 방죽의 수로를 열어준 덕분에 적극적으로 허영을 채워가고 있다. 거기서 파생된 독서와 글쓰기는 나를 규정하는 틀을 변화시켰다.

이제 나는 부모가 내게 보이지 않는 손을 통해 전달한 아비투스를 과거의 어딘가에 놓고, 내가 원하는 아비투스, 아니 이제 아비투스란 말을 사용할 수 없으니 인간상으로 거듭나고 있다. 고소득자인 A 씨는 개업을 하면 저 하늘을 뚫을 듯 소득을 올리겠지만, 나도 나름의 노력을 통해 격차를 벌리지 않을 생각이다. 소득이든 배움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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