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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띤떵훈 Feb 06. 2019

쇼핑하는 여배우

한 시간 소설

 2:55분 시작,




 요즘 안 팔리는 아이돌 출신 배우 김 양이 등장했다. 배경은 프랑스 태생 명품 브랜드 매장이다. 몇 쌍의 눈동자가 그녀를 훑었다. 가십 좋아하는 눈동자들은 흥미와 조소를 띠었다. 눈동자의 주인들은 꼿꼿이 편 어깨를 굽히지 않고 자신의 쇼핑을 이어갔다. 김 양은 고개를 들고 넓은 보폭을 자랑하며 매장의 중심으로 들어온다. 무대를 가볍게 시야에 담았다. 여배우의 욕망에 가장 가까운 곳으로 향했다.


브랜드 매장은 깔끔했다. 먼지 한 톨 없을 것 같은 청결함과 세련됨을 자랑했다. 대리석 바닥은 LED 조명의 강한 빛을 반사해 화려함을 끌어올렸다. 정오의 태양보다 밝은 인위적 빛은 동류의 도도함을 비췄다. 빛을 받은 다리는 또각 거렸다. 빙판 위 스케이트처럼 날카로운 힐이 빛나는 대리석을 가른다.


검정 정장을 입은 직원들 사이에 매니저로 보이는 이가 김 양에게 다가왔다. 겸손과 당당함을 반반 섞은 인물이다. 직원은 어느샌가 브랜드의 일부가 됐다. 프랑스 출신의 도도함이 김 양에게 인사를 건넸다. "반갑습니다 고객님" 자막엔 '봉주르'. 김 양은 고개를 살짝 끄덕여 인사를 받았다. 직원은 찾는 제품이 있는지 물었고, 김 양은 특별히 없다고 대답했다. 김 양은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는데, 불편함의 원인이 접객의 수준인지 접객 자체인지 알 수 없었다.


봉주르는 기계적이어서 되려 자연스러운 멘트를 이었다. 브라운관과 스마트폰에서 무수히 본 그녀의 몸매를 처음 보는 것처럼 연기했다. 연기자 앞의 연기는 부족함 없었다. 그녀도 매장 안에선 전문 연기자이므로. 옷걸이 하나를 들어 올리며 출신 성분을 브리핑했다. 정혼 상대를 만난 듯 상대의 외모 수준과 얼마나 잘 맞는지,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선택인지 주저리주저리.



입술 안에서 혀를 오물조물거리다 김 양은 말했다. 어떤 위치에 설지 결정이 끝났다. 오늘은 기분이 그랬다. 그거 말고요. 아이돌과 여배우 중 여배우 카테고리를 선택했고, 대중 친화적과 도도함 중 도도함을, 정중함과 쌀쌀맞음 중 쌀쌀맞음을, 검소함과 사치 중 사치를 골랐다. 모든 객관식은 그녀의 일부다. 어떤 조합도 그녀다. 그 자리 그 시간에 적합한 하나를 택한 것뿐이다. 이제 무대에서 퇴장할 때까지 맡은 바 책임을 다 해야 한다.



검지 손가락을 들어 더 고급스러움에 가까운 옷을 가리켰다. "저거" 손가락을 굽히지 않고 방향을 살짝 틀어 다시 "저거"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저거, 볼 수 있을까요?" 직원의 고민이 끝났다. 고객은 이제 여배우가 됐다. 여배우 상대도 걱정 없다. 자연스러운 대응을 한다. 여배우의 품위에 맞는 옷이 걸린 옷걸이 세 개를 들었다. 이유를 설명했다. 이 드레스는 할리우드 배우 아무개가 최근 국제 영화제에서 입어 화제가 된 옷이며, 이 원피스는 최근 브랜드 화보에 중화권 배우 아무개가 입은 옷이고, 이 코트는 출시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제품으로 캐시미어가 50% 포함되어 보온과 착용감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제품이다 나불나불.


코트 지퍼 아래에 작은 종이 택이 나풀거렸다. 김 양의 시선은 택을 제외한 제품의 모든 부분을 스쳤다. 코트의 표면을 엄지와 검지로 조물딱 거리며 나긋이 "캐시미어..." 모든 설명 중 그녀가 고른 인물상에 가장 적합한 단어를 입 밖으로 되새겼다. 이것은 조건반사 같은 것이다. 김 양은 상대가 생각하는 나를 연기한다. 대본에 적힌 대사처럼 그녀가 뱉을 수 있는 말은 한정적이다. "이번 시즌 제품이죠?"


매장 안의 도도함 연기하는 손님 1,2,3이 힐끗 쳐다본다. 점원이 들고 있는 세 가지 제품은 브랜드의 기표가 되어 고급이란 단어를 반복한다. 고급 고급 고급 고급... 최면에 걸린다. 대사 중인 김 양에게 '여배우' 감투를 씌운다. 깔보는 기색을 줄여도 된다는 OK 사인을 받는다. 올라간 한쪽 입꼬리를 내린다. 김 양의 캐릭터 선택은 작가의 의도에 맞아떨어졌고, 연기에 합격점을 받았다.



지향하는 바가 중화권을 넘어서고 있으므로 중국제 원피스는 탈락. 헐리우드제 드레스는 통과. 신제품과 캐시미어의 상징인 코트는 새로움과 고급스러움의 화신인 여배우 김 양에 적합. 섬섬옥수를 볼에 갖다 대고 고민의 신음성 액션. "음..." 카메라에 잡히지 않을 때 휙 다른 매대에 걸린 티셔츠를 스캔. 직원이 내게 집중하자 다시 표정 연기 액션. 고민의 시간이 길어지면 안 된다는 감독의 코칭이 되살아나 전문 연기자로서 즉각적인 수용. "그거 두 개 주세요."


점원은 합을 잘 맞춰 의도한 감정 과잉을 표현. "안 입어 보셔도 괜찮으세요?" 점원의 적절한 대사에 김 양은 만족. 엑스트라들은 훌륭한 연기를 감상하며 속으로 박수, 그리고 배우의 권위에 찬사. 고급과 멋에 통달한 김 양의 분신은 눈으로 이미 피팅을 끝냈고,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다. "네 계산해주세요."


계산대로 점원과 김 양은 걸었다. 점원은 어느샌가 겸손의 비율을 높였다. 김 양은 당차지만 과하지 않는 태도로 점원의 곁을 걷는다. 대리석 바닥에 적절한 공명. 달랑거리는 두 개의 택을 끝까지 쳐다보지 않는다. 자신이 고른 캐릭터는 돈에 연연하지 않는다. 점원이 바코드로 삑, 삑. 마지막까지 상대와의 적절한 합을 보인다. 제품을 쇼핑백 두 개로 나눠 담는다. 한 곳엔 고급과 권위를 담고, 다른 한 곳엔 여배우의 주이상스를 담는다.


동작 뒤에 대사가 따른다. 여배우의 권위를 해치지 말아야 한다. 아무렇지 않게, 일상적으로, 무릎을 검사 막대로 칠 때 오르는 발처럼, 딱밤 맞았을 때 "아!"하고 뱉는 단말마처럼,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지만 일단은 절차니까 억지로 뱉는다는 느낌을 살려 달라는 디렉션. 정보 전달의 의도 말고는 아무 의미 없는 한마디. "드레스 200만 원, 코트 800만 원, 합계 1000 만 원입니다."


중요하지 않은 장면이라 카드 꺼내고 넣는 장면은 생략. 김 양은 역할을 마치고 무대 밖으로.


커트!





3:54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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