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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띤떵훈 Apr 17. 2019

새로운 친구

미셸 우엘벡


또 다른 친구를 발견했다. 미셸 우엘벡이란 친구로, 58년 개띠다. 우리 어머니 나이지만, 국경을 넘었기에 친구로 인식한다. 그가 쓴 복종에서 주인공이 한 세기 전 작가인 위스망스와 깊이 있는 교감을 나눈 것을 보라. 태어난 날은 숫자에 불과하다. 오늘은 미셸 우엘벡이 어떻게 나의 친구 바운더리에 들어왔는지 설명할까 한다.


입 아프지만, 혹여 내 글을 처음 볼 사람들을 위해 다시 말한다. 나의 취미는 팟캐스트 청취이며, 특히 도서 팟캐스트 위주로 듣는다. 최근 청취한 에피소드가 미셸 우엘벡의 디스토피아 소설인 '복종'이다. 그는 요새 책 좀 읽는다는 이들 사이에서 다른 고전 작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입지를 갖고 있다. 덕분에 작품을 읽어본 적은 없지만, 이름을 듣고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패널은 복종을 간략해 소개했다. 샤를리 에브도 테러가 있기 직전에 출시된 작품으로 테러 이후 시의성을 더했고, 대중의 관심도 따랐다. 듣다 보니 이 책이 그 책이구나!의 지점에 다다랐다. 플롯을 여러 군데서 접한 그 작품이었다. 팟캐스트가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방송 청취를 중단했다. 직접 읽고 다시 듣기로 정했다.

제주 난민 이슈를 조사할 때, 다른 네티즌들과 설전을 벌일 때 이슬람에 대한 자료 조사가 필요하다 느꼈다. 그 시점에 이슬람에 대하여라는 프랑스 지식인 작가가 쓴 작품을 인상 깊게 읽었다. 꾸란이 어떻게 그들을 움직이며 본질적으로 갖고 있는 법과 법전의 딜레마를 엿봤다. 개인적으로 세상을 쉽게 설명하려는 종교란 개념에 관심을 느끼지만 거리를 둔다. 특히 일신론 종교엔 더더욱. 유대교 이슬람과 기독교의 일신 종교는 무수히 많은 폭력과 억압의 출처다. 사람들을 미치게, 혹은 맹목적으로 만드는 힘의 원천이 궁금하기도 하며 두렵기도 하다. 만일 그들이 현대 민주국가 중 한곳을 장악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런 생각과 경험을 가진 내게 흥미로운 질문이다. 21세기에 종교가 어떻게 국가를 장악하는가, 그 과정이 궁금했다.

우선 나의 가장 큰 문학 친구를 꼽자면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란 이름을 꺼내야 한다. 그의 문체와 통찰은 나의 정신을 휘어잡았다. 어떤 요소에서? 1. 괄호 사용 2. 찌질함으로 비칠 정도의 과한 솔직함 3. 겉도는 자아 4. 냉소적 태도 5. 지성 등이다. 롤리타에서 본 그의 특징 5가지를 미셸 우엘벡의 작품에서 찾았다. 햄버트의 체제 순응적, 현실적 버전이 프랑수아다. 문학에 관심이 있고, 소질 혹은 실력이 있어서 사회에서 인정받는 주인공은 사회의 기표들에 불쾌감을 갖고 있다. 그리고 약간의 권태도 있다. 나는 아웃사이더를 좋아한다. 체제에 순응하지 않거나, 순응하면서도 속으론 반란과 해방을 꿈꾸는 이들이다. 자기 파멸적인 냉소와 찌질함은 그들에게 인간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문단을 나눴다. 왜냐면 냉소와 찌질함에 대해 더 깊게 이야기 나누고 싶기 때문이다. 1. 냉소. 냉소는 불만의 표현이다. 불만이 많다는 것은 원하는 것이 많다는 뜻이다. 욕망이 많아야 이야기가 풍성하다. 투머치 욕망은 자기 파멸의 길로 가는 티켓을 준다. 냉소의 소는 웃음이다. 욕망의 해소에 웃음이 들어가 있다. 웃음의 대상은 본인이거나 이 세상이 된다. 파멸로 가는 과정에 웃음이라는 동반자가 있다. 내게 웃음은 항상 옳다. 비웃음도 포함된다. 자기 연민에 비웃음을 보낼 때는 객관화의 시점이다. 이는 논리적 시도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비극의 카타르시스는 온갖 불안한 감정이 터져 나오며 현실과의 괴리를 깨닫게 만들 때 느끼는 지적 만족이다. 그 과정이 너무 빡세기 때문에 사이사이 웃음을 넣을 줄 아는 존재가 필요하다. 환기의 역할을 맡는다. 결국 웃음은 독자를 향한 배려다. 또한 인간적이다.

2. 찌질함. 찌질함도 비슷한 맥락이다. 자기를 솔직하게 보려는 시도는 아름답다. 내가 해석하는 찌질함은 극단의 진실이다. 객관적 진실이 아닌 주관적 진실이다. 내가 느끼는 것을 상징계의 언어를 통해 100%에 가깝게 전달하려는 시도가 찌질함의 발로다. 세상엔 하면 안 되는 것들, 해야 하는 것들이 많다. 작가는 지식인에 속한다. 지식인에게 엄중한 지적 잣대가 적용된다. 그들이 본인 안에 있는 속물성과 사회정의에 반하는 본심을 가질 때 배출할 수 있는 곳은 캐릭터의 입 밖에 없다. 잃을 게 많은 이들에게 파격은 파격 중의 파격이다. 이게 예술이다. 작가와 독자의 상상계의 욕망이 일시적으로 폭발하는 승화된 주이상스의 샘이다.

괄호 사용이 왜 좋은지 전 글에서 충분히 말했기에 생략한다. 그러나 괄호에 대해 나중에 한 편의 글로 더 깊게 들어갈 생각이 있다. 괄호는 웃음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괄호는 생략 가능한 정보를 담는다. 그러나 굳이 생략 가능한 정보를 꺼내면 그 정보 이상의 정보가 탄생한다. 불필요함에도 굳이 쓰려는 태도 때문이다. 더 이상 불필요가 아니다. 불필요를 가장한 필요가 된다. 그런 재밌는 본질이 괄호의 매력이기도 하다. 나는 이 글에서 의식적으로 괄호를 쓰지 않았다. 왜냐면 나의 유머를 봉인하려는 의도 때문이다. 괄호란 툴의 사용을 제한하면 나의 유머감각이 거세된다. 유머를 풀어놓을 곳을 잃었기에 지면에 안착하지 못하고 웃음은 증발한다.

미셸 우엘벡의 깊이와 레퍼런스 능력, 찌질함과 냉소적 태도는 그를 친구 삼기에 부족함 없게 만든다. 나는 모순의 덩어리다. 앞의 문장 속 레퍼런스란 단어 뒤에 괄호 사용을 하면 정리하기 쉬웠겠지만 괄호를 봉인당한 상태여서 이렇게 풀어쓴다. 레퍼런스는 배경 지식과 아카데믹함을 증명하는 도구다. 나 이만큼 많이 읽고, 배웠다. 나의 주장의 근거를 권위 있는 누군가의 말로 대신한다는 의미도 있다. 효율성 추구다. 또한 아카데믹한 글쓰기 (논문, 에세이)에선 레퍼런스가 필수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다. 다양하고 적절한 레퍼런스는 레퍼런스 사용 경험치를 드러낸다. 아카데믹은 중심부다. 논의를 이끄는 이들은 학계에 있다. 중심인물이면서 외부인인 사람들의 괴리가 주는 쾌감이 있다. 예전에 무한도전에서 하하가 말한 주인공 역할과 비슷하다. 본인은 졸라 센데 센 걸 몰라. 몰라서 센 척도 못 해. 약한 모습도 보여줘서 친근해. 근데 쎄. 본문의 캐릭터는 본인들의 치부를 드러내고 요상해보이지만, 사실은 세계적인 작가. 내 무의식적 욕망인가? 변두리에 있으면서 중심으로 진입하고 싶어하며, 중심에서도 변두리 감성을 유지하고 그로인해 새로움과 충격을 주고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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