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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띤떵훈 Apr 22. 2019

문화비평 적성검사

그리고 문화비평은 무엇인가?


 이번엔 문화 비평에 대해 이야기할까 한다. 나의 글쓰기는 어디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가? 지난 몇 년, 글을 써오며 몇 차례 한 질문이다. 나는 아는 척을 좋아한다. 세련된 방식으로 아는 척을 하면 형식미를 더한다. 결국 내 글의 최종 지향점은 비평이다(다른 글쓰기도 좋다). 여기저기서 주워들을 내용을 종합해 논리틀을 만들고 그것으로 세상(문학작품의 세상, 영화의 세상, 현실 세상을 모두 포괄하는)을 해체하고자 한다. 문학비평은 하위 카테고리다. 모두를 포괄하는 조금 더 본질적인, 전체적인 비평을 하면 좋겠다고 느꼈다. 그 본질적, 전체적 비평이 문화 비평이다.



나의 견문은 좁고, 대외적으로 드러낼 지식의 증서도 없다. 하지만 적성을 기준으로 보면 나쁘지 않다. 이유는 3가지다. 논리, 철학, 라캉 때문이다. 나는 논리적이고자 한다(와이프와 언쟁할 때도 논리 들먹이며 그녀의 화를 돋운다). 비평가의 미덕은 논리다. 헤겔주의가 비평의 근간이 되는 것이 그 증거다. 헤겔은 독일 관념론의 정점(그리고 상징)으로 이성이 세상을 구원할 거라고 봤다. 여기서 이성을 논리로 읽어도 무방하다. 논리병 환자가 하기에 적합하지 않은가?



2, 3 번째 이유는 자의적 해석에 기반한다. 문화비평은 문과 장르다. 포괄한다고 하지만 비평의 틀은 보통 인문학이다(특히 철학). 인문학의 시작은 철학이다. 나는 철학 개념을 보고 듣고 사용하는 것을 즐긴다. 철학의 복잡함이 가장 큰 지적 유희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라캉을 말한다. 정신분석학과 라캉 철학은 다양한 비평에 쓰인다(이택광은 서문에서 욕망의 변증법을 언급했다). 개인적 사상의 단위로 볼 때,  라캉은 비평에서 가장 범용성 높은 툴 중 하나다. 오랜시간 라캉을 읽어 왔기 때문에 써먹을 수 있다(이해가 모자르지만, 향은 낼 수 있다. 바나나맛 우유 느낌).



 내 지적 허영은 한 가지 큰 문제점을 갖고 있다. 이해가 확실치 않아도 일단 아는 척하는 경향이다. 막연히 사회 문화 전반을 아우르는 비평으로써 '문화 비평'이란 개념을 사용했다. 이번 이택광 비평집 (제목부터 국내 최고의 문화 비평가로서의 자의식 폭발하는) '이것이 문화비평이다'를 읽고 교통정리를 끝냈다. 이택광은 서문에서 문화 비평이 갖는 의의와 정의, 역사를 논리적으로 서술했다. 내가 못나서 잘난 이들의 잘난 모습을 보면 기분이 좋지 않다. 이택광의 센 척(실제로 쎄다)을 보고 팔짱을 끼고 있었지만, 서문의 완성도에 박수를 칠 수밖에 없다. 감히 명문이라 평하겠다. 서문의 내용을 요약, 정리했다. 아래는 그 내용이다.






국내엔 90년대부터 문화비평 자리 잡았다. 80년대는 문화좌파로 불리며 비난 대상이 됐다. 드라마 감상문을 문화비평으로 규정했다(유사-문화비평). 90년대 이후 산업논리 지원하는 1. 주례사 비평 2. 연예 칼럼은 문화비평의 부정적 인상 확대 재생산했다. 욕망의 변증법을 작동하는 대중문화 읽고, 여기서 정치적 사유의 계기를 찾아내는 것이 문화 비평이다.


인터넷과 SNS의 무한 복제 능력은 특정한 내용을 탈 맥락화 -> 전혀 다른 의미로 만듦 -> 괴담과 풍문 -> 진리 불러오는 역설이 있다.


문화를 비평하는 것이 문화비평가라는 것은 단면적이다. 영어 위키는 문화비평가를 "기존의 문화를 전체적 관점에서 급진적으로 비평하는 사람"이라 규정한다. 급진성은 뿌리에서 보는 것이다.


장르 비평을 모은 것이 문화 비평인가? 아니다. 핵심은 장르 비평의 경계를 넘는 것이다. 전체의 관점에서 보는 방법론을 취하므로, 단골 메뉴는 헤겔주의다. 그러나 발터 벤야민 등의 역순으로 비평하는 비평가도 있다. 매튜 아놀드, 보들레르, 니체도 문화 비평가다. 그들의 저술 목적은 비참한 삶을 극복하기 위함이다.


20세기부터 좌파의 전유물로 여겨졌다. 루카치나 벤야민, 프랑크푸르트학파로 이어지는 흐름을 형성한다. 객관성보다는 가치 평가나 판단을 내린다. 이택광은 롤랑 바르트의 현대의 신화를 최고의 문화 비평으로 꼽는다. 문화라는 형식으로 사회 구조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주관성 때문에 문화비평이 정치적인 것이다.


리얼리즘이 비평가의 윤리다 -> 리얼리티는 실재에 대한 열정이다 -> 리얼리티는 형식을 갖는다 -> 형식은 논리화된다 -> 문화비평이 논리를 파악한다 -> 정치적 활동이 된다.


대문자 Culture는 고급문화라 불리는 형식이다 ->  우열의 관점을 드러낸다 -> 이는 자본의 논리다 -> 문화비평이 이를 해체한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새로운 것에 대한 사유다. 문화비평이 잔해더미에서 새로움을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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