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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띤떵훈 Jul 05. 2019

일단 우울한데, 그렇게 나쁘진 않아

 내게 우울은 어울리지 않는다. 우울하다는 감정은 예술가와 본인의 인생과 힘겨운 싸움을 하는 누군가에게 어울리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나는 인생에 고전하지 않으며, 만족스러운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적당히 일하고 그 뒤에 읽고 쓰고 찍고 이야기 나누며 시간을 채운다. 당장 돈이 없어 길바닥에 내몰릴 위기도 없으며, 와이프와 관계도 원만하다. 주변에 취미를 공유하는 괜찮은 친구들도 몇 있다. 영어 표현에 Cannot be better란 말이 있다. 더 바랄 게 없는 상태라는 뜻인데, 내가 여기에 가깝다.



며칠 우울하다. 여전히 일상은 큰 문제 없이 흘러가고 있다. 그런데 왜? 우울함은 아무래도 예술가의 전유물이 아닌가 보다. 우리 몸에 있는 호르몬이 어떤 영향을 주고받아 나오는 감정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긍정 전도사로 활동해도 무리 없는 내게 찾아온 걸 보면 말이다. 논리적으로 딱딱 원인과 결과를 찾을 수 없다. 우울이라는 단어 앞에 붙어서 자연스러운 단어를 몇 개 나열한다. 미디어와 문화가 만든 자연스러운 그룹화다. '가정불화' '가난' '격무' '질병' '실패' 등.  해당하는 단어가 없다. 결국 그냥 우울한 것이다.



우울을 한 발짝 뒤에서 구경하고 있다. 흥미로운 현상이다. 우울한 나는 어떤 감정을 갖고 있고, 어떤 행동을 하며,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게 되는가? 중학교 1학년 때 왕따 당했을 때 찾아온 우울과는 결이 다르다. 30대의 예고 없는 우울은 경험 밖의 존재다. 나는 현장 학습 온 학생처럼, 곤충 채집하는 파브르처럼 새로운 발견에 경탄한다. 덕분에 우울과 즐거움이란 상반된 카테고리가 하나로 합쳐져 있다. 이는 조울증과는 다르다. 붕 뜬 즐거움, 신체적 원인에 의한 막을 수 없는 '조'증이 아니기 때문이다.



새로운 경험은 인식의 지평을 넓힌다. 전에도 간헐적 우울은 있었다. 꿈의 내용이 영향을 끼쳤는지,(내용은 기억이 안 난다) 아침에 긴 잠에서 깼을 때 몇 시간짜리 우울을 느꼈다. 나의 무의식이 현재의 틀을 깨라고 자극하고 있는 것이었을까? 이유는 모른다. 어쨌든 그런 우울은 아침 먹고 바깥공기 쐬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순간순간 얻는 깨달음이 있었다. 그리고 우울이 장기집권 중인 지금 그 깨달음은 시간과 비례해 커진다. 깨달음의 핵심은 사람의 감정은 항상 합리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우울에 따르는 욕망은 디오니소스적이다. 자기 파괴에 대한 방어 기제를 약하게 만든다. 더 안락한 삶, 긴 인생, 건강한 매일을 유지하는 초자아의 법을 어기라 종용한다. 영원한 주이상스를 위한 나의 몸부림은 죽음 충동으로 향한다. 뭐 그렇다고 와! 죽고 싶다. 죽으면 졸라 좋겠어!는 아니다. 그래 나 할 만큼 했지. 즐거운 삶이야. 이 삶에서 맛볼 수 있는 감정도 웬만큼 아는 것 같단 말이지. 상황만 다르지 느낄 수 있는 감정은 비슷해. 이미 끝판 다 본 거나 다름없는데 굳이 다음 판으로 넘어가야 하나? 여기서 '그래, 네(내) 말이 맞아. 그냥 세상과 작별하자.'라는 답은 다행히 나오지 않는다. 비슷해도 즐겁고 행복한 일이 많은데, 더 누려야지라는 합리적 거부가 따르기 때문이다. 내 합리의 승리다.




정리하자. 나는 현재 (약간) 우울한 상태고, 새로운 경험을 통한 인체 실험 중이다. 정도가 심하지 않아 딱히 우울을 없애고자 노력하지 않는다. 합리라는 울타리가 아직 튼튼히 버텨주고 있다. 인간은 약간의 고통을 즐긴다. 정도가 세져서 일상에 지장이 생길 것 같으면 선생님을 찾으러 갈 예정이다. 아직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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