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 사진 (Street photography)를 좋아하고, 인스타그램을 사용하는 이라면 팔로우 하는 계정이 몇 가지 있다. Magnumphotos, myspc, SPI, Whereischerry_photograph 그리고 eyeshot magazine. 위 계정은 유명세만큼이나 훌륭한 작품을 보유하고 있다. 매그넘은 매그넘 작가들만 다루는 계정이므로 논외로 하고, 언급한 계정 중 가장 수준 높은 거리 사진이 포진한 곳은 아이샷 매거진이다. 많은 사진 계정은 이름만 매거진일뿐 간행물을 내지 않는다. 반면 아이샷의 에디터들은 온라인, 오프라인 경계를 넘어 눈에 보이는 움직임을 만들고 있다. 까다로운 기준으로 매일 스트릿 포토그래퍼를 선정하고, 그들의 대표작을 6장씩 포스팅한다. 덕분에 구독자의 입장에선 엄선된 작품을 볼 수 있다. 아이샷 계정에 낯익은 사진 6장이 올라왔다. 오늘(2019년 8월 8일)의 사진으로 선정된 작가, Paul Russell의 사진을 이야기해볼까 한다.
폴 러셀의 사진을 작가보다 먼저 알고 있었다. 거리 사진에 관심을 갖고 찾아보며 작가 하나하나의 이름을 기억하게 된다. 아카이빙하듯 하나 둘 작가의 이름과 대표작이 머리에 쌓여간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름을 다 외우기란 쉽지 않다. 몇 백의 작가 이름은 한 귀로 들어와 한 귀로 흘러 나갔다. 이미지 언어는 언어보다 직관적이며 기억에 잘 남는다. 자연히 그의 이름은 지워지고, 작품만 남게 됐다.
거리 사진을 시작한 초기엔 거리 사진의 큰 흐름을 파악하는데 시간을 썼다. 문학에서도 흐름의 축이 되는 고전 위주의 독서를 한다. 비문학도 비슷하다. 철학이나 경제 사회학에서는 개론서와 대표작을 먼저 읽을 후에 현대 담론으로 넘어온다. 이런 학습 패턴이 거리 사진을 파악하는 데도 유효했다. 사진의 역사와 담론, 비평, 에세이, 사진 철학, 사진집 등을 읽었다. 이 백년을 빠르게 훑었다. 큰 틀의 사진, 거리 사진, 누군가의 거리 사진으로 카테고리를 좁혀갔다. 거리 사진 관련 서적들 또한 포괄적이어서 한 세기 전 작가부터 현대 작가까지 망라됐다. 여기에 폴 러셀이란 이름이 있다.
거리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알만한 거장, 앙리 까르티에 브레송, 조셉 코델카, 윌리엄 클레인, 알렉스 웹 등의 작가들이 사이에 스마트폰 보고 인스타그램하는 젊은 피 폴 러셀이 앉아 있다. 도대체 어떤 사진을 찍는 사람이길래 유명세를 타는 것일까? 이번 글에선 그의 사진을 보며 이야기를 나눌까 한다.
폴 러셀을 말할 때 이 사진을 빼놓을 수 없다. 그의 대표작이자, 다양한 출판 서적에서 만나볼 수 있는 이미지다. 노란 인형탈은 그의 인스타그램 프로필 사진이기도 하다. 폴 러셀 사진의 특징은 배경과 사람의 조화다. 배경 안에 인물들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설명한다. 비교적 먼 거리에서 담는데, 맥락 안에서 인물을 보게 만든다. 그의 갤러리(http://www.paulrussell.info)에선 한 인물이 프레임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사진을 찾아볼 수 없다.
인형탈 사진을 봐서 알겠지만, 그의 사진의 특징은 유머다. 위의 두 할머니 사진도 마찬가지다. 두 개의 같으면서(인간, 여성, 노인) 다른 피사체는 열린 소재다. 지팡이로 싸움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상대의 작은 키를 지적하는 것처람 보이기도 하다. 해석의 여지가 많다. 둘에서 나오는 차이가 흥미를 유발한다. 시선이 머문다. 그러다 보면 다른 요소 또한 눈에 들어온다. 크고 작은 할머니들 뒤로 크고 작은 창이 있다. 파란 하늘이 비치는 창틀이라 생각하지만, 자세히 보면 조악한 질의 인쇄물이 걸린 액자다. 크기가 다른 인물 둘, 크기가 다른 액자 둘이 병렬로 배치됐다. 작은 할머니 뒤엔 큰 틀, 큰 할머니 뒤엔 작은 틀이 있는 지점 또한 유쾌하다.
두 인물의 표정, 분위기, 복장과 행동들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롭다. 여기에 본질이 다른 사물이 같은 차이를 보여주고 있는데 중심 피사체의 특징과 이야기성을 더 부각시킨다. 비교적 단순한 배경이 인물에 가는 시선을 방해하지 않는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보면 전경의 보도블럭이 만드는 리듬감, 펜스 넘어 얼핏 보이는 빌딩의 뜬금없음이 묘한 아이러니를 만든다. 또한 큰 틀에 담긴 모습이 펜스 넘어의 모습이 아닌, 인쇄물이라는 것도 알려주는 역할도 한다. 물론 작가가 모든 것을 염두 해서 철저한 리서치 끝에 찍은 사진이 아닐 것이다. 그의 경험과 체화된 기술이 순간적으로 만든 작품이다. 찰나의 판단 뒤에 셔터를 누르는 것은 다음이 없는 거리 사진의 본질에 부합하는 행동이다. 모든 요소가 합쳐져 훌륭한 이야기를 담은 이미지가 완성됐다.
또 다른 특징이라면 수평 수직을 맞추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진 잘 찍는 방법이라고 나온 여러 블로그 팁, 레슨 글에서 가장 먼저 다루는 것이 수평수직을 맞추는 것이다. 더치 앵글(카메라를 45도 기울여 직선을 대각선으로 담는 기술)을 쓰는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다.
'찍을 때 신경 써서 찍으세요. 아니면 몇 가지 프로그램을 통해 조절하세요. 훨씬 정돈되고 깔끔한 이미지를 얻을 수 있답니다'
그는 거리의 정경을 담는다. 기계처럼 딱딱 맞는 수직선과 수평선은 균형감과 질서를 제공하는 반면 현장감과 여유를 뺏어간다. 얼추 맞다 싶으면 셔터를 누르고, 후에 따로 수정을 하지 않는다. 수평 수직을 맞춰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몰라서 못 하는 것과 알고도 안 하는 것의 차이는 크다. 후자의 경우 본인의 철학이나 독자적 표현 방식의 방증이다.
흥미로운 점은 그의 사진에 흔들림이 보이지 않는단 것이다. 신나서 움직이는 강아지일 테지만, 빠른 셔터스피드를 통해 정적인 피사체로 박제된다. 덕분에 조작하지 않은 사진(Candid)임에도 연출된 것으로 보인다. 피사체를 아주 빠른 시간 속에 담아 성질을 바꿔 보여준다. 현실에 없는, 혹은 너무 빨리 지나가 알아챌 수 없는 상황을 남긴다. 기계를 통한 현실의 재생산은 세상을 다르게 보게 하며, 낯설게 만든다.
지극히 현실적인 장소에서 비현실이 탄생하는 셈이다. 발터 벤야민은 뒷골목과 사회가 숨기는 곳의 선별을 통해 통념을 깨는 것이 사진의 예술성이 극대화되는 지점이라고 했다. 나는 사회가 보이길 꺼리지 않는, 통념의 장소에서 만드는 낯섬이 한 단계 더 나아간 예술이라고 본다. (나와 벤야민을 나란히 배치했다고 해서 내가 뭔가 된 것은 아니다)
마지막으로 주목하고 싶은 지점은 그의 보정법에 있다. 러셀의 작품을 보면 색이 한결같이 자연스럽다. 현실의 색을 완벽히 동일하게 반영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최대한 비슷하게 맞추는 것은 가능하다. 그의 사진은 비슷하다. 기본 카메라 설정을 맞춘 정도거나, 최소한의 색상 보정을 하는 정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내용물과 포장지 비유가 이해를 도우리라. 그는 잘 만든 내용물을 무공해 포장지(한결같이 사용한)에 싸서 제품을 출고한다. 힘 빼서 더 멋진 사진이다. 철저히 컨텐츠에 집중하겠단 의지의 표명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의 거리 사진은 재밌다. 유머란 단어를 프레임으로 옮겨놓은 듯하다. 뜯어 보면 유쾌 이상의 어떤 것이 있다. 사진 감상 뒤에 웃음과 함께 생각할 거리란 사은품을 받아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