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욕망은 이런 순서로 자라난다. 입- 손 - 눈 - 두뇌. 오늘 팟캐스트에서 정박이 한 말이다. 내 온전한 주장이 아님을 밝힌다. 나는 지식 도둑이 아니다(얼마 전에 와이프는 내가 지식 도둑이라고, 껍데기뿐인 지식인 워너비라고 지적했다. 그녀 말에 반기를 들기 위해 출처를 밝힌다. 그녀 말마따나 어디서 들은 지식을 내 것 인양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온전히 이해하고 소화해도 초기 몇 번의 사용엔 출처를 남길 예정이다. 전과자가 되기 싫다. 이거 괄호에 들어가는 보충 설명인데 굉장히 길군. 잉여가 핵심을 전복한다. 이대로 글을 풀어가도 재밌을 것 같지만, 원래의 주제로 돌아가기로 하자) 설명이 필요하다. 처음엔 식욕이 우선한다. 인간은 먹어야 산다. 배고프면 먹을 것에 집착한다. 자연히 맛있는 음식, 많은 음식을 먹기 위해 몸을 움직인다.
자, 굶주림이 문제가 아니라면 어떨까?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아사는 쓸데없는 걱정이다.(여기서 또 덧붙일 게 있다. 최근에 읽은 수잔 손택의 타인의 고통에서 손택이 언급한 지점이기도 하다. 함부로 '우리'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얼마나 폭력적이고 위선적인지 알아야 한다. 우리란 뜻엔 범위 밖의 타인을 배제하는 인식이 숨겨져 있다. 모두를 포용하고 이해하기 위해 '우리'의 범위를 넓혀야 한다. 여기서 말한 우리의 범위는 매우 한정적이다. 선진국, 전쟁의 공포가 빗겨나간 몇몇 국가를 뜻한다. 배제당한 이들은 배재대 학생보다 많다) 굶어 죽을 위기를 극복하면 편하고자 하는 욕망이 샘솟는다. 세탁기를 사용하고, 믹서기를 사용하고, 전기밥솥을 사용하고, 인덕션과 가스레인지, 오븐을 사용한다. 부채 대신 선풍기나 에어컨을 사용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자신의 노동력을 세이브해서 다른 곳에 사용할 수 있다.
문단을 넘긴 이유는? 다음 단계의 욕망이 나올 차례이기 때문이다. 눈! 느낌표를 붙이면 강조 효과가 생긴다. 눈의 욕구는 보는 것이다. 텔레비전과 스마트폰, 잡지, 극장에서 미디어를 소비하며 눈의 욕구를 충족한다. 자 봐라. 먹어서 뭐 먹고자 하는 생각이 없고, 기기의 힘을 빌려 손을 사용하지 않아 시간이 남는다. 무엇을 할 텐가? 뭘 봐야지. 책이건 뭐건 보면 된다. 이미지와 텍스트의 흥미 유발에 정신없이 휘둘린다. 태양의 후예에서 송중기가 송혜교와 뽀뽀하고 달달한 장면 연출하는 것을 본다. 몽키 D 루피가 동료들을 모아 거대 해적단을 구성하고 사황의 자리에 오르는 과정을 본다. 비뢰도에서 비류연이 엄청난 강함을 숨기고 쪼다 연기하면서 간간히 졸라 쎈 힘을 드러내는 것을 읽는다. 모두 눈이 하는 작업이다. 이것이 눈의 욕망 단계다.
두뇌는 무엇인가? 간단하다. 우리의 지적 만족을 채우는 것이다. 여유가 있어야 지적 허영을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긴다. 하지만 두뇌의 단계에 모두가 가는 것은 아니다. 1 식욕의 단계에 머무는 이도 있고, 2 단계에 머무는 이도, 3단계에 머무는 이도 있다. 이는 욕망이 충족된다 해서 꼭 다음 단계로 진행하는 것이 아님을 나타낸다. 나는 4단계 욕망의 노예다. 어떻게 하면 많이 배우고 아는 척할 수 있는지 궁리한다. 읽어서 이해하고 쓴다. 글쓰기를 통해 어디에나 써먹을 수 있는 도구를 만들어낸다. 대장장이가 풀무질하는 것과 비슷하다. 땅땅! 망치를 통해 형태를 만들고 예리하기 날을 간다. 기가 막힌 문장과 표현의 틀을 입혀 졸라 똑똑한 누군가의 지식 무기가 탄생한다. 나의 지식의 창으로 허세의 강을 건너 허세의 산을 넘어 허세의 결정을 손에 쥔다.
내가 여기서 두뇌의 욕망을 달성하며 얻는 것이 허세라고 언급한 것은 겸손의 표현이다. 나는 굳이 내 입으로 겸손을 들먹이며 겸손하지 않음을 드러낸다. 프랑스의 언어학자 소쉬르는 언어가 인식을 앞선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나의 생각은 언어의 틀 위에서 온전하다. 두뇌의 즐거움은 언어의 틀을 견고히 짜는 일이다. 언어를 명징하게 직조해서 다양한 파생 개념을 불러와 세상을 더 잘 이해할 것이다.
이렇게 욕망의 메커니즘을 알아보고 나의 현재 위치를 짚어봤다. 위에 언급했지만, 이렇게 글로 재구성한 개념은 체화되어 언제든 꺼내 먹을 수 있다. 신청곡은 자이언티의 꺼내먹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