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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띤떵훈 Nov 23. 2019

헬조선 뜯어보기



즐겨듣는 팟캐스트 방송 '매불쇼'에서 특강을 했다. '특강'이라는 이름을 달고 방송을 내보내는 일은 이례적이다. 중간중간 말장난을 넣어 방송의 대분류가 코미디임을 상기시켰으나, 다른 회차 방송에 비해 웃음 비율이 낮았다. 빈 곳을 통찰이 채웠다.


스피커는 중앙대 독어 교수 김누리였다. 일전에 그는 '차이나는 클라스'라는 방송에서 강연을 펼쳤다. 이게 매불쇼 진행자 최욱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준 듯했다. 최욱은 그를 데려다 앉혀서 현재 한국이 왜 헬조선인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여기서 김 교수는 헬조선을 헬과 조선으로 나눠 설명했다. 설명은 길지 않았으나, 그의 방법론은 흥미로웠다. 도선 의식이 고취됐다. 김누리 교수에게 바통을 이어받아 나름의 분석을 해볼까 한다. 여기까지가 서문이다.


헬조선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1. 지옥같은 한국  2. 시대착오적인 한국  


합성어(신조어)의 의미를 분석하는 일은 누구나 할 법하다. 쉬워 보인다. 쉬운데 아무나 안(못) 한다. 조선이란 명명은 그저 한국의 유머러스한 표현이었다. 조선이란 단어가 현시점에 갖는 의미를 본다면, 한국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조선은 100년 전까지 존재했고, 제국의 침략에 의해 망한 국가다.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기득권의 힘을 유지하기 위해 폐쇄적으로 국가를 운영했다. 세계와 소통하지 못해서 고립된 나라, 그래서 파국을 맞이한 곳이다. 




21세기 조선이란 단어가 갖는 의미를 미루어 헬조선을 분석하면 이렇다. 


헬: 부조리, 혼란, 고통, 파괴, 상처, 고됨, 어려움을 내포한다. 여기서 물질적 지옥이 아닌 정서적 지옥을 나타냄을 주목해야 한다. 우리가 지옥불 위에서 녹아내리는 것은 아니다. 물자가 없어 굶어 죽는 것도 아니며, 매일 매질을 당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지옥이라 불리는 것은 우리의 관념을 학대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헬의 원인 1: SNS 

사람들은 SNS를 통해 준거집단의 행복 정도를 재단한다. 타인 일상의 가장 행복한 한 지점이 그들 삶의 디폴트 값으로 자리한다. 본인 일상의 행복 정도가 한참 미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일상의 감정은 행복도 1~10으로 볼 때 3~6(사람에 따라 2~7)을 오간다. 사람은 저마다 약간의 불만을 갖고 살기 때문에 행복의 평균치는 4 정도로 보인다. 나의 4와 타인의 7을 비교하면 나는 항상 불행하게 된다. 


헬의 원인 2: 영구적 불안

IMF 이전에는 종신 고용이란 개념이 있었다. 지금은 공무원을 제외한 거의 모든 직업에 '종신'이란 말이 들어갈 틈이 없다. 회사가 요구하는 정도의 퍼포먼스를 보이지 못하는 이는 '합법'적으로 해고를 당한다. 회사가 어려운 상황에서는 구조조정이 불가피하며 구조조정에서 해고는 '합법'적이다. 법이 가리키는 합당하고 이치에 맞는 지점이 신자유주의 세상에는 기업 쪽으로 많이 치우쳤다. 수면과 기초 의식주를 위해 쓰는 시간을 제외하고 절대적으로 많은 파이를 차지하는 것이 노동이다. 이 긴 노동의 시간을 거쳐 노동하는 장소로 자신을 규정하게 된다. 퇴직에 대한 불안은 인간의 가장 큰 존재태가 언제고 사라질 수 있다는 의미를 갖는다. 항상 자기 소멸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국가는 위험에 대처하는 재스쳐만 취하고, 실상은 위험의 근본적 원인인 자본 권력의 하수인 노릇을 한다. 


헬의 원인 3: 혐오

내 것을 갖기 어려운 시대다. 어렵게 갖게 된 내 것을 뺏기는 것은 헬이다. 헬로 가지 않기 위해 다른 사람을 지옥으로 보내는 것이 지금의 형국이다. 최근의 조국 딸 입시 비리 사태가 그 현상을 가장 잘 보여준다. 유일한 지옥 탈출 방법(실질적으로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농후한)으로 여겨지는 것이 공부다. 탈출을 위해 젊은이는 열심히 공부해서 소위 명문대에 진학한다. 명문대의 간판은 그들이 가진 가장 강력한 명패다. 팍팍한 세상에서 내가 녹록지 않은 사람임을 드러내기 위해 꼭 필요한 도구다. 이렇게 힘들게 얻은 권력(대학 타이틀은 피지배 계층이 가질 수 있는 몇 안 되는 권력이다)에 흠집이 생기는 것을 참을 수 없는 것이다. 내 노력의 대가는 정당하게 평가받아야 한다. 그것이 정의다. 그런데 그 정의를 추구하는 길에 혐오가 따른다. 



조선: 시대착오, 폐쇄, 계급사회, 불합리, 부조리, 전근대, 낡음의 상징이다. 구시대적 한국을 나타내는 단어다. 그렇다면 어떤 모습이 구시대적 유물로 여겨지는가.


조선의 원인

명목상 한국은 민주주의 국가, 신분제 폐지 국가다. 시대의 조류에 등 떠밀려 완전한 평등한 사회라 규정했다. 평등을 위한 준비가 안 됐으나 선진국이라면 마땅히 그리해야 한다는 당위성에 쫓긴다. 한국은 민주적이지 않다. 국민이 권력을 갖고 평등한 사회. 법치주의를 지향하는 사회. 그렇기에 돈의 많고 적음, 신분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공평하게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 사회가 민주주의가 그리는 사회다. 권력은 자본으로 기울고, 더 많은 이들에게 너그러운 곳이 한국이다. 자본은 유일하고, 유례 없이 강력한 코스모폴리타니즘이 됐다. 만약 21세기에 진리가 있다면, 그것은 자본이다. 자본이라는 아버지의 법 아래 계급이 정해진다. 선진국과 비교해 한국은 자본 계급의 존재를 숨기는 일이 서툴다.


자본으로 정해진 계급마다 정해진 행동 양식이 있다. 하층민이 귀족의 행태를 따라 하면 조롱의 대상이 된다. 하층민을 규정하는 것은 학벌, 월급, 자가의 유무, 외모, 인종, 종교 등이다. 시민들은 열심히 계급의 양식을 확대 재생산한다. 여러 카테고리 중 인종과 국적을 본다. 조선족 등의 이민자는 낮은 계급에 속한다. 평등과 정의의 범위는 그들을 배제한다. 평등과 사람답게 살 권리를 외치지만 그들에겐 해당 사항이 없다. 마치 노예와 여성에게 참정권을 주지 않던 지난 세기들을 연상시킨다. 사람들은 위 계급의 갑질을 지적하는 한편, 본인의 아래 계급으로 상정한 이주민들에게 더한 갑질을 한다. 난민은 말할 것도 없다. 되돌아온 신분제 사회다. 


노동과 노력은 수치화할 수 없는 추상 개념이다. 다소 변수가 있으나, 수치화를 위해 시간을 유닛으로 둔다. 자본의 계급 사회에서 이 시간의 가치는 공평하지 않다. 능력이 같아도 투자한 노동은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 자본가의 노동엔 각종 혜택이 따른다. 같은 시간 공부해도 있는 집 자식이 더 큰 성취를 보인다. 부모의 능력이 영향을 주고 부와 지식의 세습이 이뤄진다. 정보의 독점과, 자본과 인맥의 도움으로 목표에 이르는 지름길을 찾는다. 지름길은 더 적은 보폭 수를 요구한다. 몇몇 수험생은 지름길을 통하지 않는다.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 성취를 얻는다. 힘들게 얻은 성취의 아우라를 수호하기 위해 혐오가 발생한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메커니즘이다. 결국 노동 가치의 불평등은 또 다른 불평등을 낳는다. 신분을 넘을 수 없던 조선시대와 다름없다. 



이것이 내가 보는 헬조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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