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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띤떵훈 Nov 17. 2019

영어의 쓸모




인상적으로 읽은 국내 작가의 단편집이 있다. 작가 이름이 기억이 안 나지만, 책 제목은 기억난다. 에피소드의 제목이기도 한 '풍경의 쓸모'다. 기억 속 제목을 끌어와 수필 제목으로 사용한다.



영어는 쓸모 있다. 내 삶의 기반이 영어권 국가여서 더 그렇다. 그러나 한국에 산다 해도 쓸모는 바래지 않는다. 언제부턴가 인터넷 시대란 말이 촌스럽게 들린다. 열풍 너머엔 일상이 있다. 인터넷은 삶의 한 부분, 그것도 중요한 부분이 됐다. 현대는 서구 성공 신화의 세계다. 자연히 문화의 중심은(중심과 주변을 나누는 것이 오리엔탈리즘 식 사유다. 이 또한 서구 성공 신화의 장면이니 글의 주제와 부합한다) 영어로 향한다. 국제적 공신력을 인정 받으려면 논문도 영어, 계약서도 영어로 쓰여야 한다.



한창 재밌게 읽고 있는 책 '압축세계사'에 따르면, 고대 영어는 게르만어와 프랑스어 노르만어가 합쳐서 탄생했다. 여러 문화와의 교류와 시대의 세공에 힘입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천 년 넘는 시간 동안 산업 혁명과 제국주의 정복 전쟁 특화 문명의 언어로 자리했다. 여전히 영어 쓰는 이들이 세계를 휘두르고 있다.



인터넷 베이스 기술 공룡을 몇 가지 꼽는다. 애플, 구글, 유튜브, 페이스북, 아마존, 인스타그램 등. 전부 영미 국가 출신, 자세히 말하면 모두 미국발이다. 로컬화 정책을 펼쳐 한국어로도 상기 사이트의 컨텐츠를 즐길 수 있다. 하지만 번역이 안 되어 있는 컨텐츠가 대부분이고, 국제적 피드백을 이해하기 위해선 영어가 선행되어야 한다. 영어를 알면 즐길거리가 많아지고, 세상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알기 쉽다.



전날 와이프가 늦은 생일 파티를 했다. 나와 이미 5일 연속으로 고급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어제는 동성 친구들과 걸스 파티를 했다. 걸스가 될 수 없는 나는 홀로 잠을 청했다. 중간에 깼는데, 와이프의 안위가 걱정됐다. 안보불감증을 극복하기로 한다. 불상사에 대비해 정신을 현실 세계에 꺼내놓았다. 눈을 뜨고 있기 위해 시청각 자료는 도움 된다. 넷플릭스(이 중요한 사이트를 빠트렸군. 대표적 인터넷 공룡이다)에서 3부작 다큐멘터리를 시청했다. 간밤에 3시간 가량 투자해 마이크로소프트 전 회장 빌 게이츠 이야기를 눈과 가슴에 담았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였다. 넷플릭스는 자사 컨텐츠의 경우 세상에 꺼내놓기 전에 여러 언어로 번역한다. 콘텐츠의 우수성을 자랑하는 용도, 더 많은 사람에게 노출시키는 역할을 한다. 빌 게이츠 3부작엔 한국어 자막이 달렸다. 나는 굳이 영어 자막을 켰고, 그마저도 무시하고 시청했다. 영어를 구사하게 된 덕분에 한국어 자막으론 이해할 수 없는 영역까지 생각을 펼쳤다.(못 알아 들어 놓친 부분도 많다. 굳이 말하는 이유는 정의감) 영어와 일본어를 어느 정도 하게 되면서 깨달은 점은, 세상에 완벽한 번역은 없다는 사실이다. 그 언어의 토대 위에서만 이해할 수 있는 서브 텍스트와 뉘앙스가 있다.



동네 카페에 랩탑을 들고 나왔다. 영어를 (어느 정도) 구사하기에 외출이 부담 없다. 주문의 공포도 없고, 직원들이 건네는 인사와 질문에 기분 좋게 응대할 수 있다. 주문을 받은 직원이 내 프라이탁 가방이 참 예쁘다고 '핑', 그렇게 말해줘서 기쁘다고 '퐁'. 긍정적 상호작용은 하루를 윤택하게 만든다. 앉을 자리를 알려준다. 나는 자판을 튕기며 직원이 가져다주는 잘 볶고 잘 뽑은 커피를 받는다.



기준을 나로 둔다. 나보다 영어를 잘하는 사람은 수두룩하다. 못하는 사람은 더 많다. 언제부터 영어로 생활이 가능했나? 비교적 최근이다. 6년 전, 호주 땅을 처음 밟았을 때 과장 보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헬로와 하우 알 유였다. 문법 공부는 했다. 알고 있는 것을 밖으로 꺼내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여러 필터를 거쳐야 말이 나온다. 1. 문법 틀리면 어쩌지 필터 2. 상황에 안 맞는 표현이면 어쩌지 필터 3. 버벅대면 어쩌지 필터 4. 교양 없이 보이면 어쩌지 필터 등등. 학창시절엔 영어를 도달할 수 없는 영역으로 상정했다. 20대 중반이 되어 공부를 시작했고, 언어 학습에 재미를 느꼈다. 순탄한 길이었다.




놀이가 주는 유익함은 나를 기쁘게 한다. 영어를 쓴다는 이유로 투자한 노동에 비해 과분한 돈을 벌고, 다양한 문화를 접하고, 즐길거리를 얻는다. 아차, 잘난척할 수 있다는 어마어마한 이점을 빼놓아선 안 된다. 쓸모를 논하는 것은 고상한 잘난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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