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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띤떵훈 Jan 20. 2020

조건 반사

카페 방문과 글쓰기







 카페에 들어온다. 아이스 롱블랙을 주문한다. 커피를 받고 앉는다. 랩탑을 켠다. 블로그 글쓰기 버튼을 누른다. 흰 화면 앞에서 몇 초간 멀뚱거린다. 카페에서 내 모습이다. 파블로프의 실험 개들이 떠오른다. 땡땡땡 종이 울리면 입에 침이 고이고 헐떡인다. 종소리에 음식 제공의 의미를 부여했다. 마찬가지다. 카페 방문은 중성 자극이다. 즉시 글쓰기 환경을 조성한다. 두 가지 이질적 자극을 반복하면 중성 자극만으로 무조건 반응을 이끌어낸다. 글을 쓰겠단 생각에 앞서 블로그 창을 연다. 조건 자극과 조건 반응의 고리가 만들어졌다.



왜 습관적으로 쓰는가? 몇 가지 이유를 꼽는다. 1. 쉽고 2. 재밌고 3. 유익하고 4. 멋있어서. 굳이 이걸 하나하나 설명해야 하나 싶지만, 그 굳이가 글쓰기의 원천이다. 일단 글쓰기는 쉽다. 반론의 여지가 있다. 주관적 감상이라는 점을 밝히고, 근거를 덧붙인다. 리포트나 돈 받고 쓰는 글이나, 지식 자랑해야 하는 글이라면 쉽지 않다. 준비 운동도 필요하고, 자료 조사와 가장 논리적이고 효과적으로 주제를 드러낼 틀을 만들어야 한다. 블로그에 쓰는 대부분의 글은 해당 사항 없다. 한 마디로 잘 쓸 필요가 없다. 그래서 쉽다. 



재밌다. 글쓰기에 비견될 지속적이며 고상한 쾌락, 그러니까 밀이 주장한 질적 쾌락을 주는 행위는 독서 하나뿐이다. 에피쿠로스 학파의 주장대로라면 독서와 글쓰기는 내가 추구해야 할 최상의 가치다. 나는 에피쿠로스 학파가 아니다. 딱히 안 할 이유가 없어 활동을 이어간다. 쓰는 그 당시도 즐겁고, 이전에 쓴 글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이 또한 이견이 갈릴 수 있다. 예술적 글쓰기에 심취한 이들- 시인, 작가, 문예비평가-은 글쓰기에 거대한 가치를 부여한다. 특권층, 그러니까 지식인의 전유물이란 아우라를 씌워 접근을 차단한다. 일반 독자나 경험이 적은 이들은 그들의 서브텍스트에 경도되어 쓸데없이 어려운 글을 쓰려 한다. 아우라(잘 써야 한다)가 주는 강박이 재미를 반감 시킨다. 나는 인생 전반에서 아우라를 해체했다. 습관적 글쓰기는 말한다. '못 써도 괜찮아. 누구도 네 글에 큰 기대하지 않아' 부담이 없어지면 놀이로 거듭난다. 놀이에서 승리 조건은 몇 가지다. 1. 모호한 개념을 명쾌하게 텍스트로 전환하기. 2. 독자 웃기기 3. 생각 정리하기 4. 배운 거 써먹기 등. 



유익함은 말해 입 아프다. 글 쓰면 똑똑해진다. 쓰는 과정에서 기존에 갖고 있던 지식이 공고해진다. 여러 안건에 본인이 어떤 의견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있으며, 내 생각에 모순이 없는지 발견할 수 있고, 생각을 글쓰기 양식에 맞추며 논리력을 키운다. 글쓰기, 말하기는 정보 전달의 목적을 갖는다. 효과적으로 정보 전달을 하기 위해 일정한 틀을 따라야 한다. 기본 전제는 주장을 밝히면 논증하기. 논증 과정에서 두뇌가 명석해진다. 정리하면, 모순을 줄이고, 논리력을 키우고, 지식을 단단히 한다. 



멋. 글쓰기는 멋진 활동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주변인도 동의한다. 돈 없고, 이렇다 할 기술 없고, 적당히 잘생긴 내가(차마 못생겼다고는 못 하겠다. 그건 거짓말이다) 결혼할 수 있었던 이유다. 멜번 여신(내 기준)을 와이프로 둘 수 있던 계기는 글쓰기 취미를 드러내고 글을 보여준 것이다(쓴 글을 지인들에게 잘 안 보여준다. 와이프한테 보여준 건 꼬시려는 이유였던 것 같다) 개중에 제일 정상적이고 지적으로 보이는 글을 골라 보여줬다. 와이프는 문화재 전문가, 동생은 의사, 어머니는 박사, 아버지는 대단한 사람(몇 가지 이유로 밝힐 수 없다)이다. 우리 아버지는 고물상, 어머니는 안 계시고, 나는 글 쓰는 취미 가진 일개 미남일 뿐이다. 집안 경제력과 명예의 차이를 건너 결혼의 골 망에 슛을 날릴 수 있었던 건 글쓰기의 서포트 덕이다. (그렇다고 와이프가 사피오섹슈얼 Sapiosexual은 아니다. 잘생긴 남자 좋아하는데 내가 잘생긴 게 더 컸을 수도 있다. 하지만 글쓰기의 멋에 대해 논하는 문단이니 괄호 안에 넣어 생략한다)



위 이유가 글을 쓰게 돕는다. 쓸 게 있든 없든 관계없다. 카페에 오면 일단 글쓰기 창 켠다. 그 후에 음악을 듣고 유튜브를 보고, 유머 글을 본다. 이것저것 하다 쓰고 싶은 내용이 생기면 흰 화면으로 돌아온다. 종소리 들은 개가 침 흘리는 것처럼 나는 랩탑 열면 손가락이 간질거린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조건반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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