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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띤떵훈 Jan 19. 2020

통수



 일하다 보면 크고 작은 해프닝을 겪는다. 나도 우리 직원도 해프닝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오늘은 직원 이야기니 범위를 한정한다(내가 문제없는 인간이란 뜻이 아니다). '직원발' 작은 해프닝엔 지각, 청소용품 분실 등이 있고, 큰 해프닝엔 고객 기물 파손, 결근이 있다. 해프닝의 범주를 넘는 일도 있다. 갑작스러운 퇴사 통보는 단순한 해프닝으로 치부하기 어렵다. 그만두기 2주 전에 노티스 주는 것이 관행이다. 그래야 후임자 찾고 인수인계한다. 그 말미를 뺐는다면 나는 고통받는다. 스트레스를 차치하고도 문제가 남는다. 돈과 노동을 써야 하고, 청소 퀄리티가 떨어지는 탓에 리스크가 커진다. 감정 듬뿍 섞어 이런 상황을 통수라 표현한다.

 


웬 통수 이야기? 갑작스러운 퇴사 통보를 받았다. 반년 넘게 일하던 직원이 한국 행을 결심하며 새로운 인물을 찾았다. 그는 대체자를 구할 때까지 가게를 떠날 수 없다며 3주의 정리할 시간을 희망했다. 책임감이 마음에 들어 요청을 수락했다. 그와 일하기 전에 2주의 공백이 생겼다. 공백은 단기 아르바이트생이 채울 계획이었다. 첫째 주를 무사히 보냈다. 한 주 남았다. 오늘 아르바이트 생으로부터 문자를 받았다. 다리를 다쳐서 다음 주 일을 못 하겠습니다.



거짓이면 의도적 통수고 진실이라면 정상참작 가능한 통수다. 이건 감정의 문제다. 현실에서 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어느 쪽이든 같이 일할 수 없단 뜻이기 때문이다. 어떤 말도 상황을 되돌릴 수 없다.



이 상황에서 내가 취할 수 있는 합리적 행동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혼자 일하면 절반 가까운 스케줄을 취소해야 한다. 고객과 불편한 대화를 하고, 나중에 미뤄진 스케줄을 무리해서 소화해야 한다. 말할 것도 없이 다음 주 스케줄을 평소처럼 소화하는 게 최선이다. 방법이 있다. 어떻게? 경험자를 찾는 것이다. 먼지털이와 청소기, 맙은 비교적으로 기술이 덜 필요하다. 경험자라면 금세 적응할 수 있다.



다행히 단기 아르바이트생 구한다는 글에 호응이 있다. 경험자도 있다. 이번 주는 어찌어찌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급한 불 꺼서 한숨 돌렸다. 엎질러진 물에 성내 봤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는데, 엎질러진 물이 야속한 건 어쩔 수 없다.  



상대 입장에서 생각한다. 만약 다리 부상이 거짓이라면, 무엇이 그를 거짓말하게 만들었을까? 1. 더 나은 환경의 직장을 발견 2. 청소일의 업무 강도 3. 사장의 태도. 1,2에서 내가 바꿀 수 있는 부분은 한정적이다. 3이면 바꿀 수 있다. 그간 같이 일했던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기에 3일 가능성이 적다고 자기변호한다. 내가 말하는 '좋은 관계'는 나의 착각의 산물이 아니었을까? 데카르트 빙의해서 의심을 이어가 본다. 좋은 보스, 혹은 좋은 동료일까? 란 질문을 이어가도 의심할 수 없는 명석판명한 지식은 안 나온다.



가끔 와이프는 내 행동이 무례하다 지적한다. 나는 그럴 의도 없었음을 적극 피력한다. 이런 경우엔 피해자의 감정이 판단의 척도가 되므로, 미안하다는 말을 덧붙인다. 또 친밀함의 표현으로 한 행동이 그녀에겐 불쾌함으로 다가가기도 한다. 와이프는 나와 동등한 관계, 혹은 위의 관계에 위치한다. 나로 인해 생긴 모든 불쾌를 망설임 없이 지적한다.



직원들은 그렇지 않다. 나는 그들에게 우리가 평등한 관계임을 강조한다. 상하가 아닌 좌우 관계를 지향한다고 덧붙인다. 내가 돈 주는 사람이란 단순한 사실이 우리의 완벽한 평등을 방해한다. 직원들은 나의 잘못을 지적하거나 혹은 개선 요청을 하지 않았다. 내가 잘해서 일 수도 있지만, 말하기 껄끄러워 피한 것일 수도 있다. 퇴사자가 잠수를 탔으므로 퇴사 이유가 1인지 2인지 3인지( 대안 발견, 업무 강도, 사장의 태도) 알 수 없다. 다만 3의 가능성을 고려한다. 3이었다면 이번 통보는 통수가 아니라 내가 응당 받아야 할 처벌이다.



제목을 통수라 적으면서 껄끄러운 감정이 들었다. 지울 수 없는 퇴사자를 향한 원망을 드러내려는 의도였다. 그것은 모든 책임을 퇴사자에게 떠넘기는 것이며 자기반성의 부재를 드러내는 말이다. 한편으로 제목을 바꾸지 않은 것은 나의 편협함을 폭로하기 위험이었다. 혹시 아나? 그가 어딘가에서 인과응보란 주제로 썰을 풀고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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