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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띤떵훈 Feb 09. 2020

기호로 만든 호감


괜찮은 사람을 만났다. 여기서 괜찮다는 말은 가치중립적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상대가 괜찮다고 말하는가. 그와 대화 몇 마디 나누지 않았다. 생각이  이어지니 기호 때문이란 것을 깨달았다. 어떤 기호가 평가를 바꿔놓는 것인가?



여기서 기호는 내 온전한 경험에 더해지는 상징이다. 나의 경험만으로 상대를 본다면 괜찮다 말하기 어렵다. 경험 자체가 괜찮고 나쁘고를 구분하기에 턱없이 짧기 때문이다. 기호를 들여다보자. 



첫 대면은 친구의 소개다. 친구는 어떤 작가의 북 콘서트에 참여했다. 마침 나는 가까운 거리에 있었고, 글 쓰는 사람과 이야기를 즐긴다. 친구가 와도 괜찮다고 말했다. 늦게나마 콘서트 장소에 도착했다. 나를 그곳으로 인도한 친구는 나보다 나이가 몇 살인가 많고(지면에선 친구고 호칭은 누나다), 출판 작가이며, 이민자로 잘 정착해 현지에서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고, 친한 친구의 여자친구이며, 호탕한 성격의 소유자다. 공통점이 몇 개인가 있고, 대화가 잘 통했다. 그래서 그는 내게 '괜찮은 사람' 범주에 속한다. 괜찮은 사람이 누군가를 괜찮은 사람이라 소개한다면 나로서는 소개인을 괜찮은 사람으로 인식할 가능성이 높다. 판단하는 노동을 상대에게 양도했단 뜻이다. 저 사람이 검증한 이유가 있겠지-하고 말을 나누기도 전에 괜찮은 사람으로 받아들인다. 첫 단추가 껴졌다. 



호감의 큰 이유에 몇 가지 기호가 더해졌다. 단어로 나열하면, 1. 사진 2. 멜번대 3. 바이오 매디슨 4. 금테 안경이다. 2번 이유는 상대적으로 이유를 찾기 쉽다. 나머지 3개는 아니다. 설명이 필요하다. 



사람은 공통분모가 있는 사람에게 호감을 느낀다. 나는 사진 찍고 보는 것을 좋아한다. 거기에 좋은 이란 애매한 수식이 괄호에 들어간다. 좋은 사진은 기술적으로 괜찮거나 의미가 담겨있는 사진이다. 의미의 존재 여부는 수용자의 인식에 따라 달라진다. 결국 내게 어떤 의미를 주는 사진이 괜찮은 사진이다. 친구는 그가 사진을 찍는 사람이라 소개했다. 본인 책 출간할 때 프로필 사진을 찍어준 작가님이라고 덧붙였다. 친구의 권유에 떠밀려 인스타그램 아이디를 주고받았다. 상대가 좋은 사진을 찍는 사람인지 검사했다. 스마트폰이 보급된 이후로 많은 이들의 취미가 사진 찍기가 됐다. 내게 본인 셀카 찍고 음식 사진 찍는 것은 취미가 아니다. 누구나 다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저는 아침, 점심, 저녁 먹는 취미가 있습니다-라는 말과 같다. 커메라 기종을 묻자 상대는 보는 것만으로 어깨를 아프게하는 무거운 사진기를 꺼내 보였다. SNS로 사진도 보여줬다. 내게 의미를 주는 사진은 없었지만 기술적으로 괜찮은 사진은 있었다. 사진을 취미라 말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기호가 정상 작동했다. 



2번과 3번은 함께 이야기한다. 나는 멜버른 시티에 소위 비자 학교라 불리는 명문 UIT에서 마케팅과 리더십이라는 터무니없는 전공을 했다. 어드벤스 디플로마 학위로 한국으로 치면 전문대와 학사 사이에 존재한다. 멜번대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단 말이다. 와이프 뒤치다꺼리하는 과정에서 캠퍼스 땅을 밟았다. 똘똘한 와이프와 처남과 장인어른(앞에 있는 '똘똘한'이란 수식은 앞 두 사람에게만 포함한다. 장인어른께 실례를 범할 수 없지)이 수학한 곳이다. 모두가 그렇단 소리는 안 하겠지만, 그 학교 출신은 대체로 쓸만했다. 나는 명문 UIT 출신으로 학벌주의를 타파하고자 하나, 경향성까지 부정할 순 없다. 어쩔 수 없이 멜번대란 기호는 긍정적으로 작용한다. 



3의 바이오 메디슨은 전공 이름이다. 2번 항목과 연결된다. 같은 전공을 공부한 이가 주위에 있다. 어제 결혼한 우리 처남인데, 의사다. 그러니까 바이오 메디슨은 의사 되고자 하는 사람이 전공하는 학문이다. 주위 말을 주워들은 결과, 들어가기 어렵고 나가기도 어렵단 사실을 알게 됐다. 열심히 살지 않으면 공부를 끝낼 수 없다. 자연스레 3번은 열심히 사는 사람의 기호로 존재한다. 공통점과 더불어 반대되는 성향도 호감의 원인이 된다. 나는 게으르다. 인생에 부지런함이 결여됐다. 의사란 직업은 내가 갖고 있지 않은 것의 결정이다. 



내겐 멋쟁이라면 가져야 하는 아이템 목록이 있다. 반스 체크 슬립온, 베이프 악어 패턴, 파타고니아 티셔츠, 카시오 시계, 프라이탁 가방, 슈프림 노스페이스 협업 아이템, 아페세 셔츠, 칼하트 노동자 재킷, 고르뎅 소재, 투명 프레임 안경, 올드스쿨 타투, 리바이스 바지, 킵컵, 래미 펜 등. 자본주의 사회에선 제품이 인간을 대변한다. 멋에는 여러 선택지 중에 답안이 존재한다. 여기서 옷을 잘 입는 사람은 말은 패턴을 학습해서 그 기호를 소비하는 사람이다. 기호는 변하므로 멋쟁이로 존재하는 시간은 한정적이다. 그러나 그 순간에 멋이 살아있음을 부정할 순 없다. 금테 안경은 요즘 기호 중 하나다. 상대는 작가와의 대화 시간에 어디선가 꺼낸 금테 안경을 착용했다. 자본주의 멋의 대변인을 잘 고른 셈이다. 또한 지적인 대화에는 안경을 껴야 한다는 기호를 소비한다. 치킨에는 맥주, 생일엔 케잌, 태국 여행엔 호랑이연고 등. 그럴 필요가 없는데 응당 소비해야 할 우리의 기호다. 북 콘서트에서 무언갈 읽을 필요가 없었다. 그럼에도 멋쟁이의 기호를 소비하는 태도. 모든 것은 이미지로. 이미지가 전복한 사회에 훌륭한 시민의 자세를 보여줬다. 지적인 자리엔 안경을 써야 한다. 무언갈 읽을 필요가 없지만 일단 쓴다. 왜? 그래야 자연스러우니까. 멋쟁이의 기호를 적극적으로 소비하는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쓰고 보니 딱히 4번 항목이 조롱이 되어버렸다. 원래 의도로 돌아온다. 멋쟁이의 기호를 공유하는 내게 멋스럽게 비쳤다. 



기호의 효율성 덕분에 판단에 위력을 갖는다. 사람 인상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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