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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띤떵훈 Feb 10. 2020

가장 가치 없는 소설

소설과 수필




"나는 세상에서 가장 가치 없는 소설을 쓸 생각이야."

"여보, 자랑스러워요."



식사를 멈추고 포부를 밝히자 와이프가 반응했다. 나는 건치 몇 개를 보이고 다시 국그릇에 있는 미역국을 한 술 떴다. 미역이 주렁주렁 숟가락에 매달려 따라온다. 혀를 살짝 내밀어 미역을 마중 나간다. 호도로로고후룩 소리를 내며 청소기처럼 미역을 빨아드린다. 미역은 춤을 추며 입안으로 들어온다. 얼굴 가득 국물을 튀긴다. 와이프가 엄지손가락을 들고 말한다.



"히치하이킹할까요?"

"따봉은 히치하이킹과 같은 기표를 갖고 있지. 브라질에선 좋은 오렌지를 보고 따봉을 말하지."

"여보, 자랑스러워요."



가치 없는 소설을 쓰는 것은 쉽다. 마치 얼굴에 미역국 국물을 튀기는 것처럼. 하지만 가장 가치 없는 소설을 쓰는 것은 어렵다. 마치 어머니의 얼굴에 미역국 국물 튀기는 것처럼. 나는 후쿠오카에 산다. 어머니는 5년 전 돌아가셨다.



"어려운 일이 될 거야. 어머님이 보고 싶군."

"여보, 어머님은 머지않아 볼 수 있어요."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거지."



와이프는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씰룩거리다 말을 삼킨다. 인간이란 개체가 갖는 시간을 인식하는 능력, 혹은 무능의 증표가 껍질을 벗어날 때 갖게 될 새로운 패러다임을 말하려는 것일까? 오늘은 와이프의 생일이다. 후쿠오카산 미역은 일품이다. 전날 퇴근길에 사온 미역으로 미역국을 끓였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쇠고기 다시다와 아지노모토를 한 스푼씩 넣어 한국식으로 조리했다.



"후쿠오카산 미역은 훌륭하군."

"여보가 끓여줘서 더 맛있는 것 같아요."

"당신 생일에 미역국을 끓여줄 수 있어서 우레시이."

"아나타, 스바라시이데스."



식사를 마치고 빈 그릇을 싱크대로 옮긴다. 와이프는 감사의 표시로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미역국을 다 먹었다. 흐뭇하게 빈 그릇을 바라본다. 국그릇에 있는 기름이 주방 형광등 불빛을 반사한다. 어쩐지 불쾌한 기분이다. 수세미에 세제를 덜어 설거지를 시작한다. 국그릇을 먼저 닦는다. 세제 거품이 기름때를 제거한다. 옆에서 지켜보던 와이프가 어깨를 툭툭 친다.



"여보, 지금 이야기가 소설은 아니겠죠? 그렇다면 당신의 꿈은 물거품이 되어버려요. 이 내용으론 가장 가치 없는 소설이 될 수 없어요"



설거지를 하던 손이 멈춘다. 그녀가 정확하다. 나는 소설을 쓰고 있다. 그리고 이미 어느 정도 가치가 생겼다. 이 세상 최고의 무가치함은 0이다. 나는 0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나 상대는 이미 0이 아님을 깨닫는다. 나는 남편이자 이 세계의 창조주. 피조물이 나의 능력을 간파하고 먼저 판단한다.



"흠, 당신 말이 맞아. 하지만 그건 월권이야. 나는 작가. 또한 당신의 남편. 내가 할 일이 있고, 당신이 할 일이 있어. 나의 기준이 당신이 되면 안 돼."

"여보, 맞는 말이에요. 하지만 나는 작가(당신)의 피조물이에요. 내가 하는 말은 당신의 말이기도 하죠."

"잠깐잠깐. 당신은 그렇게 말하면 안 돼. 이야기의 경계가 무너져내려. 붕괴는 나의 글솜씨를 비난하고 말 거야. 우리 존재는 타이핑이 멈추면 사라지지만 작가의 인생은 이어진다고."

"여보, 당신은 작가와 분리되어 나왔군요. 당신은 작가, 또한 나의 남편이라고 말했어요. 기억 안 나요?"

"오오, 우린 이제 같은 존재가 아니야. 작가의 의도는 나와 본인의 관계를 끊어내는 것이 되고 말았어."

"그렇다면 우리가 진정한 부부로 자리할 수 있겠어요. 작가는 부인이 있죠. 그 부인은 내가 아니고."

"그래 작가의 부인은 호주 이민 2세대로 현재 멜버른에서 일하고 있지. 우리는 후쿠오카에서 미역국 먹고 있고."

"여보, 온전한 분리했어요!"

"명징한 분리!"

"분!"

"리!"



작가: 나의 자비는 이 부부를 축복하노라. 나의 한 문장은 이 세계의 절대 언어. 마지막 한 문장은 거부할 수 없는 진실.

부부는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수필



정신분석학은 낡은 학문으로 치부된다. 정신과 의사들은 약물 요법과 대화를 통해 환자를 치료한다. 프로이트와 라캉의 말은 뿌리로써 가치 있는 것이며, 인문학의 한 분파로 빛을 낸다. 프로이트 학문의 의의는 무의식의 발견이다. 우리 무의식이 터져나오는 상황은 꿈, 농담, 말실수. 여기에 한 가지 추가하고 싶다. 즉흥 소설쓰기.



터무니없는 소설, 그러니까 의식의 흐름을 따라 이야기를 만들었다. 왜? 재밌으니까. 처음엔 내 무의식을 분석할 의도는 없었다. 터무니 없는 소리가 주는 만족감, 그 하나를 보고 글을 진행했다. 쓰고 보니 글에 내 세계가 투영됐다. 나만이 읽을 수 있는 현실을 터무니없는 곳에서 보게 됐다. 쓰다 겁이 났다. 인간이란 개체는 자신의 생각이 간파당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도 숨기고픈 지점이 있다.



나는 의도적으로 터무니의 세계(소설의 세계)를 붕괴시키고 급히 글을 마무리지었다. 글 속 인물과 다르다 주장할 수록 접점이 늘어가는 아이러니. 비현실성에서 현실을 보는 마술적 사실주의라고 하면 거창하다. 헛소리에서 터져나오는 진실이다. 나도 무얼 보고 내 모습이라 이야기하는지 구체화할 수 없다. 아니 안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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