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독해

by 띤떵훈

이미지 독해



발터 벤야민은 틀렸다. 그는 미래의 문맹은 이미지를 읽지 못하는 이라고 했다. 20년 전에 21세기가 됐다. 사람들은 여전히 이미지를 읽지 못한다. 누구도 그들을 문맹이라 하지 않는다. 여기에 사진가 리차드 빌링햄의 말을 빌려온다.




"I was shocked when I realized that people can't read photographs... people weren't seeing any beauty underneath, none of the composition, non of the pattern."




한 문장으로 직역하면 "사람들은 사진을 읽을 수 없다." 동의한다. 사진 좀 찍는다는 사진 동호회 회원도 마찬가지다. SLR 클럽, 페이스북의 사진 페이지 등. 구도나 상징 사용, 숨은 의미를 볼 수 있는 사람이 현저히 적다. 그러다 보니 훌륭한 작품이 묻힌다. 패턴을 보고 패턴입니다. 사인을 보고 사인입니다. 피사체를 보고 피사체입니다. 말은 할 수 있지만 왜 그렇게 쓰였는지, 어떤 기능을 하는지 아는 사람은 적다.




몇 가지 문제 원인을 규명한다.




첫 번째, 공부 부족이다. 사진을 제대로 읽으려면 사진 역사나 개념, 구도, 시대상, 인문학적 소양 등이 요구된다. 그 지식들이 사진을 보는데 거름망이 되어 이미지 속 내용을 건져올린다. 영화나 문학도 마찬가지다. 순문학, 예술영화라 불리는 작품은 독자에게 고난을 준다. 다양한 ism을 이야기에 녹인다. 깊은 맛을 내기 위해 철학가들의 사상을 한 스푼 넣는다. 음식 속 MSG처럼 이야기의 고리를 단단히 잇는다. 사진도 다르지 않다.




두 번째, 좋은 예의 부재다. 훌륭한 사진의 기준이 잡혀야 훌륭함을 안다. 훌륭함의 기준이 어긋났다. 나는 절대 진리의 미를 논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 사진이 공유하는 아름다움을 기준으로 한다. 저세상 보정(페이스오프) 하는 소다 캠, 스노우캠에는 예쁘고 잘생긴 사람이 있을 뿐이다. 작가들의 사진집에 좋은 사진이 있다. 혹은 그곳에서 평범함의 집합이 좋음으로 변모한다. 덩어리로 볼 때 오는 감동(서브 텍스트)는 있다. 시퀀스(사진의 배열)와 작가노트(글)이 사진을 훌륭함으로 이끈다.




좋은 사진의 예로 곧잘 등장하는 것은 SF 스타일 저세상 에디팅을 거친 이미지다. 비싼 카메라에서만 낼 수 있는 얕은 심도의 아웃포커싱이 좋음의 상징이 됐다. 핸드폰 카메라로 낼 수 없는 효과는 경제적 진입장벽을 만드는데 그 벽은 좋음의 기준이 되지 못한다. 되려 누구나 찍을 수 있지만 못 찍는(말장난 같지만 말장난 아닌) 이미지야말로 좋은 이미지다. 직관적으로 강렬한 피사체, 해석할 여지를 주지 않는 이미지는 좋은 이미지와 동의가 아니다. 독해 가능한 지점이 넓으면 즐겁다. 영화도 문학도 사진도.




세 번째, 좋은 선생님의 부재다. 위의 이유와 연결된다. 좋은 사진이 무엇인지 지도해 줄 사람이 없다. 폼의 아름다움을 알려주지만 컨텐츠 독해와 컨텐츠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는 곳이 (내가 아는 한)적다. 한국에서 프로 작가라 불리는 사람이 낸 교재나 유튜브 영상을 몇 번인가 봤다. 영어로 만들어진 매그넘 작가나 프로 저널리스트의 인터뷰, 사진 비평집과 비교했을 때 깊이가 다르다. 특히나 한국 교재는 동어 반복이 산재했다. 또한 국내 제작 책과 영상에 좋은 사진의 예로 나온 이미지는 나빴다.




네 번째, 인식 차이다. 스냅, 다큐멘터리, 스트릿포토, 캔디드 사진(이하 거리사진으로 통칭)이라 불리는 사진은 실외의 예측 불가능한 상황을 담는 장르다. 경험과 감, 체화한 아름다움의 기준을 순간적으로 발산해야 한다. 카르티에 브레송의 말대로 결정적 순간은 한 번이며 지나가면 돌아오지 않는다. 결정적 순간을 결정적으로 연출할 여러 요소를 프레임에 순간적으로 넣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공부와 함께 실전이 병행되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한국의 실외 촬영엔 제약이 많다. 여러 사건과 논란의 시간을 거치며 거리 사진의 평판은 바닥을 쳤다. 경험을 쌓기에 어려운 구조다.




여러모로 벤야민은 매니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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