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10분 인문학'이란 책에서 질문을 발췌했다.
질문 50가지가 있다. 답하기에 앞서 통일성과 논리적 완결성을 위해 몇 가지 대답의 절차를 만들까 한다.
1. 대답을 먼저 한다.
2. 논리적 근거를 제시한다.
3. 중립이거나 안건에 대한 이해가 없어 답하기 어려운 경우라면 만들어서라도 답을 한다.
PART 1 인간에 대하여
첫 번째 인문학 │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 사는 것일까?
우리라는 말이 가리키는 것이 인류라면 답은 '아니다'. 삶의 목적은 행복만이 아니다. 저마다 다르다. 내가 그들의 삶의 목적을 제시할 필요는 없다. 본인 의사로 사는 삶을 존중한다. 덧붙여 칸트처럼 행복이 아닌 정언명령(당위)에 따르는 삶이 더 고귀하게 느껴진다. 인간이라고 꼭 행복해질 필요 없다. 주체성이 행복보다 우위다.
두 번째 인문학 │ 꿈은 필요할까?
필요하다. 일단 모든 당위에 반대함을 앞서 말한다. 누구에게도 강요나 충고할 마음이 없다. 저마다 자신의 이정표가 있고, 내가 이정표를 제시할 어떠한 권리가 없다. 그러니 앞으로 나올 모든 질문에서 기준은 '나'다. 내 경우에 꿈은 필요하다. 철저히 효율적인 측면이다. 꿈이 있을 때 '좌절'이라는 단점이 따르지만, '활력'과 '의미'란 장점이 따른다. 나는 무의미를 싫어한다. 그래서 장점은 단점을 압도한다. 즐겁고, 생산적인 삶에 꿈은 도움이 된다.
세 번째 인문학 │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가능할까?
시작으로서의 신인가 아니면 관리자로서의 신인가? 분류에 따라 대답이 다르다. 시작의 우연함 혹은 동기를 생각하면 신이란 존재를 긍정하게 된다. 다만 지금 이 세계에서 관리자로서의 신은 필요하지 않다. 스타트라인을 설정한 것으로 그의 역할은 충분하다. 그 이후는 인간에게 맡겨도 된다.
인간의 상상하는 능력과 진보하려는 능력은 신의 존재 유무와 관계없이 세상을 발전시키고, 평등하게 만들 것이다. 만일 그 능력까지 신이 준 거니 신의 부재를 논할 때 능력을 회수한다고 한다면 대답은 또 달라진다. 현재 인간의 능력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는 경우엔 신이 필요 없다. 반면 인간의 상상력이나 지능을 주는 원천이 신이라면, 그는 필요하다.
네 번째 인문학 │ 사랑이 의무일 수 있을까?
그렇다. 내게 인간이 갖는 최고의 의무는 존엄하게 살 의무다. 존엄을 가능케하는 것은 사랑이다. 다만 사랑이 지칭하는 존재가 인간이 아닐 수 있다는 가정이 필요하다. 나를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고, 상상을 사랑하고, 나의 성취를 사랑하지 않으면 존엄할 수 없다. 사랑은 존엄의 절대적인 조건이다. 사랑은 삶의 의미로 쓰일 수 있다.
다섯 번째 인문학 │ 나는 육체를 갖고 있는 것일까, 육체인 것일까?
나는 육체를 갖고 있다. 육체는 껍데기다. 나는 곧 정신이다. 세포는 지속적으로 교체된다. 마치 수백 년을 지나온 자동차가 부품이 하나 둘 바뀌면서 결국엔 자동차엔 원본에 하나도 없는 것과 같다. 그러나 우리는 그 자동차를 수백 년의 역사를 지닌 자동차로 인식한다. 그와 마찬가지다. 우리의 인식 속에서 그 자동차는 그 자동차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인식의 토대 위에 내가 내가 된다. 칸트의 말대로 우리는 물자체의 세계를 인식할 수 없는 종이다. 육체의 틀에서만 감각한다. 다른 종으로 다른 인식의 틀을 갖게 된다면 우리의 육체는 더 이상 우리가 알던 육체가 아니며 효용도 전혀 다를 수 있다. 오로지 정신만이 남을 것이다. 새로운 감각체계를 깨닫는데 약간의 시행착오가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결국에 나는 정신이며 육체는 스쳐가는 곳일 뿐이다. 다만 육체에 의해 많은 것이 재단되는 상황인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순 없다.
여섯 번째 인문학 │ 죽음은 인간에게서 일체의 존재 의미를 박탈해 갈까?
아니다.
전제 1 - 죽음(육체의 효용이 다함)에 정신 역시 소멸한다.
전제 2 - 죽으면 나를 둘러싼 세계가 아무 의미 없다.
위 2가지 전제가 성립되어야 '그렇다'란 답이 나온다. 우선 1번째 질문에 대한 답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맞는다고 답한다면 우리는 알지 못하는 것에 답을 내린 게 되는 셈이다. 그것은 비과학적이다. 모르는데 섣불리 답을 내리는 행위다. 그렇기 때문에 '모른다'가 답이 되어야 한다.
두 번째 전제의 경우 나를 둘러싼 세계와 인물들을 배제한다. 나는 나와 관계한 모든 존재(생명이든 비생명이든)가 어떤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내가 죽는다고 그들이 가진 나란 존재에 대한 인식과 흔적이 지워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남겨진 것에 영향을 끼치며 의미도 남는다. 그러니 답은 '아니다'다.
일곱 번째 인문학 │ 인간은 선하다고 생각하는 것만을 추구할까?
아니다. 선과 좋음의 개념을 혼용하기에 생기는 오류다. 선과 좋음은 구분된다. 많은 인간(나를 포함)이 좋음을 추구하며 산다. 우리가 선한가? 아니다. 좋음은 항상 선한 게 아니다.
여덟 번째 인문학 │ 나에 대한 앎은 지식의 일종일까?
그렇다. 일단 지식의 정의를 어떻게 내리는지 알아야 한다. 배우거나 실천하며 알게 된 이해나 인식이 지식이다. 배우고 실천하는 대상에 나를 놓을 수 있으냐 없느냐를 묻는 질문이다. 당연히 나를 놓을 수 있다. 반대로 놓지 못할 이유가 없다. 우리는 매일매일 자신에 이해를 더해 존재를 재정의한다. 지식의 사전적 정의에 부합하는 행위다.
아홉 번째 인문학 │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있다. 가능성에 대해 묻는 질문이니 그 가능성이 0%가 아니라 답하는 것이다. 물론 나는 죽음이 무섭다. 그러나 학습과 사회적 환경에 따라 죽음이 기꺼울 수 있다. 공포를 극복하고 죽어나간 실제 사례를 찾으면 0이 아닌 것이 증명된다. 역사상 명예나 종교, 신념 등을 이유로 죽음의 공포를 극복한 많은 이들이 있다. 그들의 존재로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음이 증명됐다.
열 번째 인문학 │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정확한 답이 가능할까?
불가능하다. 불가능하다고 답한 근거는 '정확한'이란 수식이다. 여기서 나는 수식 '정확한'을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상태, 즉 100%로 받아들였다. 인식에 100%는 없다. 그리고 인식을 100%로 표현할 수 있는 언어(도구)도 없다. 또한 인간은 가변적 존재다. 대상과, 관찰자와 수단이라는 세 가지 기본 요소 모두가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다. 불확실성 사이에서 확실함이 나올 수 없다.
PART 2 생각에 대하여
열한 번째 인문학 │ 새로운 생각은 가능할까?
가능하다. 불가능이라 답하면 미래의 가능성을 없애는 것이 된다. 환경이 생각을 만드는데 일조한다. 사람들은 새로운 환경에 마주한다. 새로운 생각이 태어날 수밖에 없다.
열두 번째 인문학 │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는 것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 일단 말하고픈 욕구는 그 실체에 대한 인식을 전제한다. 이 경우엔 두 가지 문제로 표현의 어려움에 봉착한다. 1. 언어가 부족해 표현을 못 하는 경우 2. 개념 자체가 모호한 경우. 말하는 것을 알고자 하는 노력이다. 말하며 부족한 조각을 찾게 된다. 혹은 무엇이 부족한지 깨닫고 모자란 조각을 책이나 누군가의 입을 통해 얻는다. 인간은 무에서 무수한 추상 개념을 창조했다. 모르는 것을 말하며 구체화시켰기에 가능한 일이다.
열세 번째 인문학 │ 객관적인 역사는 가능할까?
불가능하다. 역사는 사람이 남기는 것이다. 개인적 의견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완벽한 중립은 불가능하다. 언어의 한계, 인간의 한계 때문이다. 그럼 기계가 기록을 한다면 어떨까? 그래도 완벽한 객관은 불가능하다. 기계가 선별하는 자료는 특정 메카니즘을 거친 것들이다. 배제된 것이 생길 수 있고, 배제된 것은 인간의 상상과 주관에서 되살아난다. 요컨대 기계의 선별에서 일차로 객관성이 사라지고, 수용하는 사람들에 의해 두 번째로 객관이 사라진다. 객관적 역사는 불가능하다.
열네 번째 인문학 │ 역사는 인간에게 오는 것일까, 인간에 의해 오는 것일까?
문제를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인간의 인지능력은 시간과 공간 위에서만 유한하다. 우리가 받아들이는 역사는 우리기에 성립한다. 같은 사건도 다른 종에겐 다른 사건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우리가 역사라 부르는 것들은 인간에 의해 온 것이다. 그러나 종을 뛰어넘는 역사는 우리가 알지 못한다.
열다섯 번째 인문학 │ 감각을 믿을 수 있을까?
이게 완벽한 신뢰가 가능한지 묻는 거라면, 답은 - 없다. 감각은 오류 가능성이 많다. 같은 재료 넣어서 만든 음식도 어떨 땐 맛있고 어떨 땐 맛없다. 같은 자극에도 우리 몸은 다르게 반응한다.
열여섯 번째 인문학 │ 인류가 한 가지 언어만 말하는 것은 바람직할까?
아니다. 하나님이 바벨탑 만든 인류에게 괘씸죄로 언어를 혼탁(분열)하게 만들었단다. 지금 관점에서 보면 그건 벌이 아니라 축복이다. 특정 언어에서만 이해되는, 혹은 이해가 쉬워지는 수학, 과학, 철학 개념들이 있다. 저마다의 장기를 살려 다양한 문화를 꽃피웠다. 언어가 다양화 된 덕분에 우리는 다채로운 문화를 즐길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죽어가는 언어를 지켜야 한다.
열일곱 번째 인문학 │ 언어는 상호 소통을 위한 수단일 뿐일까?
아니다. 의사소통 수단 이외에도 역할은 있다. 놀이, 자아실현, 주위에 일어나는 사건과 존재하는 사물을 이해하는 목적으로도 쓰일 수 있다. 한가지로 규정짓는 것은 언어의 역할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열여덟 번째 인문학 │ 개인의 의식은 그 개인이 속한 사회를 반영하는 것일까?
그렇다. 환경이 나를 만든다. 나는 환경의 반영이다. 특정 사회에서 구성원들이 보이는 공통점, 국가의 특성, 지역의 특성이라 불리는 것들이 그 근거다. 뭐가 됐든 배우면 사용한다. 사회의 가르침이 자연히 체화되고 나를 구성한다.
열아홉 번째 인문학 │ 진리는 절대적인 것일까, 상대적인 것일까?
상대적이다. 절대 진리란 존재할 수 없다. 역사에서 진리라 믿었던 것들이 붕괴됐다. 신, 수학과 과학 이론, 다양한 원소설 등, 모두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아는 만큼 보인다. 덜 알았던 시기의 진리는 더 알게됐을 때의 진리와 다르다. 인간은 앎을 추구한다. 더 많은 앎이 태어날 것이고, 새로운 진리가 나타나고 사라질 것이다.
스무 번째 인문학 │ 상상과 현실은 모순될까?
상황에 따라 다르다. 일치하는 경우도 있고, 모순된 경우도 있다. 상상이 포괄하는 범위는 무한하다. 현실과 교집합도 있을 수밖에 없다. 악몽을 꿨을 때 현실에서 액땜했다는 사람이 있는 반면, 예지몽이라고 취급하는 사람도 있다. 사람은 꿈과 상상에서 일상을 반복할 수 있고,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니 항상 모순된다고는 할 수 없다.
PART 3 윤리에 대하여
스물한 번째 인문학 │ ‘옳은 일’과 ‘그른 일’은 단지 관습적인 것에 불과할까?
아니다. 맞다고 하려면 반대 사례가 없어야 한다. 그러나 문화와 관습을 떠나 인류 공통의 선이 있다. 살인하지 말 것, 근친상간하지 말 것, 도둑질하지 말 것 등. 관습을 넘어 존재한다.
스물두 번째 인문학 │ 행복해지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할까?
아니다. 행복보다 자유가 우선이다. 노력의 사용처는 본인 자율에 맡겨야 한다.
스물세 번째 인문학 │ 폭력은 어떤 상황에도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일까?
나를 지키기 위한 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다.
스물네 번째 인문학 │ 정의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불의를 경험해야 할까?
아니다. 문학, 역사의 필요가 여기 있다. 경험하지 않아도 불의를 알 수 있다. 사람을 죽여봐야 살인이 나쁜 걸 아는 게 아니다. 직접 경험하지 않아도 안다.
스물다섯 번째 인문학 │ 욕망은 무한한 것일까?
그렇다. 인간은 끊임없이 가지지 못한 것을 욕망한다. 욕망하기에 진보가 생겼고 지금의 인류가 있다. 욕망하는 능력이 없었다면 지금 인류는 없다.
스물여섯 번째 인문학 │ 선과 악은 함께 존재할 수 있을까?
그렇다. 선악의 기준이 저마다 다르고, 같은 사람의 생각 안에서도 기준이 변한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반대로 그때는 틀리고 지금은 맞다. 그 기준 아래에서 인간은 선악의 합본이다.
스물일곱 번째 인문학 │ 무엇을 ‘비인간적인 행위’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누군가의 인간성을 침해할 때.
스물여덟 번째 인문학 │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것에도 가치가 존재할까?
물론이다. 우리 삶은 순간의 합이다. 무에서 유가 나오지 않는다. 작은 가치가 합쳐져 큰 가지가 되는 것이다.
스물아홉 번째 인문학 │ 진리가 마음을 불편하게 할 때 위안을 주는 환상을 좇아도 좋을까?
그렇다. 누구에게나 망상할 자유는 필요하다. 그게 삶을 지속시키는 원동력이 될 수 있따.
서른 번째 인문학 │ 모든 살아 있는 존재에 대한 존중은 도덕적 의무일까?
그렇다. 다만 존중의 정도가 있다. 모기나 파리같은 생명체에게 내가 보이는 존중은 깔끔하게 빠르게 죽여주는 것이다.
PART 4 정치와 권리에 대하여
서른한 번째 인문학 │ 자유는 주어지는 것일까, 싸워서 획득해야 하는 것일까?
환경에 따라 다르다. 자연에 살 때 자유는 주어지는 것이었다. 군집을 일어 사회가 구성되었을 때 자유는 획득해야 하는 것이 됐다. 사회는 질서와 계급을 요구한다. 무리 짓는 인류의 본능이다. 사회 안에서 자유는 투쟁의 결과다.
서른두 번째 인문학 │ 법에 복종하지 않는 행동도 이성적인 행동일 수 있을까?
물론이다. 법과 이성이 항상 평행하지 않는다. 여기서 이성은 본인의 정의와 의무로 썼다. 법은 변한다. 시대를 초월한 보편 정의를 항상 제공하지 않는다. 의무와 법이 동일하지 않을 경우, 본인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 더욱 어려운 일이다. 법과 의무의 대결에서 의무의 손을 들어주는 일은 주체성의 토대 위에 존재할 수 있다. 수동성을 버리고 비판적으로 사고해야만 법에 맞설 논리가 생긴다. 이는 철저히 이성적 행동이다. 나의 준칙이 보편을 향하도록 하는 노력은 이성 없이 불가능하다.
서른세 번째 인문학 │ 인간은 누군가에 의해 통치될 필요가 있을까?
필요는 사전적으로 반드시 요구된다는 의미다. 통치가 반드시 요구되는가? 그렇다. 다만 계급 사회의 통치와 다른 양상이다. 통치 받는 분야가 다양해진다. A라는 필드에선 A가 통치하고, B 필드에선 B가 통치한다. 여기서 인간의 우열은 존재하지 않는다. 효율적 역할 분배로써 통치다.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구조로 본다면 통치는 필요치 않다. 평등 위에 통치만 긍정할 수 있다.
서른네 번째 인문학 │ 노동은 욕구 충족 수단에 불과할까?
아니다. 욕구 충족 수단은 돈이다. 위 질문을 다르게 말하면 '노동의 이유는 돈뿐인가?'이다. 아니다. 돈 이외의 목적이 있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사회에 기여한다는 자각을 준다. 아들러 같은 심리학자는 삶의 목적을 공헌으로 놓는다. 노동(사회 참여)은 일종의 공헌이다. 바꿔 말하면 노동이 삶의 목적이 될 수 있다. 본인이 육체적으로, 지적으로 쓸모가 있는 존재란 인정을 받는다. 또한 몸을 움직일 근거도 된다. 인간관계의 장이 되기도 하며, 사람들과 어울리는 방법도 배운다. 돈 이외의 효용이 있다.
서른다섯 번째 인문학 │ 시장에 대한 정부의 규제는 정당할까?
타당하다. 지금 시대엔 적극적 개입이 필요하다. 방임이 항상 올바른 결과를 내지 않는다. 시장의 자정작용을 믿기엔 사회가 너무 발전했다. 정부의 규제 없이 시장은 소수의 권력자나 사업가의 손에 놀아난다. 수많은 희생자가 나온다. 고도로 발전된 사회에서 다치는 사람을 줄이기 위해,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정부의 개입은 필수불가결이다.
서른여섯 번째 인문학 │ 특정 문화의 가치를 보편적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
우선 보편이란 단어가 정도의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염두 해야 한다. 완전한 보편은 없다. 판단이야 언제든 할 수 있다. 여기서 판단이 올바른지에 대해 논의해야 한다. 그런 질문으로 보인다. 각 문화는 각자의 맥락에서 봐야 한다. 문화 밖에 있는 사람이 이렇다 저렇다 평가하기에 무리가 있다.
서른일곱 번째 인문학 │ 여론이 정권을 이끌 수 있을까?
가능성에 묻는다면, 그렇다. 포퓰리즘이 존재하는가 아닌가 질문으로 바꿔 볼 수 있다. 포퓰리즘은 실재한다. 다만 여론이 이끄는 정권이 항상 올바른 길로 가는가? 질문한다면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서른여덟 번째 인문학 │ 정치에 관심이 없어도 도덕적으로 행동할 수 있을까?
그렇다. 다만 범위와 정도의 차이가 있다. 내게만 적용되는 도덕, 사적 의미의 도덕 좁은 의미의 도덕만 논하자면 정치와 관심 없을 수 있다. 다만 넓은 의미의 도덕, 남을 위하는, 타인의 행복을 신경 쓰는 도덕이라면 정치와 떨어질 수 없다. 요컨대, 좁은 의미의 도덕은 정치와 별개로 존재할 수 있다. 큰 의미의 도덕은 정치와 떨어질 수 없다.
서른아홉 번째 인문학 │ 정의의 요구와 자유의 요구는 구별될 수 있을까?
의무와 자유는 구별된다. 다만 일치된다면 더할 나위 없다. 내가 응당 해야 할 것들을 하려는 노력을 자유로 보는 단계다. 기꺼이 불편와 불이익을 감당하고 의무를 실행하는 것은 고차원의 자유다. 정의와 자유는 구별된다. 다만 높은 수준에서 일치한다.
마흔 번째 인문학 │ 전쟁 없는 세상은 가능할까?
가능하다. 다만 얼마나 유지될지 장담할 수 없다.
PART 5 과학과 예술에 대하여
마흔한 번째 인문학 │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만을 진리로 받아들여야 할까?
그렇다. 진리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 최소한 논리에 오류는 없어야 한다. 근거도 필요하다. 과학은 주장과 근거를 요구한다. 진리가 되기 위해 최소 형식적 오류는 없어야 한다.
마흔두 번째 인문학 │ 오류는 진리를 발견하는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할까?
반면교사의 역할을 한다. 정답으로 가는 길을 좁히는 역할이다.
마흔세 번째 인문학 │ 무언가를 잘 알기 위해서는 그것을 관찰하는 것만으로 충분할까?
아니다. 보는 것만으로 부족하다. 생각하고 이해하고 실행해야 한다. 본인의 지식을 적극적으로 사용해 활용해야 한다. 활용하고 행동하면서 배우는 것도 있다. 심화 이해를 위해선 변주도 필요하다.
마흔네 번째 인문학 │ 기술이 인간 조건을 바꿀 수 있을까?
그렇다. 사전적으로 인간의 조건은 이렇다. 생각할 것, 언어가 있을 것, 도구를 사용할 것, 무리를 이룰 것. 기술의 발달과 학문의 발달로 위 조건은 인간의 전유물이 아님이 밝혀진다. 원숭이도 도구를 쓴다. 무리를 이룬다. 그들도 생각하고, (정도의 차이가 있으나) 언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가 아는 인간이 아니다. 그들을 인간으로 편입할 순 없다.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바뀌는 건 조건이다.
마흔다섯 번째 인문학 │ 이론의 가치는 실제 효용 가치로 가늠되는 것일까?
그렇다. 쓸모가 없으면 관심이 덜하다. 평가도 마찬가지다.
마흔여섯 번째 인문학 │ 우리는 왜 아름다움에 이끌릴까?
아름다운 것을 보면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그런 메카니즘의 근거를 묻는다면 잘 몰라서 답할 수 없다.
마흔일곱 번째 인문학 │ 예술 작품은 반드시 아름다워야 할까?
아니다. 미의 다원화 시대다. 그때의 아름다움이 지금의 아름다움이 아닐 수 있다. 또한 예술의 목적은 틀을 깨는 것, 사고를 넓히는 것, 관념을 탈피하는 것에 있다. 새로운 것을 창조해야 하는 의무도 있다. 고정된 아름다움을 답습하는 것은 예술의 이런 본질과 어긋난다.
마흔여덟 번째 인문학 │ 예술 작품의 복제는 그 작품에 해를 끼치는 일일까?
경우에 따라 그렇다. 우리는 기술 복제 시대에 살고 있다. 복제는 원본성이 갖는 아우라를 해칠 수 있다. 또한 창작자의 수입을 줄일 가능성도 있다. 반면 복제의 효용도 무시할 수 없다.
여기서 복제는 두 가지 의미로 쓰일 수 있다. 복제품이 당연한 기술에서의 분배. 예를 들면 영화, 드라마 등. 한 장소에서만 볼 수 있는 게 아닌 다양한 매체를 통해 언제 어디서든 볼 수 있다. 다른 복제로 아류가 있다. 서태지가 음악을 만들고 흥행한다. 그 영광을 얻기 위해 카피하는 후발주자들이 두 번째 복제다. 첫 번째 의미의 복제는 본질적으로 복제를 요구하는 것이므로 해를 끼치지 않는다. 두 번째 복제는 원작자의 노력을 침해하고 다양성을 해친다는 측면에서 문제가 된다. 다만 원작자를 돋보이게 하는 역할 또한 한다.
마흔아홉 번째 인문학 │ 일자리가 줄어드는 것을 걱정해야 할까?
그렇다. 노동의 유용함을 위에서 논했다. 그 유용성을 잃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일자리가 줄면 그만큼 소수가 다수를 지탱해야 하는 사회 구조로 나아간다. 받치는 이들의 부담이 늘고, 받들어지는 이들의 불편함을 초래한다.
쉰 번째 인문학 │ 문화는 우리를 더 인간답게 만들까?
그렇다. 여기서 인간다움을 먼저 정의할 필요가 있다. 다양한 정의가 있지만 여기선 니체의 의미를 따르기로 한다. 가장 주체적이다. 그에게 인간다움이란 운명애(아모르파티)를 갖는 것이다. 삶을 긍정하고 진취적으로 내가 내 삶의 의미를 개척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의미를 찾을 수 있는 도구가 필요하다. 문화가 그 도구를 제공한다. 문화가 잘못된 도구를 제공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잘못을 판단할 근거조차 문화(사회에서 얻는 것)에서 얻기 때문에 문화는 필수적이다.
에필로그 │ 철학이 생각을 바꿀 수 있을까?
그렇다. 철학을 알면, 철학을 하면 생각이 바뀐다. 실례가 있다. 나다. 철학을 알고 내 생각은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