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세의 나 보아라. 나는 70세, 그러니까 2057년 2월 1일의 너다. 네가 지금껏 산만큼 더 살면 내 나이 된다. 막연하겠지만 금방이다.
나는 지난해 크리스마스 기점으로 완전히 일에서 손을 뗐다. 오피셜리 생산능력 제로다. 욕 안 먹는 백수, 정년 퇴직자다. 일 안 하고 산다니, 부럽지?
문제가 있어 일을 관둔 건 아니다. 관리 잘해 건강하다. 배에 왕 자도 있다(사실 없다). 와이프가 더 늦기 전에 배낭여행 가자고 재촉하는 바람에 은퇴했다. 올해 5월에 떠나 2059년 5월에 돌아오는 2년짜리 여행이다. 아무래도 일본이랑 한국에 오래 머물 것 같다. 나이 먹어도 거기가 제일 재밌다. 가기 전에 피부관리 받아 최적의 얼굴 상태를 만들어놓을 생각이다. 그거 받으면 액면가 30이다. 너보다 젊어보인다. PT도 주 2회 받고 있다. 무게 너무 많이 치지는 않는다. 무릎에 3D 프린터로 만든 관절 있는데 무리하면 아프다. 쓰잘데기 없는 소리 하기 좋아하는 특성은 70 돼도 이어진다. 요컨대 여행 기대된다고.
너(나)니까 말하는데, 나 여유롭다. 덕분이다. 고맙다. 돈은 여러모로 쓸모가 많다. 진즉에 물리 화폐는 없어졌다. 전 세계가 통합된 가상화폐 사용한다. 진통을 좀 겪었지만 지금은 잘 정착했다. 환율 계산 잘 해서 제값을 받았다. 구체적 액수 말하는 걸 좋아하지? 폼 안 나니까 함구하겠다. 그냥 살만하단 것만 알아둬라. 가장 궁금해하는 내용일 것같아 먼저 말한다.
일단 네가 매달 지출의 일부를 투자에 사용했고, 장기투자로 리스크 관리도 잘했기 때문에 큰 문제 없이 꾸준히 자산을 불릴 수 있었다. 너도 노력하고 있겠지만, 돌아보면 더 아껴 더 투자할걸 후회한다. 후회는 끝이 없다. 중간중간 불로소득 나올만한 곳을 마련한 덕분에 고정 수입도 꽤 많다. 월세며, 이자 수입이며, 배당금이며 사업체며, 알아서 잘 굴러간다. 덕분에 인생의 결정적 순간에 돈이 아닌 너의 만족도를 기준에 두고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었다. 돈이 너를 돈에서 해방시켜준 셈이다.
궁금한 게 한 둘이 아닐 테지. 요즘엔 외국어 배울 필요가 없다. 실시간 번역이 정확하고 빠르다 보니 세계 어디를 가도 불편하지 않다. 그래도 프로그램에 의지할 필요가 없다. 대학에서, 회사에서 신물 나게 영어를 사용해서 이젠 부족함 없다. 독서 모임도 한국어, 영어 모임 두 군데 다니고 있다. 네 주변인 이야기는 함구하마. 몇몇은 풍요롭게 잘 살고 있고, 몇몇은 비참하게 살고 있다. 노후 대비 안 하면 존엄하게 살기 어렵다. 중간중간 친구한테 돈 빌려줄 텐데, 받을 생각하지 마라. 그냥 준다고 생각해라. 덕분에 어느 정도 재기에 성공한다. 그들의 행복에 일조한 걸로 만족한다.
책 읽는 시간은 항상 값지다. 책 사는데 돈 아끼지 말고, 책 좋아하는 사람들 주변에 많이 둬라. 배울 점이 많다. 꾸준히 읽고 정리해라. 너무 교조적으로 가는 것 같지? 너(나)한테 말하는 거 아니면 언제 이렇게 굴어보니. 책뿐만 아니고, 배우는데 쓰는 시간과 돈을 아까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되려 주식보다 더 큰 투자처다. 큰 변화가 올 때 너를 지켜주는 건 책과 책 읽은 주위 사람들이다. 항상 생각을 말랑말랑하게 유지해라. 딱딱하면 부러진다. 자만하지 않고 살아라. 사실 그렇게 살아왔다. 너는 자만을 모르지. 정말 대단해.
투자처는 따로 말하지 않겠다. 치트키 쓰면 인생 재미 없어진다. 허튼짓거리만 안 하면 문제 없이 살 거다. 다시 말하지만 많이 읽고 대화해라. 해봤자 뭐가 달라지겠어라고 생각하겠지만 많이 달라진다. 해야 바뀐다. 다 경험에서 나온 말이니 새겨 들어라. 요컨대 이런 충고 없이도 잘 컸다. 너가 나니까 이런 말은 무의미하다. 인간은 깜깜할 때 뭐든 잡고 싶으니까. 대충 잡을만한 거 준 셈 쳐라. 내가 될까?라는 의심이 들 때, 답은 항상 '된다'였다. 의심하지 말고 해봐라.
와 글자 몇 개 적었다고 배고프네. 슬슬 와이프랑 점심 먹고 전시회 가야 겠다. 계속 그렇게 살아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