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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띤떵훈 Apr 22. 2021

어차피 불평등한 사회라면



누군가 한창 일하고 있을 목요일 오전, 카페에 자리 잡았다. 막 코스톨라니 투자 총서 2권 '투자는 심리게임이다'의 마지막 장을 넘겼다. 한번 자리 잡으면 해 떨어질 때까지 카페에 머문. 출출하면 카페 근처에서 가벼운 점심을 먹는다(오늘은 살몬롤스시와 새우롤스시를 먹었다). 와이프가 퇴근하면 만나, 멜버른 시티 맛집에서 저녁을 먹는다. 정형화된 휴일 패턴이다. 카페에선 책 읽고, 기업 분석하고, 글을 쓴다. 요컨대 인생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한다. 차가운 아이스커피를 받아들고 자리에 앉을 때 생산성은 최대로 오른다. '인생을 보람차게 보내는가?'란 질문 앞에서 '그런 것 같은데요'라고 대답할 근거를 마련한다.




주어진 것만 소화하면 정체를 벗어날 수 없다. 새로운 걸 읽고, 듣고, 하고 배운 걸 밖으로 끄집어내야 발전한다. 그러기 위해선 크게 2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시간과 공간. 카페,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스타벅스(장기간 체류해도 눈치 보이지 않는 유일한 곳)가 일련의 행동을 가능케한다. 청소가 다른 한 축이다. 적게 일하고 많이 쉰다. 그러면서도 생활에 필요한 비용을 제공한다.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카페와 청소가 주는 혜택 덕에 인간다움을 재고할 수 있다.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 노동의 보상이 다르다. 애덤 스미스에 따르면 직업을 갖기 위해 준비한 시간과 노력을 감안해야 한다. 변호사나 의사는 되기도 어렵고 비용도 많이 든다. 그들의 높은 수임은 납득할 만하다. 나는 청소부다. 청소부가 되기 위해 별도의 커리큘럼이 있지 않다. 누구나 원하면 될 수 있다. 자기 사업을 하기 위해선 소정의 자본금이 필요하다. 청소부(혹은 청소사업자)가 되기 위해 약간의 저축이 필요했다. 쓴 돈 계산해도 수입은 과분하다. 노동이 행해지는 나라의 특성이다. 노동에 후한 가치 매기는 나라다. 문제는 내가 이 나라에 살기 위해 특별히 한 노력이 없다는 데 있다. 또한 이 나라에 태어난 사람들은 더더욱 그러하다. 누구는 돈 많이 주는 나라에 태어나고, 누구는 돈 조금 주는 나라에 태어난다. 뺑뺑이다. 랜덤이라고.




내가 누리는 대부분(혹은 전부)은 내 능력에 기인한 게 아니다. 근본으로 올라가면 말이다. 사지 멀쩡히 태어난 것도, 한국에 태어난 것도, 모든 행동을 유발하는 임계 상태 전체가 내 능력과 무관하다. 사회는 고도로 분업화됐다. 어느 하나 타인의 도움 없이는 할 수 없다. 역사와 문명이 거대한 시스템을 만든다. 나는 잘 차려진 문명의 밥상에 숟가락을 든다. 밥 먹기 위해 농사짓지 않아도 되고, 고기반찬 먹기 위해 사냥하지 않아도 되고, 나물 먹기 위해 채집하지 않아도 되고, 소고기 다시다 먹기 위해 말리고 갈고 포장하지 않아도 된다. 모든 게 완성된 채(혹은 마지막 트리거 하나 남긴 채)로 존재한다.




모든 인류가 평생 하는 노동의 시간과 강도, 여가 시간의 퀄리티를 기준으로 수평라인을 만든다. 아주 열악한 0부터 아주 꿀 빠는 10까지의 수치 사이에 사람을 올려야 한다. 나는 9와 10 사이 어딘가에 존재한다. 추후에 자본이 스스로 굴러가는 시스템이 공고해지면 노동은 0에 수렴할 것이다. 그럼 소숫점 없이 깔끔한 10 위에 서게 된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약간의 변화에도 놓쳤을 하루하루다. 무수한 우연이 겹쳐 달달한 매일을 선물했다. 그덕에 코스톨라니처럼 돈과 지식에 마음 놓고 투자할 수 있다. 내 능력이 특별히 발휘된 곳이 없는데 말이다. 정말 불공평하지 않나?





한량처럼 카페에서 시간을 보낼 때면 자연히 뇌는 위의 쓴 내용을 재생한다. 거지발싸개같은 내게 과분한 환경이다. 재생이 끝나면 감사함이 툭 떨어진다. 이를테면 인디 모바일 게임할 때 광고 보면 게임 재화 주는 것처럼. 




머리와 몸이 따로 논다. 머리론 사회주의자다. 다른 표현으론 '입 마르크스'가 있다. 모두 인간답게 사는 공평한(능력과 필요에 따른 차등도 인정하는) 사회를 꿈꾼다. 어느 하나 배제되지 않고, 저마다의 소리를 내고 존중받는 사회 말이다. 직업과 취향과 자본에 의한 계급이 철폐된 곳에선 숨듣명 따윈 없다. 대중적 취향을 숨길 필요가 없다. 더는 노인빈곤층 다큐를 보지 않아도 된다. 현실성을 첨부해 북유럽식, 동유럽식 사민당을 지지한다. 다만 그정도다. 사민당 후보가 타오면 한 표 행사하겠지만, 나는 창당하거나 선거 유세를 거들 인물은 아니다. 나서서 뭘 하진 않는다. 내 정의가 그정도다.




이미 짜인 판에 손해 보지 않으려 한다. 불로소득은 대단하다. 생산수단 소유가 주는 이득은 노동의 그것보다 훨씬 크다. 불공평의 극치다. 빈국의 노동자는 주에 60시간 일하고 월급 30만 원 받고, 누구는 클릭 한 번으로 몇 억을 번다. 돈의 저울 위에서 누군가의 몇 천 년의 쉼 없는 노동과 찰나의 클릭이 같은 무게를 지닌다는 사실은 직관적으로 부당하다. 클릭한 사람은 클릭 후 남은 시간을 지식과 유흥으로 채운다. 여가에서 나온 지식과 인맥으로 추가적인 부를 (아주 쉽게) 얻는다. 누군가의 클릭 한 번을 따르기 위해 인생 전체를 노동으로 채우는 일은 서럽다. 고를 수밖에 없다면 클릭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육체는 평등의 세계가 아닌 다소 기울어지고 안락한 세계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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