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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띤떵훈 Jul 27. 2021

잘생긴 남자의 삶





 잘생긴 남자의 삶은 어떨까? 그 질문의 답은 내가 들고 있다. 왜냐면 내가 바로 잘생긴 남자이기 때문이다. 예견되는 지적은 모든 잘생긴 남자가 같은 삶의 궤적을 그리는 게 아니란 사실이다. 나는 다양한 표본 중 하나로 존재할까 한다. 대표성 없는 예시는 몇 개가 중첩되어야 효력이 생긴다. 그러니 다양한 쓸모를 지닌 일부 사례인 셈이다.





잘생긴 남성의 인생을 다루기 전에 몇 가지 맹점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내가 지닌 잘생김의 기준과 타인의 기준이 일치되지 않을 때다. 유발 하라리의 표현을 빌리자면, 잘생김이란 상상의 질서를 공유하지 않는 인간들 사이에 나는 잘생김의 표본으로 존재할 수 없다. 보통 국가, 인종이 그 기준점이 된다. 여전히 백인 중심(파워, 인구 분포 측면 둘 다) 사회인 호주는 서양의 미의 기준을 따른다. 여기선 쌍꺼풀과 터질듯한 근육 없는 동양 비마초남은 핸섬 스탠다드 미달이다. 그들과 보낸 시간 속에서 나는 표본으로서의 자격을 잃는단 사실을 일러둔다.





다른 맹점은 나 자신에 있다. 외모가 변했다. 의사선생님의 도움이 컸다. 그 이전에 나는 감히 잘생김을 논할 수 없었다. 군대를 전역하고 20대 중반에 치과를 찾았다. 의사는 치아 7개를 발치했다. 송곳니 뒤 4개, 사랑니 3개. 공간 부족으로 삐뚤빼뚤한 치열을 다듬었다. 튀어나온 입도 들어갔다. 그러니 잘생긴 남자의 삶의 시작은 교정기를 뺀 25부터 시작된다. 나의 잘생김 역사는 34년이 아닌 9년이란 것을 밝힌다.






외모 변화 사례 2로는 30살 전후에 했던 눈매교정술이 있다. 자연스러운 만남을 추구하듯 자연스러운 성형을 추구했다. 라인을 너무 얇게 잡았다. 수술 직후 몇 개월간 쌍꺼풀 진 눈을 가질 수 있었다. 외꺼풀에서 외꺼풀로 바뀐 셈이다. 잘생김의 정도는 변함이 없거나, 사람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였다. 지인 설문 결과를 보면, 10명 중 7명은 하기 전이 낫다 답했다. 전에는 연예인 온유와 닮았다는 소리를 들었다. 지금은 딱히 누구 닮았다는 얘기를 듣지 않는다. 체감하기에 잘생긴 정도는 비슷하다. 사례 2는 큰 고려 대상이 아니다.






빼놓을 수 없는 맹점이 하나 더 있다. 보정 앱 사용 유무에 따라 잘생김의 정도가 다르다. 거울로 보는 나와 스노우를 위시한 필터 앱으로 보는 나는 별개의 존재다. 대안을 찾았다. 철저히 기준을 오프라인으로 둬야 할까 고민했으나, 소통의 시대에서 온라인에 전시되는 나도 '나'로 포함하는 게 맞는다는 결론이 나왔다. 깨어 있는 시간의 절반 이상을 인터넷 속에서 보낸다. 인터넷에 노출되는 사진의 일부는 필터 앱으로 탄생한 것이다. 온라인 속 나는 오프라인의 나보다 비율이 좋고, 얼굴이 갸름하며, 피부가 화사하고 매끈하다. 내 잘생김의 시작은 2010년대다. 그 무렵부터 인터넷과 밀접한 연결이 되어 있었으며, 필터 앱이 존재했다. 두 개의 '나'를 포함해야 한다. 오프라인의 잘생김이 5, 온라인이 7이니 중간치인 6을 기준으로 놓겠다.






본문으로 들어가고 싶지만, 올바른 표본으로 사용되려면 엄밀한 배경지식이 요구된다. 핵심 변수는 언급을 안 할 수 없다. 나는 잘생김을 껐다 켰다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잘생김을 꺼놓으면 잘생긴 것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그러니 잘생김을 on 했을 때만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 결혼 이후로 잘생김은 상시 off 설정되어 있다. 두 가지 이유이다. 첫째, 와이프의 걱정을 덜기 위해. 둘째, 불필요한 논란을 만들지 않기 위해. 많은 이들이 간과하겠지만, 잘생김에 태도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스스로 자신을 잘생겼다 생각하고, 행동으로 드러내면 상대는 주입식으로 그 잘생김의 기준을 받는다. '어 저렇게 본인 외모에 당당하다고? 근거 없이 저럴 수는 없을 텐데. 혹시 잘생긴 건가?'

이것이 내가 말하는 잘생김 on 모드다. 이 모드의 사용 유무에 따라 잘생김과 평범이 나뉜다. 그러니 상시 off 모드인 결혼 이후는 예외로 둬야 한다.





정리하면, 잘생긴 남성의 삶을 논하기 위해 내 삶을 잘생겼던 시절로 한정해야 한다. 그것은 치아에서 교정기를 뗀 25세부터 결혼식을 올린 30세 사이의 5년이다. 눈매교정은 잘생긴 정도를 바꾸지 않았기에 언급만 할 뿐 논외로 둔다. 또한 초연결 시대에 맞춰 필터로 만든 내 얼굴을 '나'의 외모에 포함시킨다. 기준은 그 중위값이다. 자 그럼 잘생긴 5년의 삶을 이야기해보자. 다만 이야기 전에 잘생김의 정도를 구체화할 필요를 느낀다.





우선 나를 차지한 인물을 통해 잘생김의 정도를 표현할까 한다. 잘생김은 수치화하기 어려운 영역에 있다. 사회적 상징을 근거로 잘생김의 정도를 명시할 책임을 느낀다. 그것이 비판적 글쓰기니까. 나는 와이프의 선택을 받은 게 아니다. 내가 와이프를 선택했다. 그녀와 교제를 고민할 때 직접적으로 호감의 표한 이성이 4인 있었다. 그녀는 1/4의 경쟁을 뚫고 청소로 밥 벌어먹는 평산 신씨(몇 대 손인지 모름. 사 온 족보일 확률 높음)를 차지했다. 띤떵훈 와이프 입결컷이 잘생김의 기준을 우회적으로 드러낸다. 세계 40위 대학 학사, 석사 졸업. 예쁨(주관으로 오류일 가능성 있음). 호전적인 성격. 논쟁 시 인신공격으로 넘어갈 가능성 높음. 쇼핑 좋아하고 가사에 참여하지 않음. 몬스타엑스 굿즈 구매에 돈을 많이 씀. 경험이란 낭만주의 신화의 명령에 적극적으로 따르며 비싼 음식 주문과 여행지에서 비싼 숙소 예약에 거리낌 없음. 안타깝게도 이 문단은 잘생김의 정도를 표현하는데 큰 역할을 하지 않는다. 다만 해우소 역할 수행하므로 남겨둔다. 임금 귀 당나귀 귀 문단으로 명명한다.





위 문단을 쓰며 기분이 상했다. 생각하니 억울하다. 와이프는 잘생긴 남편에 감사하지 않는다. 감사 대신 윽박과 일감을 던진다. 침대에서 느긋하게 책 읽으려 하는 남편을 불러서 데스크 정리를 시킨다. 물론 내가 싼 똥 내가 치우는 게 맞지만, 똥이 크지 않다면 치워줄 수 있는 게 아닌가! 전날 칵테일을 마시다 책상 위에 둔 채로 잠자리에 들었다. 칵테일 잔이 눈에 걸렸는지, 나를 부른다. 내가 스터디 가는 것보다 스터디에서 주방 가는 동선이 짧다. 누워서 일어나는 것보다 앉아서 일어나는 게 쉽다. 간단한 상식. 전날 점심 저녁 차리고, 설거지하고, 빨래 2회 돌린 나의 노동을 이해한다면 그 정도는 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결혼생활도 기브 앤 테이크인데 기브만 한다. 기브천사다. 이런 기분으로 글을 쓸 수 없다. 잘생긴 남자의 삶이 아닌 핍박 받는 남편의 삶을 조망할 필요를 느낀다. 그 편이 내 삶에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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