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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띤떵훈 Sep 02. 2021

이채연과 스트리트 우먼 파이터



화제의 예능이 있다. '스트리트 우먼 파이터'라는 스트리트 댄서들의 댄스 배틀 프로그램이다. 나는 아이돌 안무 영상을 즐겨 본다. 다인원이 같은 동작을 절도있게 소화하는 느낌이 짜릿하다. 스트릿 댄스는 아이돌 안무의 기본이다. 프로그램에 관심이 생긴다. 거기에 여자 아이돌 중 가장 춤을 잘 춘다는 이채연의 등장은 프로그램을 안 볼 수 없게 만든다.




2000년도 전후로 만화 힙합이 유행했다. 비보이들의 우정과 열정을 그린 만화였다. 쉬는 시간, 점심시간이 되면  교실 뒤편에서 아이들은 연습했던 동작을 선보였다. 눈대중으로 따라 할 수 있는 기술은 원킥, 투킥, 쓰리킥, 나이키 정도였다. 헤드스핀을 한다면 전교에 소문난 춤꾼이 된다. 바비(만화 설정상 미국 본토에서 넘어온 실력자 비보이)처럼 무대를 뒤집어놓는 비보이가 되겠다는 아이들이 하나 둘 등장했다. 미디어는 아이들 장래희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물론 몇 년 뒤, 근처에 힙합퍼가 되겠단 꿈을 이어가는 아이는 없었다. 대신 제2의 민경훈, 제2의 김진호를 꿈꾸며 노래방에서 동굴 보이스와 바이브레이션을 연마했다.




2021년의 스트리트 댄스는 2000년의 브레이크 댄스처럼 열풍이 될 기미를 보인다. 화요일 저녁 방송이 끝나면, 젊은 층이 모이는 인터넷 커뮤니티는 방송 이야기로 도배된다. 누구의 춤이 어쨌니, 댄서들의 성격이 어쨌니 하며 저마다의 감상을 공유한다. 춤 외적인 부분에선 이견이 생기지만, 그들의 춤에는 한마음으로 박수를 보낸다. 노련한 방송국은 여러 서사와 아이돌 심사위원, 편집을 통해 전문 댄서의 춤을 대중의 관심 영역 위로 올린다. 그중 현역 아이돌의 출연은 가장 큰 관심 요소다.




여기서 유일한 아이돌인 이채연의 존재는 한 가지 사실을 시사한다. 아이돌과 전문 댄서 사이에 넘을 수 없는 실력 차이다. 여러 아시아 국가에서 자국 아이돌을 만든다. 그럼에도 한국 아이돌이 눈에 띈다. 물론 업계의 프로듀싱 능력의 영향이 있지만, 개개인의 실력 또한 중요한 셀링 포인트다. 실력파 아이돌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이 이채연이었다. 많은 이들이 그녀를 여자 아이돌 춤 넘버 원으로 뽑았고(나를 포함), 이를 반영하듯 그녀가 예능에서 선보인 다양한 춤 영상은 몇 천만 조회 수를 돌파했다. 업계 최고 실력자의 출사표는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런 그녀가 5전 4패의 참담한 결과를 받아 들었다.




이채연에 대해 물어올 때 댄서들은 말한다. 아이돌과 댄서는 다르다. 무엇이 다른 것일까? 지향이 다르고, 그에 따라 필요한 연습이 다르다. 댄서의 지향은 더 어려운 동작을, 스킬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이돌의 지향은 노래에 맛을 더하는 안무를 다른 멤버들과 딱딱 맞춰 선보이는 것이다. 춤 난이도가 1~10까지 있다고 가정한다. 댄서는 10을 지향하는 사람이고, 아이돌은 대중이 따라 할 수 있고, 보컬과 함께 구사할 수 있는 난이도, 그러니까 7 정도를 지향한다. 대중을 위해 존재하는 이들에게 10의 춤은 필요하지 않다. 대중이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고, 관심도 없다. 잘나가기 위해선 모든 멤버가 7을 깔끔하게 구사하는 편이 낫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아이돌과 댄서는 다르다는 말의 의미는 10을 겨루는 장소에 7을 갈고닦은 사람은 어울리지 않는단 것이다.





방송을 통해 대중은 10의 영역에 관심을 갖게 됐다. 잘 모르는 부분은 유명 연예인이나 댄서의 독백 카메라를 통해 설명된다. 무엇이 더 어려운 기술인지, 어떤 춤이 나은 춤인지 화면 안에 이야기가 오가며, 시청자들은 7 위의 영역에 대한 기준을 만든다. 언어가 인식을 앞선다. 전문가의 말이 틀을 만들어 8 ,9 ,10을 보게 한다. 덧붙여 나같이 무지한 사람도 직감적으로 알게 된다. 최고의 댄서와 최고의 아이돌을 나란히 세워놓으니 뭔가 다르다. 7의 영역 최강자 이채연이 10의 세계에서 보니 왠지 모르게 초라해진다.




이는 상징적이다. 지향점이 얼마나 실력 차이를 만드는지에 대해 말한다. 이채연은 댄스 신동으로 어릴 때부터 관심을 받아왔다. 춤 좀 추는 동년배들 사이에서 압도적인 실력을 선보였다. 유명 연예 기획사에 소속돼 아이돌 댄서 노선을 탔다. 이때 지향점은 무대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아이돌이 된다. 안무를 소화하기 무리 없는 수준까지 동작과 스킬을 학습하고, 그 후엔 안정적으로 군무를 구사하는 연습이 이뤄진다. 그 와중에 예쁜 표정 짓고 노래하는 연습을 한다. 요컨대 아이돌의 춤은 예쁜 표정과 노래가 들어갈 틈을 전제한다. 전문 댄서의 경우 그 틈을 배제한다. 고등학교 시절, 주변 어떤 이과 학생이 어떤 이유로 문과의 수리1을 보게 됐다. 그리고 특별한 준비 없이 만점을 받았다. 수리2를 공부하던 학생에게 수1은 쉬웠다. 목적지 설정이 불러온 차이다.




 이채연을 응원하는 입장에서 보는 관점이 바뀌었다. 방송 전, 전문 댄서들 사이에서도 압도적 실력을 보여 댄서들의 편견을 깨부수는 다윗의 여정을 기대했다. 이를테면 방송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언프리티 랩스타의 지민, 전소연 역할 말이다. 기억하기로 지민은 최초 경쟁에서 1위를 차지했다. 둘은 경연 내내 우수한 성적을 거둬 대중의 인식을 바꿨다. 무대 경험과 아이돌의 끼가 빛을 발했다. 하지만 이채연은 스트리트 우먼 파이터의 지민과 전소연이 되지 못 했다. 가장 큰 차이는 경쟁자의 실력이다. 언프리티 랩스타에서 전문 여성 래퍼로 나온 이들의 랩 경력은 그리 길지 않았고, 10이라는 지향점이 존재하지 않았다. 여성 래퍼 신이 좁기도 하고, 역사가 짧은 탓이다. 반면 춤은 다르다. 역사가 길고, 커리큘럼이 확실하며, 인력풀이 넓다.



프로그램 참여가 현시점에서 이채연에겐 독이 됐다.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춤 선생님이었던 배윤정의 말에 따르면 채연은 댄서들 사이에 놔도 손색이 없다. 그런 믿음을 바탕으로 소속사에서 참가 결정을 내린 게 아닐까 싶다. 다만 참여하는 댄서들이 '일반'에 속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게 문제다. 요즘 가장 잘나가는 솔로 여가수 중 한 명이 청하다. 아이즈원의 전신인 아이오아이의 메인 댄서로 활약했다. 춤실력과 안정적인 보컬 능력을 발판으로 아이오아이 최고의 아웃풋이 됐다. 여기에 회사의 포지셔닝이 한몫했다. 그녀의 춤 잘추는 이미지를 드러낼 최적의 프로듀싱을 했다. 솔로로 재데뷔, 춤실력이 돋보이는 안무를 짜 화려한 댄서진(스우파 참여자들이 속해 있다)과 함께 공연을 했다. 압도적 춤실력과 안정적 보컬 능력을 가진 아이즈원의 이채연을 보면 자연히 청하가 떠오른다. 회사 입장에서도 이채연이 청하의 전철을 밟아 수익을 거둬주길 바랄 터이다. 데뷔 전에 '전문 댄서를 이기는 아이돌' 포지션은 더할나위 없는 샐링포인트가 될 것이다. 뚜껑이 열렸다. 방송은 '전문 댄서를 이기는 아이돌'이란 말이 성립하기 어렵다는 것을 공표했다.




2 편의 에피소드는 이채연과 전문 댄서들의 차이를 인식시키기 충분했다. 더는 골리앗 잡는 다윗의 여정을 기대할 수 없다. 이제는 엠넷 특유의 성장 서사에 기대를 걸 수밖에 없다. 8, 9, 10의 공백을 재능으로 빠르게 커버하며 참가자들과 대등한 상대가 되는 강백호식 서사 말이다. 성장 서사에 신물 난 네티즌은 제작진에 춤에 집중하라 요구한다. 이채연 팬인 나는 그럴 수 없다. 성장 서사에 맞춰 성장하길, 프로그램 끝에 영광의 시대를 선언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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