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띤떵훈 Sep 23. 2021

가정주부와 반려인



전) 가정주부

가정주부답게 똑바로 행동하라 경고했다. 우리 집은 2인 가구다. 어질러지는 속도는 4인 가구 버금간다.


"누워 있지 마. 집안 정리해. 틈틈이 냉장고 안도 닦고, 찬장 안에도 정리해. 설거지하고 밥 차리는 것으로 유세 부릴 생각하지 마라."


따뜻하고 맑은, 그야말로 좋은 아침이었다. 나는 침대에 누워 유튜브 보고 있었다. 와이프는 3분 동안 5회 안방 문을 열었다. 방문 목적은 면박 주기. 코로나 락다운 탓에 일주일에 열 시간 남짓 일한다. 그녀는 내 처지를 분명히 했다. 코로나 백수. 누워 있는 모습이 눈엣가시라며 가시 빼라고 강요했다. 시간이 썩어나는 사람이 응당 가사를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논점이었다.


나는 반론했다. 반대 경우에 상대가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음을 지적했다. 와이프 석사 논문 쓰던 시절 일주일에 일 회 등교했다. 일 년 동안 논문 한 편 쓰는 코스였다. 교수님 면담 전 하루 이틀 바짝 하고, 나머지 날엔 설렁설렁 여가를 즐겼다. 그때는 코로나 이전이었다. 나는 풀타임으로 일을 했다. 요컨대 와이프의 주장은 합리적이지 않다.


-시간 썩어나는 사람이 집안일 전담해야 한다


위 명제는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본인의 행동이 명제를 부정했다. 본인이 이치라 여기는 행동을 스스로 어겼다. 결국 이는 이치에 맞지 않는 일, 그러니까 불합리한 일이다. 2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불합리를 남에게 강요해서는 안 된다. 둘째, 모두에게 적용되는 이치는 없다. 세상에 절대는 없다. 칸트 형님 잠시 무덤에서 모셔온다. 그가 말한다.


'네 의지의 준칙이 보편적 입법 원칙으로 타당하도록 행위 하라'


왜 그는 '네 의지의 준칙'을 언급한 것일까? 그것은 '모두의 준칙'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윤리, 법이라 말하는 것은 상상의 질서다. 고정된 진리가 아니다. 서로의 합의와 믿음 위에 성립하는 것이다. '모두의 준칙'이란 말이 성립하지 않는다. 뒤에 나오는 단어를 보자. '보편적 입법 원칙'은 지향점이다. 존재할 수 없지만 지향해야만 하는 것이란 의미다. 인간은 육체적 한계를 지닌다. 우리는 물자체를 이해할 수 없다. 모른다고 배움과 교류를 포기할 수도 없다. 제논 선생님 말대로 극한은 0에 가까워질 뿐이지 0은 될 수 없다. 그래도 지향점은 필요하다. 그 지향점이 역할을 하기 위해선 자발적 선행이 필요하다. 뺑뺑 돌아서 말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네가 안 하는 거 남한테 시키지 마.


하지만 시키는 대로 와이프 커피 타주고, 식기 정리하고, 부엌 청소하고, 점심 차렸다.




후) 반려인


와이프에게 집안 행동거지에 대해 가스라이팅 당한 후 떡국을 만들었다. 가정주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집에 소고기가 없었다. 아쉬운 대로 삼겹살과 새우, 다시마로 국물을 냈다. 미리 불려놓은 떡과 만두를 넣고 더 끓이다 달걀 풀고 마무리했다. 간은 국간장과 소고기 다시다로 했다. 가스라이팅이 효과를 발휘했다.  가정주부가 응당 쏟아야 할 노력의 이정표를 따랐다. 떡국은 아주 맛있었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 와이프 말을 따른다. 와이프가 가스등이 어둡다고 하면 '와 진짜 네 말이 백 번 옳다. 졸라 어둡네. LED등으로 바꿔올게.'라고 답한다. 기꺼이 기억을 왜곡하고, 새로운 역할 모델(와이프가 갱신한)에 맞춰 살림한다. 물론 가스등 밝기가 그대로란 사실은 알고 있다.



집 밖에선 좀처럼 순응하지 않는다. 새로운 주장이 나오면 검증한다. 통계를 보고, 발표한 기관이나 사람을 찾고, 근거의 타당성을 확인한다. 나는 논리충에 구글과 나무위키 친구고, 책의 반려인이다. 자존감은 터무니없이 높다. 그 결과 타인에 휘둘리지 않는다. 최근에 대니얼 카너먼 형님께서 시스템 1의 오류에서 벗어나는 방법 몇 가지를 일러주셨다. 46만 자 책을 읽고, 분량을 까다로움으로 승화했다. 관습에 호락호락하지 않다.



이는 와이프도 마찬가지다. 떡국을 먹으며 우리가 그간 써온 말들의 역할을 되짚는 시간을 가졌다. 와이프는 불리는 명칭에 까다롭다. 언어는 관습과 편견, 고정된 역할 모델에 근거한다. 그 의견을 존중한다. 명칭은 사회의 강요를 내포한다. 그녀 기준은 이렇다.


아내, 집사람은 사회적으로 수동적이고 가사를 적극 책임지라 명령하는 말이라 탈락

마누라, 여편네는 낮잡아 부르는 말이라 탈락

여보는 느끼해서 탈락

와이프는 한국인들이 공처가 노릇할 때 주로 쓰이는 말이라 탈락


나는 글에서 그녀를 지칭할 때 와이프란 단어를 사용한다. 외래어로 가치중립적이고 역할이 고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름이나 공주는 2인칭으로 쓰이고, 와이프는 3인칭으로 쓰인다. 면대면 상황에선 이름이나 '공주'로 칭하므로 와이프란 단어가 등장하지 않는다. 아침에 와이프가 '와이프'란 단어가 싫은 이유를 설명했다. 문제의 출처는 한국에서의 쓰임이라는 것이 밝혀졌으므로, 나는 대안으로 와이F를 제시했다. 와이프에 그런 인상을 갖고, 불편하다면 기꺼이 와이F로 칭하겠다 말했다. 본토 발음이 한국식 맥락을 없애주리란 계산이었다.


와이프는 관심법을 사용했다. 내게 그런 의도가 없음을 확인하고, 와이프를 P발음으로 해도 좋다 허락했다. 미륵이다.


본인이 허락했지만, 와이프가 와이프를 싫어하니 대안의 필요를 느꼈다. 그러자 와이프가 '반려인'이란 말을 꺼냈다. 인생을 동행하는 사람이라니. 멋지다. 다만 언어의 의미상 반려인은 동물을 기준으로 한다. 반려묘, 반려견의 있어야 쓸 수 있는 말이다. 한글 쓰임 상 동물을 기르는 사람이 반려인이다. 여기서 사람도 동물인데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텐데, 반려인의 기준은 사람을 제외한 동물을 뜻한다. 송민호 빙의해서 '그래 내가 개다'라고 하면 문제 해결. 그런데 문제가 있다. 반려인은 상호 사용하는 말이다. 와이프도 내게 반려인, 혹은 반려자라 말하게 된다. 그렇다면 그녀도 인간 아닌 동물이 되는 셈이다. 와이프 개 취급할 순 없다.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 언어는 변한다. 언어의 룰이란 것도 변한다. 자장면이 더 맛있는 이름을 얻었듯, 반려인(자)도 사람 사이에 쓸 수 있는 말로 거듭날 수 있다. 동반자란 대체어가 있지만, 이는 과도한 느끼함으로 탈락이다. 반려인의 의미는 완벽하다. 와이프의 말에 일리가 있음을 언급했다. 주체적 삶을 기치로 하는 내게 더할 나위 없는 단어가 아닌가. .... 오잉!?...  와이프의 상태가....! 와이프는 반려인(자)로 진화했다.

작가의 이전글 99% 페미니즘 선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