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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띤떵훈 Mar 16. 2022

어느 대학 출신이세요?



멜버른 거주 동갑내기 모임이 있다. 단톡방에서 대학교 얘기가 나왔다. 누군가 내게 전공이 뭐냐고 묻길래 고졸이라 답했다. 호주에서 고급 준석사 학위를 받았다. 고급준석사는 전문대 위 학사 아래의 애매한 포지션이다. 영주권을 획득하기 전, 호주 체류를 위해 학생 비자를 획득했다. 그걸 연장하며 3년을 보냈다. 그때 얻은 학위가 고급준석사다. 동기가 불순하기에 최종학력으로 계산하지 않았다. 최종학력 -고졸이 윤리적 대답이다.



최근 '어느 대학 출신이세요?'란 책을 읽고 있다. 사회학 모임을 같이 하는 분의 리뷰 덕에 알게 됐다. 제목에 꽂혀 전날 이북을 구매했다. 어제오늘 책을 읽으며 한국에서의 삶을 떠올렸다.


대답할 때의 덤덤한 감정을 통해 시간의 흐름을 인식한다. 10년 전에 나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대학교 어디 나왔어요? 몹시 난처해하며 나의 가치가 대학교로 규정될 수 없음을 우회적으로, 구구절절 설명했을 것이다. 저자가 말했 듯, 한국 사회의 능력주의는 명문대 밖에 있는 이를 소외시킨다. 패배자 계층에 속한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었다. 그때의 열패감은 잊기 힘들다. 내게 고졸 타이틀은 인생의 주홍글씨였다. 사람은 변한다. 10년 동안 마신 외국물이 주홍글씨를 지워왔다.



구차했던 대답이 심플해졌다. 나 고졸이야.


단순함 뒤에 무엇이 있을까? 나는 호주에 산다. 호주 사람은 한국 대학을 모른다. 대학 순위가 어떤지, 위치가 어딘지 중요하지 않다. 욘사이 유니버시티나 기안 유니버시티나 같은 외국 소재 대학이다. 간판이 빛을 잃는다. 서울대 또한 외국 수도에 위치한 대학 1이다. 대학 간판은 한국인을 만날 때 선별적으로 점등한다.



돈의 위력이 한몫 한다. 돈 아래 모든 가치가 전복된다. 나이 먹으며 처절하게 실감하는 것은 자본이 모든 것을 압도한다는 사실이다. 돈 앞에 모든 것이 평등하다. 대학 간판은 일상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돈은, 소비는, 매 순간 나의 삶을 규정한다. 소비에서 정체성을 찾는 사회다. 똑똑한 돈 멍청한 돈이 따로 있지 않다. 돈은 돈이다. 한국은 대학교 순위와 소득이 비례한다. 그렇기에 돈의 세상에서 간판의 위력이 강하다. 도식이 깨지면 간판도 위력을 잃는다. 돈 그 자체가 중요해진다.



다문화도 한 가지 원인이다. 호주엔 여러 문화가 혼재한다. 한국처럼 고정된 가치가 존재하기 어렵다. 같은 문화를 공유하고,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사이에 고정된 가치가 생기기 쉽다. 그 사이에 응당 따라야 하는 일 목록이 늘어난다. 한국에선 인간다운 삶을 위해 해야만 할 일이 너무 많다. '~ 정도는 해야지'가 '~ 정도'를 하지 못 하는 이에게 압력을 가한다. 헬스장 안 가고, 호캉스 안 가고, 맛집 안 가고, 유행하는 드라마 안 보는 자신이 잘못된 건가 의심한다. 타인의 시선으로 내가 탄생한다. 시선을 너무 많이 받으면, 혹은 의식하면 내 안에서 균열이 생긴다. 균열을 메우기 위해 그 시선의 기대에 맞게 행동한다. 다문화에선 시선이 분산된다.



전문가의 의견이 내 서투른 진단보다 신빙성 있다. 책에서 언급된 김누리 교수의 학벌문화 심화 원인을 보자. 세 가지로, 우선 강점기 이후의 적자생존/ 약육강식 체계다. 다음으론 양극화, 마지막이 양반제 철폐로 인한 사회의 새로운 신분 요구다. 세계적 추세지만 한국이 모든 면에서 정도가 심하다. 그 환경에서 벗어나면 학벌의 영향권에서도 자유롭다.



무엇보다 세상이 평등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부담을 덜었다. 멜빈 러너에 따르면 공정한 세상 가설은 착각에 기인한다.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 많은 경우 노력은 배신한다. 우리의 실패가 항상 노력의 부족에서 기인하는 게 아니다. 자업자득, 인과응보란 말에 아닐지도 모른다 반응한다. 행동경제학 또한 인간이 얼마나 영향을 받기 쉬운 존재인지 알려준다. 너무 잘 되고 너무 못 되는 이유를 밖에서 찾게 됐다. 나는 인생을 완벽히 통제할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 아니다.



책에서 말하는 지방대 무시 풍조는 쉽게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간 나온 많은 담론과 해결책이 무위로 돌아간 것이 증거다. 설사 바뀐다 해도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이탈자가 여기에 더 얹을 말은 없다. 패배자로 낙인 찍힐 이들에게 위로의 말을 건넬 뿐이다. 무시당할 이유 없다. 사회가 이상한 거다. 



자신을 패배자로 규정하는 사회에 언제까지 반박할 수 있을까? 생각은 어렵다. 수긍은 쉽다. 세상을 바꾸는 것보다 생각을 바꾸는 게 합리적이다. 패배를 자인할 무렵, 우연한 기회로 세상이 바뀌었다. 그전 세상을 제삼자의 눈으로 보게 된다. 더이상 출신 대학은 중요치 않다. 바뀐 세상에서 10년 살며 깨달았다. 아무래도 인생은 운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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