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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띤떵훈 Oct 01. 2022

세상에 이로운 글

외 2편

세상에 이로운 글



조지 오웰은 대단하다. 그의 산문집을 읽고 있다. 오웰이란 작가에 대해 생각한다. 과거에 오웰의 소설을 두 권 읽었다. 1984와 동물 농장이다. 1984를 읽고 전율했다. 취조 장면은 백미였다. 손가락이 몇 개로 보이냐는 질문을 마주한 주인공의 심리를 치밀하게 묘사했다. '오웰은 어디서 고문 받은 걸까? 분명히 그랬을 거야.' 자문자답. 그는 인물의 입을 빌려 정치적 발언을 한다. 소설이란 피켓 든 사회운동가다. 문장력에 의미가 더해진다. 비단 위에 꽃이요, 포르쉐 핸들 잡은 슈마허다.



압도적 소설을 쓰는 사람이 압도적 에세이를 쓴 사례를 찾기 어렵다. 스케이트는 스피드 스케이팅과 피겨 스케이팅으로 분야가 나뉜다. 분야별 필요한 능력이 다르다. 빠름이냐 아름다움이냐. 글도 비슷하다. 문학적 능력과 비문학적 재능이 다르다. 조지 오웰의 산문을 읽고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압도적 소설과 압도적 에세이가 한 사람에게서 나올 수 있다. 대마법사인데 소드마스터다. 현실에 마검사가 존재했다.



두 가지 압도적 능력의 이유를 발견했다. 그가 현실을 소설처럼 다루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대마법사가 검술의 요체를 마법에서 발견한 느낌일까. 현실 속 인물이 그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메신저로 변한다. 그가 만든 치밀한 작품 세계의 말처럼 느껴진다. 그의 문장은 소설, 산문 가리지 않고 정치적이다. 소설은 알레고리와 등장인물의 대사란 매개체가 작가의 주장을 대변한다. 산문도 비슷하다. 직접적 주장도 있으나, 비유와 인물 묘사가 메신저가 된다. 니체의 말이 떠오른다. 사실은 없다 해석만 있을 뿐. 그의 경험을 해석하는 방식엔 특징이 있다. 분명한 지향점이 있고 모든 인물과 환경이 그곳으로 향한다. 문장을 지배하는 사람의 특권이다. 서두에 있는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에서 작가 본인이 말한다.



'나는 스스로 언어에 재능이 있고 불쾌한 사실을 직면하는 힘이 있음을 알았으며, 이것이 나만의 세상 같은 것을 만들어 일상생활의 실패에 보복해 주는 느낌이었다.'



산문선에 그의 문장론이 실렸다. 산문을 쓰는 데 필요한 네 가지 주요 동기를 꼽았다. 1. 자기만족 2. 미학적 열정 3. 역사적 충동 4. 정치적 목적. 1~3의 동기가 어린 오웰을 이끌었고, 4번 동기가 성장한 오웰을 이끌었다. ‘정치적 목적 없다면 글은 생명력을 잃는다.’ 그에게 정치적 목적이 생명의 원천이다. 그 말대로다. 분명한 목적을 갖고 쓴 글에는 힘이 있다. 글은 한 눈 팔지 않고, 한곳으로 향한다. 독자로 향하는 글은 에너지 손실 없이 묵직하게 전달된다.



내게 4번 동기의 비중은 크지 않다. 1번이 과반이고, 그 뒤를 미학적 열정이 잇는다. 유레카! 내 글의 문제를 발견했다. 나를 위한 글이 세상을 위한 글을 이길 순 없다. 자기를 위한 탐미 행위가 남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까? 좋은 묘사, 좋은 운율, 문장의 공명, 리듬감은 그 순간의 즐거움일 뿐이다. 유행가다. 뉴진스의 하입 보이를 듣는다. 몸을 들썩이며 멜로디를 따라 부른다. 노래가 끝난다. 나는 그대로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글을 쓰며, 글을 쓴 이후에 내가 만든 문장을 확인한다. 무슨 의미가 있지? 별거 없다. 글쓰기는 내게 게임이다. 짧게 쓰기 게임, 단어 찾기 게임, 지식 분류 게임, 많이 쓰기 게임, 리듬 게임. 분명 쓰기는 유용하다. 유용과 의미는 다르다. 유용은 하지만 의미는 덜하다. 세상의 관점에서 볼 때 의미는 0에 수렴한다. 자기만족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글이 주는 의미는 한정적이다. 세상을 바꿀 의지가 (거의) 없다. 세상에 이롭지 않다. 휘발하는 글. 네이버가 블로그 시스템을 유지하는 동안만 존재한다. 내게만 의미 있는 글은 내가 사라지면 의미를 잃는다.



오웰은 사라지고 글은 남았다. 그의 글은 세상에 이롭다. 세상에 의미 있다. 정치적 동기가 미학적 열정과 호응해 만든 결과다. 그의 문장을 읽으면 인정할 수밖에 없다. 조지 오웰은 대작가다. 대작가의 빛나는 문장 옆에 나를 배치한다. 나는 세상을 바꿀 자신도 능력도 의지도 없다. 앞으로도 내게만 의미 있는 글을 쓸 예정이다. 내가 사라지면 세상에서 사라질 글을. 유용함의 위안을 받으며.









하면 안 되는 일



하면 안 되는 일을 했다. 다른 표현으론 '긁어 부스럼'. 사업하는 입장에서 피해야 하는 행동이 있다. 그것은 고객과 시비 가리기다. 이겨도 지는 싸움이기 때문이다. 고객의 오해가 맞든 아니든 관계없다. 나는 칸트도, 당위적 존재도 아니다. '진실은 중요치 않음' 21세기 사회인의 덕목이다. 합리적 인간이 되어야 한다. 합리적 인간은 자신에 필요한 것을 파악하고, 그것을 얻기 위한 방법을 고려한다. 내게 필요한 것은 지속적 수입이다. 고객은 지속적 수입의 원천이다.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고객과의 진실공방은 곧 계약 해지다. 내가 믿는 진실이 틀렸을 가능성도 많다. 잘난 듯 말하는 내가 '해서는 안 되는 짓'을 저질렀다. 이 글은 일종의 시말서다.



지역의 다른 프랜차이즈 사업자의 일을 두 달간 봐줬다. 격주 고객 하나를 맡았다. 집 꾸미기를 좋아하는 백인 사모님이다. 두 달간 4회 방문 계획이었다. 나의 한국 방문 일정과, 고객의 사정이 겹쳐 방문 횟수가 두 번으로 줄었다. 단 두 번의 방문에서 유쾌하지 않은 일이 생겼다. 스타벅스에 들어설 때다. 에어팟에 재생 중인 노래가 꺼지고 전화벨이 울렸다. 고객이었다. 그녀는 질타의 감정을 섞어 내게 물었다. 왜 절반만 일했어? 기억을 되돌렸다. 2시간 30분짜리 일이었고, 나는 고객집에서 2시간 15분 머물렀다. 2시간 30분의 절반은 1시간 15분이다. 나의 1시간이 행방불명됐다. 고객 입장에선 안내받은 시간 보다 짧게 일한 것에 불만을 가질 수 있다. 불만을 표현하는 과정에서 과장이 섞일 수 있다. 상황 정리하고 다시 연락하기로 했다. 전화를 끊었다.



커피를 받아들고 자리에 앉았다. 커피 대신 핸드폰을 잡았다. 엄지를 부지런히 움직였다. '내가 도착한 시간이 언제고, 떠난 시간이 언제이다. 마침 집에 손님이 있어 내가 떠난 시간을 증명해 줄 것이다. 뭘 보고 내가 절반만 일했다 말하는 것이냐?' 마지막에 사족을 넣었다. 시비 가리기를 시작했다. 파토스의 폭발 후 3분이 지났다. 안개가 걷히자 미성숙함이 드러냈다. 동료의 고객에게 싸움을 걸다니, 사회인 실격이다. 한숨이 터져 나왔다. 마구니가 끼었다.



마구니가 떠나고 이성이 자리를 되찾았다. 어떻게 만회할 수 있을까? 두 가지를 떠올렸다. 첫째, 고객을 맡긴 동료에게 인수인계하기. 둘째, 고객과 합의점을 찾기. 행동에 옮겼다. 동료에게 문자를 보냈다. -두 차례 서비스를 제공했고, 고객이 만족하지 않았다. 빈자리를 제대로 채우지 못 했다. 미안하다.- 이어서 고객에게 연락했다. -고객이 만족하지 않은 서비스에 비용 전부를 청구할 순 없다. 네가 생각하는 적정 금액을 말해준다면 인보이스를 수정하겠다.-  곧 답장이 왔다. 고객은 타당한 의견을 제시했고, 나는 수용했다. 문자를 남겼다. -합리적 제안이다. 덕분에 타협점을 찾을 수 있다. 집이 예뻐서 일하며 감탄했다. 잘 지내길 바란다.- 우리가 협력 관계이며, 성공적으로 합의에 이르렀다고 넌지시 말했다. 적에서 동료로 포지셔닝했다. 고객은 내민 손을 붙잡고 악수했다. 우호적인 문자가 되돌아 왔다. 그녀 문자에 하트 이모티콘을 보내는 것으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인터넷에서 자주 보이는 짤이 있다. 귀여운 캐릭터들 위로 '말하기 전에 생각했나요?'란 문장이 적힌 짤이다. 경솔한 발언을 지적하는 용도로 쓰인다. 내게 보여주고 싶은 이미지다. 나이를 서른 하고도 다섯 개나 먹었다. 부끄러운 역사를 써내린다. 늦게나마 서른 하고도 다섯 개 먹은 나이에 부합하는 뒤처리를 했다. 감정에 휘둘리면 오래지 않아 후회한다. 이성은 해야 할 일을, 감정은 하고 싶은 일을 주장한다. 나는 감정에 약한 사람이다. 대체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산다. 다만 공적 자아, 그러니까 직업인으로서는 이성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믿는다. 시말서다운 마무리가 필요하다. 저의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합니다. 앞으로 말하기 전에 충분히 생각하겠습니다. 문자를 보내기 전에 검수하겠습니다. 회사의 무궁한 발전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JLPT 시험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일본어 자격증은 두 개다. JPT와 JLPT다. JLPT가 더 대중적이다. 호주에서 JLPT 시험을 다시 볼 예정이다.


한때 JLPT 자격증을 취득했다. 가장 어려운 레벨인 N1부터 가장 쉬운 N5까지 5개로 나뉜다. 군대를 전역하고 콜센터 알바를 했다. 그때 일본어 학원을 다니며 여가 시간의 대부분을 일본 예능 방송 보는 데 썼다. 높은 청해 점수 덕에 비교적 손쉽게 N1을 취득했다. 11년이 지났다. 우리 뇌는 사용하지 않는 지식을 휴지통으로 보낸다. 일본어 어휘와 문법이 자취를 감췄다. 이주 전에 일본어 언어 교환 모임에 참여했다. 디스크 조각 모음 하듯 지식의 파편을 열심히 모았다. 영구 삭제된 조각이 많았다. 입이 굳어버렸다.



호주 소재 JLPT 기관은 매년 일 회에서 이 회 시험을 주관한다. 주에 따라 횟수가 다르다. 퀸즐랜드 소재 브리즈번은 1년에 2회, 다른 주는 1년에 1회 시험을 본다. 올 초에 시험 기간을 검색했다. 멜번은 11월에 있단다. 1년 가까이 남아서 시험 준비를 하지 않았다. 10월이 다가오자 불현듯 시험의 존재가 떠올랐다. 검색해 보니 11월에 신청받기 시작해 12월에 시험을 연다. 두 달가량 시간이 남았다.



유튜브에 없는 게 있을까? 유튜브에 JLPT 청해를 검색했다. N1 모의시험이 있었다. 게다가 스크립트와 정답지도 공개했다. 댓글로 질문하면 관리자가 친절히 정답 해설을 남겼다. 문명의 이기에 감사하며 문제를 풀었다. 침대에 누워 핸드폰 액정을 쳐다봤다. N1 청해 만점의 사나이 글방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만점의 사나이에게 메모는 사치다. 청해는 누워서 유튜브 보기만큼 쉽다. 말하고 읽고 쓰는 능력은 퇴화했지만, 듣는 능력은 아직 쓸만하다. 유튜브로 일본 여행 브이로그 본 짬이 있다. 곽튜브 일본 여행기를 자막 없이 즐길 수 있는 나다. 문제 유형 1과 2를 풀었다. 총 13문제였다. 문제 1,2에서만 5개를 틀렸다. 오답이 5개. 전체 아닌 유형 1,2에서만 5개? N1 재취득의 난이도를 재설정했다. 할만함 -> 감히 네가?



두 달 동안 대충 공부해선 취득할 수 없다. 유노윤호에게 가장 무서운 벌레는 대충이다. 내게 가장 유용한 벌레이기도 하다. 안 하는 것보다 대충이라도 하는 게 낫다. 나는 게으르다. 대충이 없었으면 아무것도 안 했을 것이다. 두 달 동안 대충 공부할 예정이다. 취득 못 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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