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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띤떵훈 Jul 01. 2023

You made my day


제목은 직역하면, 나의 날을 만들어줬다. 의역하면 나를 굉장히 기쁘게 만들었다-란 뜻의 영어 표현이다. 낯선 이가 나의 날을 만들었다.



아침 방문을 열고 서재로 향했다. 글을 써야지. 룰루 랄라 무엇을 쓸까. 흠 뭔가 허전해. 아 맞다 커피를 안 만들었군. 키친으로 향했다. 아뿔싸 커피가 다 떨어졌지. 인스턴트커피밖에 없잖아. 인스턴트커피를 마시고 싶지 않아. 에스프레소 머신이 내려준 에스프레소가 필요해. 그 향과 맛이 나의 글쓰기를 윤택하게 만들 거야. 7시밖에 안 됐는데 슈퍼마켓이 열까? 여는군. 일단 그라운드 커피가 세일인지 확인해야지. 세일하지 않으면 너무 비싸서 좀처럼 사기 힘드니까. 어디 보자 구글에 ground coffee를 입력하고, 쇼핑 섹션으로 가서 on sale을 틱해볼까. 일단 Coles를 보자. 아니 1kg 빅토리아 그라운드 커피 반값? Woolworths를 보자. 1kg Oro 커피 반값? 둘 다 매력적이군. 하지만 Oro는 250g을 4등분 했다는 이유로 값이 더 비싸잖아. 콜스로 가야겠다.



후리스 재킷 하나 걸치고 외출용 바지로 갈아입는다. 양말 없이 신을 수 있는 뮬을 신고 현관문을 나선다. 평소라면 35~40불 줘야 살 수 있는 1kg 커피를 반값에 사기 위해 차 시동을 건다. 부릉부릉. 토요일 아침이라 길이 뻥 뚫렸다. 운전할 때는 안경을 쓰자는 철칙이 있지만, 가깝고 막히지 않는 거리를 운전한다는 생각이 예외를 만들었다. '철칙'이라는 단어엔 어길 수 없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그간 나는 모순을 저질렀구나. 인간은 역시 부조리의 화신, 부조리의 산물이다. 절대 뚫을 수 없는 방패를 뚫는 듯이 힘차게 엑셀을 밟았다. 콜스 주차장으로 진입할 때 맞은편에 오는 차가 안 보였다. 사고가 날뻔했다. 한때 '철칙'이라 불렀던 이유를 상기하며 콜스에 입성했다.



주차를 끝내고 건물로 들어가니 한 인도인 친구가 물기계로 타일 바닥을 청소하고 있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고 있다. 프루스트가 보리차에 적신 프티트 마들렌을 한 입 먹고 과거로 여행을 떠나듯, 나는 그 찰나의 순간 물기계 돌리던 9년 전 워홀 시절로 돌아갔다. 매일 오전 6시~9시, 3시간 동안 울어스를 청소했다. 흡착력이 좋은 극세사 밀대로 바닥에 있는 먼지를 제거하고, 물기계로 세정하고, 광기계로 광을 내는 일정이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코인은 팁이다. 부수입은 보통 캐셔 근처에서 발견된다. 골드 코인을 주우면 그날은 1.5불짜리 2L 울어스 콜라를 사 마실 수 있다. 승리를 자축한다. 물기계에 물을 넣는다. 기계는 물을 세정액과 섞어 지면에 분사하고, 기계의 세정 패드는 돌아가며 바닥과 마찰한다. 이윽고 뒤에 달린 스퀴지가 세정이 끝나 지저분한 구정물을 빨아들인다. 이것이 대형 마트를 손쉽게 청소할 수 있는 비법, 문명의 이기다. 한 세기 전이었다면 상상도 못 했을 효율. 아! 나 커피 사러 왔지. 먼 여행을 끝내고 본분으로 돌아온다. 이 모든 여정은 1초 사이에 벌어졌다. 청소하는 인도 사내가 나의 날을 만든 것은 아니다.



장바구니를 들고 콜스에 입성했다. 오픈 직후여서 직원들이 어수선하게 움직인다. 저마다 담당하는 파트에 빠진 물건을 채우는 등 재고 관리를 한다. 콜스와 울어스는 호주 시민의 성소다. 몇 세기 전에 교회가 했던 역할을 콜스와 울어스가 한다. 모든 생활을 책임진다. 아이엘 별로 파는 물건이 다르고, 웬만한 호주 시민은 이 시스템에 적응했다. 자연스레 필요한 물건이 있는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커피, 티 섹션에 오니 노란색 팝업이 눈에 띈다. 1/2 Price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그렇다 이것이 내가 찾던 Victoria Ground Coffee 1KG이다. 요 며칠 집에서 맛있는 커피를 마실 수 없었다. 오늘부로 부재의 고통은 끝이다. 바로 이 소비로 인해! 허리를 굽혀 가장 아랫단에 있는 제품을 확인했다. 텅 비었다.



반값에 환장하는 것은 나뿐만 아니다. 우리 모두의 DNA에 반값은 못 참지 미토콘드리아 정보가 있다. 다른 모든 커피는 재고가 있는데, 딱 하나, Victoria Ground Coffee 1KG의 재고는 없다. 반값은 못 참는다. 좌절했다. 장바구니에 할인하는 고구마와 식용유를 담았다. 근처 콜스를 검색했다. 5분 거리에 하나 있다. 고구마와 식용유를 결제하고 가야 할지, 내려놓고 거기 가서 다시 사야 할지 고민했다. 고구마는 타임 세일로 가서 없을 확률이 높고, 식용유는 일괄 할인이라 가면 살 수 있다. 그렇다며 고구마만 사야 하는 것인가? 어찌 이리도 귀찮고 복잡하단 말인가. 또한 근처 매장도 재고가 없을 확률이 있다. 이런 노동과 귀찮음을 감수해서 아무것도 건진 것이 없고, 되려 고구마를 잃게 된다면 큰 손실이다. 토요일의 시작이 엉망이 되는구나. 다음 매장에 커피가 없다면 그걸로 끝이다. 다른 매장으로 향할 에너지도 없고, 세일 제품이 분명히 있는데 2배 값을 지불할 의향도 없다. 에스프레소 부재의 고통이 이어진다. 그때 멀리서 한 사내가 보였다.



그 사내는 티, 커피 아이엘의 담당자일 가능성이 있다. 재고를 조사 중이다. 오픈 직후부터 9시까지는 일이 많다. 나의 요구가 그를 귀찮게 만들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나는 이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나의 이기심이 발길을 움직였다. 하이, 너네 혹시 빅토리아 그라운드 커피 재고가 있니? 저기 보니까 없더라고. 그는 커피 칸으로 와서 재고를 확인했다. 아마 여기 없으면 없을 거야-라는 레퍼토리를 반복했다. 나는 상대의 찾을 의욕을 고취시키기 위해 말을 덧붙였다. 내가 이거 사러 이 아침에 나온 거야. 이게 없네 어쩐담. 그에게 불쌍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는 이타심을 불어넣었다. 이것을 도와주면 나는 누군가의 히어로가 된다. 일상의 사소한 호의가 누군가에게 큰 행복을 준다는 사실을 그도 그의 역사 전반에 걸쳐 알고 있으리라. 그는 제품 코드를 스캔했다. 바쁜 와중이지만 스톡이 있는지 확인하러 백룸으로 갔다. 내 안에는 감사하는 마음이 싹텄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의 호의에 온 우주의 기운을 담아 감사하기로 마음먹었다. 미션에 실패해도 그의 호의는 영웅적 행위다. 부정할 수 없는 그의 호의, 나의 고됨과 슬픔을 없애기 위한 치유다.



그는 금의환향했다. 내가 얼마나 그것을 원하는지 어필했다. 그는 나의 마음을 이해했으리라. 그의 손에 들린 Victoria Ground Coffee 1KG가 얼마나 큰 가치를 지니는지 알고 있다. 당당한 자세로 어깨 위로 Victoria Ground Coffee 1KG짜리 4묶음 한 박스를 들고 귀환한다. 오디세우스가 이타카로 돌아올 때 이런 느낌이었을까. 모든 적을 무찌르고 십 년의 세월(십 년 맞나?)을 뚫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는 재고 산을 뒤집고 병든 고객의 치료 약을 획득했다. 당당한 걸음걸이로 미션을 준 NPC에게 돌아왔다.



나는 그의 영웅적 행위가 내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언어와 몸짓과 표정으로 설명했다. 그것은 나의 본분이다. 은혜를 입은 자가 보여야 할 마땅한 감사다. 찬사를 예고하는 한숨을 내쉬고 격정에 찬 표정을 만든 뒤 그에게 감사의 말을 했다. 친구여! 너는 나의 날을 만들었다. 이것이 없었다면 나는 다른 매장으로 향해야 했고 너도 알다시피 그것은 굉장히 귀찮은 일이다. 너는 굉장히 나이스하며 나는 그런 나이스함에 감사한다. 오오 감사해.



영웅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호메로스는 대서사시를 남겼다. 나는 나의 갈증을 적셔준 일상 속 용사를 기리기 위해 브런치에 이 글을 남긴다. 영웅이 구해준 암브로시아를 마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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