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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띤떵훈 Nov 05. 2023

내가 보는 나, 네가 보는 나

오빠는 MBTI가 어떻게 돼요? 어 나는 ENTJ야. 근데 ENTJ의 설명문에서 나한테 부합되지 않는 내용이 꽤 많아서 결과를 신뢰할 순 없어. 그리고 내 항목별로 그레이존에 있는 게 많아서 온전히 그들이 설명하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아. 아 맞아요. 오빠는 F인 것 같아요. 말 잘 들어주고 맞장구 잘 쳐주잖아요. 옆에 있던 너사와가 말한다. 아니야 오빠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야. 냉혈한이야. 계산적이고 공감 능력이 없어. 남이 보는 오빠의 공감 능력은 오해야. 학습에 의한 기계적인 공감하는 거지.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공감은 다르잖아?



이렇게 나라는 인물에 대한 평이 다르다.



내가 보기엔 태생이 계산적이지만 인간적인 따뜻함을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어느 정도 성과를 내고 있는, 그러니까 F와 T쪽의 경계에 있는 사람이다. 질문을 건넨 동생이 보기엔 다정하고 이해심 많은 사람이다. 너사와가 보기엔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다. 실제 나는 어디에 있을까? 그 중간 어디쯤에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모든 사람이 속한 범주지 않을까? 나라는 독특한 개체성은 없는 것인가? 실로 흥미롭군.




한 날은 덴마크 식당에 갔다. 한 쪽은 바고 한 쪽은 식당이다.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저녁 약속이 있었으므로 바로 향했다. 덴마크 식당은 아는 동생이 일하는 가게이다. 저녁 식사 장소와 근처에 있고, 저녁 식사에 참여하는 친구 중 한 명이 가자고 권유해서 가게 됐다. 먼저 도착했다. 넓은 창으로 쏟아지는 햇살을 온몸으로 즐기며 랩탑을 펼쳤다. 블로그에 그날 쓴 글을 검수하고 있었다. 내가 새로운 사업 모델을 구상했는데 어떤 시행착오가 생겼으며 어떤 교훈을 얻었는지 쓴 글이었다. 예쁜 공간에서 맥주 한잔하며, 퇴고를 하고 있으니 천국에 온 기분이 들었다.




오빠! 식당 쪽에서 아는 동생이 나를 부르며 다가왔다. 쉐프복에 검정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매번 한식당과 집에서 보던 사람이다. 이렇게 보니 색달랐다. 사적인 영역의 동생을 보다 공적 동생을 보니 새로운 사람을 만난 기분이 들었다. 공간과 유니폼은 그런 기분을 위해 설계된 것이기도 하다. 공적 동생(퍼블릭 에너미 아님)과 반갑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오빠 뭐해요? 아 나 그냥 맥주 마시면서 랩탑 만지작거렸지(글 쓴다는 표현은 느끼하게 느껴질 때 랩탑을 만지작거린다는 표현으로 대체한다).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글을 쓰고 있었어-라고 하자니 표현들에서 이상한 시너지가 생겨 느끼한 문학도 교회오빠로 거듭날 것 같다는 위기의식을 느꼈다. 나는 문학도도 아니고 교회 오빠도 아니고 담백함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잘못된 길을 걷지 않기 위해 '그냥'이란 부사와 만지작거리다는 뭉뚱그림으로 나의 이미지 속으로 돌아왔다.




동생은 스크린에 보이는 문장들을 휙 보더니 뭐에 대해 썼냐고 물었다. 나는 설명충 기질이 있어서 구구절절 설명했다. '내가 최근에 사업 시스템 짜면서 느낀 시행착오에 대해 정리했다. 왜 시행착오를 겪었냐면, 나의 의도 때문이다. 평생 순탄하고 편하고 문제없이 살아왔다. 시행착오가 부족했기에 성장도 없었다. 그래서 새로운 도전을 했고, 그 결과를 정리하고 있었다.'라며 깔끔하게 PREP 구조로 설명했다. 듣는 사람의 시간도 생각해야 하니까.




설명 중에 동생은 잉? 하는 부분이 있었다. 내가 한없이 게으르고 풍파 없이 편하게 살아왔다는 구절이었다. 진짜로 그렇게 느끼냐고 되물었고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고 답했다. 나는 문득 주변인들이 내가 얼마나 게으른지 잘 모르고 있단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 보니 어딘가에서 '부지런하다'라는 말과 '굴곡 있는 삶을 살았다'라는 말을 들었다. 아! 유레카다. 깨달음을 얻었다. 그날 읽은 책 '가짜 노동'의 구절이 오버랩됐다.




책이 말한다. 사회적 금기, 바쁘지 않다는 말.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사회의 윤리로 거듭나고 우리는 바쁘고 성실히 사는 청교도의 삶을 추구했다. 귀족적 유한계급의 삶에서 사업 일선에서 활동하는 사업가와 활동가가 추앙의 대상으로 거듭났다. 그 덕에 직장인들은 본인의 바쁨과 굴곡짐을 적극 어필해서 사회에서 생존할 수 있게 됐다. '직장에서 늘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은 신화나 다름없습니다.' 책에서 하이라이트 해놓은 구절이다. 명치 세게 맞았다. 흔히 통찰이라고 부르고 펀치라인이라 부르기도 한다. 사람은 체면을 차리느라 실제 일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일하는 척'을 하는 데 시간을 쓴다.




내 무의식적 습관 중 하나는 팩트 체크다. 내 기분에 대해서도 팩트체크한다. 와 너무 많이 일했다. 너무 바쁘다. 오늘 진짜 열심히 일한 것 같은데? 산업혁명 시대 영국의 면직물 공장에서 일하는 아동 노동자가 된 것 같다. 이윽고 팩트 체커가 찾아온다. 자 보자 보자. 네가 6시 30분부터 일했지. 아니 운전을 6시 30분에 한 것이고 실제 일터에서 일을 시작한 시간은 7시지. 그리고 2시까지 일했지. 그러니까 총 7시간을 일했군. 그리고 중간중간 일하던 손을 멈추고 카카오톡을 확인하고 인터넷 뉴스를 확인하기까지 했지. 계속 바쁜 것도 아니었어. 이는 호주 하루 노동시간 기준인 7.6시간 보다 짧다. 기분이 반박한다. 운전도 노동의 일환이니 운전한 30분을 추가해! 팩트 체커는 단호히 거절한다. 누구나 일터에 가기 위해 출근해. 경기에서 서울로 향하는 사람은 출근 시간만 2시간이 걸려. 그들이 출퇴근 시간 4시간 포함해? 하루 평균 12시간 노동이라고 해? 아니잖아. 그건 포함하면 안 되지. 팩트 체커의 말은 합리적이다. 팩트 체커가 승리한다. 결과적으로 내 기억 자아는 '중간중간 카톡 보고 인터넷 뉴스 보고 쉬엄쉬엄 일한 7시간'이라고 그날의 노동을 정정한다. 나중에 돌아보면 쉬엄쉬엄 느긋느긋 찔끔찔끔 일한 사람이 서 있다.




팩트 체커는 여러 측면에서 애쓴다. 내가 착각할 때마다 검지를 흔들며 음음, 그건 아니지라고 말한다. 열심히 살았다. 굴곡 있는 삶을 살았다. 최선을 다해 살았다. 내 기분은 쉽게 말한다. 기분이가 현대 사회의 근로 신화에 경도되어 자꾸 자신을 포장한다. 나는 정말 멋진 현대 시민이야. 최선을 다해 일했어. 열심히 살았어. 멋지단 말이야. 하지만 팩트 체커가 나르시시즘을 방해한다. 그나마 열심히 살았던 시기가 있다. 호주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보낸 1년이다. 호주 시골에서 투잡을 했다. 청소 프랜차이즈를 해야 한다는 목적으로 절약해서 6개월 동안 3만 불을 모았다. 사업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영어 실력을 갖추기 위해 공부했다. 그때의 하루 일과는 5시~8시까지 마트 청소, 귀가 후 4시간 영어 공부, 14시~ 20시 호텔 쉐프 보조였다. 얼핏 보면 칭찬의 말이 나온다. 정말 열심히 살았구나. 너도 우여곡절이 있었네. 하지만 이 또한 팩트 체커의 눈을 벗어날 수 없다. 자 보자 보자, 공부와 일을 병행해 최선을 다해 살았다라... 노동 시간 다 합쳐도 9시간. 두 일터가 비교적 가까웠기 때문에 출퇴근 시간 도합 1시간 남짓. 출퇴근 시간을 합친 하루 노동 시간 10시간이면 한국인 평균에 비슷한 정도. 게다가 호텔 일의 경우 저녁 준비를 다 하고 식사했지? 근무 시간 중 30분은 유급으로 먹고 마시기까지 했네. 실질적으로 노동에 투하한 시간은 8시간 반이야. 그리고 매일 4시간의 영어 공부라고 했지? 음 자연스러운 영어식 표현을 쉐도잉을 통해 학습했다고? 영어 자막 켜고 프렌즈 시청한 걸 영어 공부에 포함한 건 염치가 없지 않니? 프렌즈 본 시간 제외하면 실질 영어 공부 시간은 2시간 남짓이야. 자 정리해 보자. 너는 8시간 30분을 일했어 너 재밌자고 미드 본 시간 제외, 하루 공부 시간은 2시간이야. 물론 일하면서 공부한 건 잘한 일이야. 근데 2시간 공부한 걸로 최선을 다한 삶이라고 말하는 거 좀 부끄럽지 않니? 팩트 체커의 말은 합리적이다. 또다시 승리한다. 결과적으로 내 기억 자아는 시골 생활을 -하루 2시간 공부하고 평균 한국인 수준의 노동한 시기-로 정리한다.




나는 게으르면서 잘난 척하길 좋아한다. 나의 짧았던 노력의 시기를 최대한 포장한다. 평균 온도 40도의 호주 탄광촌에서 보낸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불굴의 한국인 신화를 말한다. 새벽 청소를 하고 집에서 4시간 영어 공부를 하고, 오후엔 호텔 쉐프 보조로 근무를 했다. 그 과정을 통해 멜번에서 프랜차이즈 사업에 필요한 자금을 모으고 영어 실력을 키웠다. 보통 와- 소리가 나온다. 나는 흐뭇하게 대중의 반응을 살핀다. 그러다가 찌릿한 통증이 속안 깊숙한 곳에서 올라온다. 팩트 체커가 속삭인다. '야 너 8시간 반 일했잖아. 영어 공부 2시간 했잖아. 집 안에서 에어컨 풀로 돌려서 상시 시원했잖아. 그 정돈 아니잖아.' 죄책감을 이기지 못 하고 잘난 척을 일정 부분 포기한다. 청자에게 양심선언한다. "근데 투잡이라고 해도 막상 일한 시간 계산하면 그렇게 길지 않았어. 사실 영어 공부도 확 집중해서 하지 않았어. 그냥 대충 시간 채우는 정도로 했어" 감사하게도 이를 겸양의 표현으로 본다. 나는 이걸로 할 만큼 했다. 칭찬을 계속 거절할 순 없지.




대체로 나를 향한 오해는 위와 같은 메커니즘으로 형성된다. 내 안의 팩트 체커는 자기 기만을 경고한다. 그 환경 전반을 보면 전혀 대수롭지 않은 일인데도 결과만 보면 대단해 보이는 어떤 성취들이 나를 둘러싼다. 특히 매년 100권 이상의 책을 본다는 사실은 나를 부지런한 사람으로 연출한다. 부지런함 평판의 90%의 근거라 봐도 무방하다. 독서가 현대인의 삶에서 멀어졌기 때문에 다소 신화화된 경향이 있다. 낯선 일에 더 대단하게 느낀다.  "와 한 달에 한 권 읽는 것도 힘든데 엄청 부지런하시네요. 일하면서 그렇게 읽는다니 대단합니다." 이것도 알고 보면 대수롭지 않다. 내 독서 시간의 대부분은 근로 시간과 겹친다. 귀를 막고 청소한다. 이북 청취 모드를 이용해 일하면서 책을 듣는다. 우선 책에 쏟는 절대 시간이 생각한 것만큼 크지 않다. 듣는 게 익숙해져서 3배속으로 듣는다. 그러니까 일반 청취 모드로 33권 들을 시간에 100권을 듣는다. 그리고 1년에 몇 번씩 시리즈물 오락 소설을 읽는다. 작년엔 재벌 집 막내아들, 비따비 등의 산경 소설을 읽었다. 올해는 달빛 조각사, 무당 신선, 재벌 집 천재 감독을 읽었다. 보통 오락 소설은 한 권 분량이 10만 자 초반이다. 청취 모드로 2시간 반 정도면 한 권을 끝낸다. 올해 읽은 세 시리즈의 책만 41 권이다. 이 책을 포함하면 100 권은 대수롭지 않다. 청소하면서 칼싸움하고 절세미인 만나고 환생하고, 재벌 되는 이야기 듣는다. 이 시간을 부지런으로 발음하니 민망한 웃음이 나온다.




이 세상에 분명히 열심히 사는 사람은 존재한다. 그들의 존재를 부정할 순 없다. 다만 많은 이들이 실재와 감정을 혼동하고 열심히 산다고 착각하는 것도 사실이다. 나는 게으르다. 쉽고 순탄한 삶을 살았다. 뭔가를 이루기 위해 열정적으로 산 기억도 많지 않다. 열심히의 증거라고 내놓은 것도 들여다보면 별 볼일 없는 것들이다. 게으름과 적당히로 점철된 삶이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현실의 나는 침대에 누워서 유튜브 쇼츠로 요즘 뜨는 밈 보며 여가를 낭비한다. 삶 전반을 볼 수 없어서, 결과만을 봐서, 양심의 침묵을 거쳐서 나라는 한 인물에 대한 다양한 평가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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