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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띤떵훈 May 08. 2024

우리를 버티게 만드는 것은 불가해함을 인정하는 것

환상의 빛



 고레에다 감독 영화 모두 보기 챌린지 중이다. 챌린지의 시작은 감독의 데뷔작인 '환상의 빛'이다. 이로써 작가의 16 편의 작품 중 6편을 봤다.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 데뷔작을 리뷰하며 생각을 정리할까 한다. 





환상의 빛을 보고 떠오른 한 마디,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 떡잎이 크고 아름답다. 위대한 감독은 시작부터 위대하다. 그의 특징이 보인다. 일상적 장면을 통해 감정을 전달한다. 지나칠 수 있는 순간을 포착해 의미를 만든다. 천천히 시간을 담는다. 그 느린 속도에 의미를 꾹꾹 채운다. 등장인물이 내가 된다. 문제 의식과 문법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작품성도 마찬가지다. 필름의 아날로그 느낌이 없었다면 몇 번째 작품인지 알 수 없다. 





환상의 빛의 핵심 소재는 죽음이다. 인간의 삶을 한순간 반짝이는 빛으로 비유했다. 우리는 어둠에서 잠시 반짝이고 다시 어둠(죽음)으로 돌아간다. 주변인의 상실을 통해 어둠으로의 회귀를 실감한다. 죽음은 주인공을 옭아맨다. 죽음은 바다와 같다. 알 수 없는 심해다. 얼마나 깊은지, 무엇이 인간을 홀려 바다로 이끄는지 알 수 없다. 시아버지는 전직 어부다. 깊은 곳에서 반짝이며 자신을 부르는 바다를 회상한다. 인간은 바다의 손짓을 자신도 모르게 따라간다. 그 이끌림을 우리는 이해할 수 없다. 영화는 그 손짓을 따라 어둠으로 돌아간 이들과, 남겨진 이들을 그린다.




영화에선 총 세 번의 죽음이 등장한다. 첫 두 번은 성공이고 마지막 한 번은 미수에 그친다. 최초로 고향으로 떠나는 할머니가 등장한다. 할머니는 죽음이 목전이다. 태어난 곳에서 죽고 싶다며 빈손으로 고향으로 향한다. 어린 주인공의 만류에도 할머니는 귀향 의지를 꺾지 않는다. 카메라는 건널목을 멀리서 잡는다. 할머니는 건널목의 지평선 저 먼 곳으로 천천히 걸어간다. 비틀거리지만 결코 멈추지 않는다. 삶의 마지막을 인정하고 죽음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저 먼 어둠으로, 한순간 환상처럼 빛나는 삶을 끝내고 돌아간다. 십수 년이 지나 동네 친구와 결혼한 주인공은 그때를 회상하고 후회한다. 왜 막지 못 했을까. 





두 번째 죽음은 남편의 죽음이다. 주인공은 넉넉하지 않지만 남편과 3개월 된 아기와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낸다. 소소한 즐거움으로 매일을 채운다. 남편이 도둑질한 자전거를 같이 도색하고, 남편의 일터에 마중 나가고, 동네 카페에서 차를 마신다. 도둑질한 자전거를 함께 타고 귀가한다. 이상할 것 하나 없던 어느 날 문득 남편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듣는다. 일터에 나간 남편이 잠시 집에 들른다. 비가 올 것 같다며 자전거를 집에 두러 온다. 우산을 챙겨 홀로 길을 떠난다. 그날 저녁 경찰을 통해 남편의 부고 소식을 듣는다. 아무런 맥락 없이, 낌새 없이 남편이 죽는다. 그녀도 관객도 이유를 알 수 없다. 





세 번째는 동네 해녀 할머니의 죽음이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즈음 재혼한다. 집주인의 소개로 알게 된 건실한 남자와 가족이 된다. 새 남편의 고향인 바닷마을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그녀는 두 사람의 부재를 극복한다. 남편과 남편의 딸, 시아버지와 함께 바닷마을 생활에 적응한다. 입은 거칠지만 마음 따뜻한 해녀 할머니와도 친해진다. 어느 날 해녀 할머니의 출근길을 보게 된다. 인사를 나누고 할머니를 바다로 떠나보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폭풍이 마을을 덮친다. 온 집이 바람 소리로 스산하다. 바다로 떠난 할머니가 걱정되기 시작한다. 잠을 이룰 수 없다. 극복한 줄 알았던 죽음의 망령이 다시 그녀를 덮친다. 할머니는 꽃게 몇 마리와 함께 빛의 세계로 돌아온다. 죽음은 미수에 그쳤다. 그러나 죽음의 강렬한 인상은 그녀를 삼킨다. 





두 번의 죽음과 한 번의 미수가 그녀의 삶을 바꾼다.주인공은 고향을 찾는다. 주변인과 인사를 나눈다. 그러다 전 남편과 즐겨 가던 카페에 들린다. 카페 마스터에게 남편이 사망하던 날의 이야기를 듣는다. 마스터가 기억하는 남편의 마지막 모습은 평소와 다를 게 없다. 죽음의 불가해함을 상기한다. 집에 돌아와 사망한 남편의 주머니에 있던 작은 방울을 흔든다. 짤랑거리는 소리가 떠나가는 남편의 마지막 발걸음과 오버랩 된다. 그녀는 죽음에 천착한다. 누군가의 장례 행렬을 무작정 따라가거나, 화장터를 떠나지 못 하거나, 버스 정류장에 멍하니 앉는다. 자신도 먼저 간 그들처럼 바다의 반짝이는 손짓으로 향한다. 





그럼에도 빛의 세상에 남는다. 자신을 데리러 온 남편에게 소리친다. 전 남편이 왜 자살한지 도무지 알 수 없다고. 남편은 밖에서 이해할 수 없는 저마다의 사정이 있다 말한다. 그럴 수 있다며 아내를 보듬는다. 아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간다. 시간이 지나 아내는 시아버지와 자녀들과 코타츠에 앉아 있다. 먼바다를 바라보고 영화는 막을 내린다. 주인공이 어떻게 마음을 돌린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녀의 전남편이 죽을 결심을 한지 모르는 것처럼. 삶은 부조리 투성이다.우리를 버티게 만드는 것은 불가해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달관하는 것이다. 그럴 수 있지. 





죽음을 인정하는 한편, 의미 없고 찰나와 같은 삶에 남는다. 그녀가 왜 신기루처럼 빛났다 사라지는 삶에 남았는지는 모른다. 죽음이 불가해한 것처럼 삶도 이해할 수 없다. 인생은 환상, 그러니까 헛된 공상이다. 삶은 어둠 사이에 짧게 빛나는 환상이다. 우리는 그 덧없음을 의식하며 그냥 산다. 주어진 시간을 실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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