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괴물' 리뷰
고레에다 챌린지 중이다. 그레에다 감독이 연출한 모든 영화를 보는 챌린지다. 데뷔작인 '환상의 빛'에 이어 최신작인 '괴물'을 봤다. 30년간 감독의 관심사는 변하지 않았다. 사회 보편과 보편 기준 밖의 사람들. 사회가 그들을 어떻게 대우하는가? 그들은 어떤 고충을 안고 사는가?란 질문을 건넨다. 일본은 장인정신의 나라다. 한 가게를 몇 대째 이어오는 장인이 많다. 감독에게 장인정신을 엿본다.
각본을 언급 안 할 수 없다. 각본가 사카모토 유지는 괴물로 칸 영화제 각본상을 수상했다. 고레에다 감독이 각본을 쓰지 않은 작품이 두 개인데, 바로 환상의 빛과 괴물이다. 그 두 작품을 연달아 봤다. 놀라운 점은 다른 각본가의 작품임에도 한 사람이 쓴 작품 같다는 사실이다. 이는 얼마나 자기화가 잘 됐는지, 본인의 철학이 분명한지를 나타내는 증명이다. 어떤 각본이라도 자신의 철학을 담아, 영화 문법에 맞출 수 있단 자신감으로 보인다. 괴물의 경우 공동 집필이라는 말이 어울린다. 고레에다 감독 또한 훌륭한 각본가다. 한 인터뷰를 통해 각본의 수정 방법을 듣게 된다. 각본이 쓰인 것은 2018년이다. 코로나 탓에 2023년까지 작품을 만들지 못 했다. 5년간 각본가와 협업해 각본을 수정했다. 고레에다 감독의 생각이 충분히 담긴 각본으로 거듭났다. 촬영 때 각본으로 인한 고충은 없었다고 한다.
괴물의 중심 주제를 한 마디로 설명하면, '포스트모던적 억압'이다. 아이들에게 가해지는 어떤 억압이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그것은 '평범'이라는 단어로 포장된다. 일반적인 가정, 일반적인 사랑, 일반적인 학생, 일반적인 자녀를 위한 어떤 틀이 제시된다. 포스트모던적 억압은 생소할 수 있다. 짧게 설명하면, 간접적인 행동과 생각의 통제다.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따르게 만드는 발전된 방식의 억압이다. 강제하거나 명령하지 않는다. 사회적 기대나 관습이 수단이다. 기대를 통해 특정한 행동을 유도한다. 예를 들어, "선택은 너의 몫이야"라는 말로 자유를 주는 듯하지만, 사실상 선택하지 않으면 죄책감이나 실망을 느끼게 만든다. 선택의 자유를 가장한 심리적 압박이다. 또한 "네가 올바른 선택을 하리라 믿어"라는 표현. 상대방이 그 선택을 하지 않으면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 특히나 자아가 잡히지 않은 아이들에게 강하게 작용한다. 기대와 실재의 균열에서 주인공은 자해와 폭력, 거짓말을 한다. 포스트모던적 억압의 다른 문제는 책임 소재가 분명하지 않은 점이다. 관객은 분노를 터트릴 대상을 찾지 못 한다.요리의 아버지처럼 분명한 악인이 있는 반면, 그외 모든 등장인물은 저마다의 평범하다. 저마다의 소임을 다한다. 부모로서, 선생으로서, 교장으로서, 학생으로서. 관객의 추궁하는 시선은 인물에서 사회 전반으로 확장된다.
미나토의 어머니는 자식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사랑과 배려로 아이를 돌본다. 흔히 말하는 좋은 어머니다. "네가 하고 싶은 것 뭐든지 해. 내가 지켜줄게. 그저 평범하고 행복하게 자라줘." 편부모 가장으로 불평 한 마디 없이 책임을 다하는 멋진 어머니 역할을 수행한다. 마지막에 가서야 따뜻과 일상 속 가려진 억압을 발견한다. 어머니 입장에서 평범과 행복은 긴밀히 연결된다. 행복은 평범한 가족이 저마다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돌려 말하면 평범하지 않으면 행복할 수 없다. 미나토는 평범 밖에 있는 감정에 혼란스럽다. 본성은 바꿀 수 없다. 막을 수 없는 것을 막으려 할 때 곪는다. 곪은 것은 터져 나온다. 그 결과 아이들과 주변인에 비극이 생긴다. 중간중간 아이들의 입을 통해 감독은 묻는다. 괴물은 누구? 평범하지 않은 아이들일까 아니면 평범을 규정하는 사회일까?
괴물의 특징은 의도적 정보 제한이다. 출연자와 관객에게 의도적으로 정보를 제한한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무슨 일의 행방을 화자(환상의 빛은 1인, 괴물은 어머니, 호리 선생, 아들 3인)의 시점을 통해 찾아간다. 의도적으로 호도한다. 괴물에서 우리는 누가 악인인지 찾고자 한다. 어머니의 시선을 따라 호리 선생을 의심하고, 호리 선생의 시선을 따라 아들을 의심하고, 아들의 시선을 따라 실은 악은 없었고, 악의 형태를 띠게 만든 환경에 생각이 이르게 된다. 환상의 빛과 비슷하다. 주인공은 맥락 없이 삶을 마무리한 이들의 사인을 찾아 나선다. 끝에 가서도 이유를 찾을 수 없다. 고레에다 감독의 장기는 이것이다. 답을 떠먹여주는 것이 아니라 현상 보여주기다. 어떤 의견을 강요하지 않고 관객이 직접 생각해 보도록 만든다. 우리가 가진 보편 개념의 근간이 무엇인지, 타인을 완벽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인지.
고레에다 감독과 친분이 있는 영화평론가 이동진은 말한다. '영화는 두 번 시작된다' 두 번째는 영화가 관객의 마음 속에 다시 시작될 때를 의미한다. 관객이 영화를 보고 난 후, 자신의 경험과 감정으로 영화의 내용을 재해석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영화 속 메시지와 감정을 개인적으로 받아들이고, 내면화하며, 영화와 상호작용한다. 요컨대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가는 '창작'의 과정이다. 시청각적 경험을 넘은 예술적 경험이다.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는 이동진의 관점에서 좋은 영화다. 왜냐하면 두 번째 시작을 잘 경험하도록 돕기 때문이다. 특징을 정리하면, 1. 여운을 남긴다. 2. 다층적 의미를 지닌다. 3. 개인적 경험과 연결된다. 4. 토론을 유도한다. 감정을 반추하고, 함의를 찾고, 개인적 경험과 연결하며, 영화에 나온 현상이 어떤 맥락에서 나온 지 생각하게 만든다. 나무에서 숲으로 앵글을 넓힌다. 괴물은 환상의 빛과 마찬가지로 두 번째 감상을 위한 재료를 양껏 쏟아낸다.
괴물은 고레에다 감독의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디테일이 살아있다. 예를 들면 인물의 표정, 행동, 영화 배경과 소품, 음악 등. 어느 하나 그냥 만든 것이 없다. 존재에 이유가 있다. 답을 말하지 않는 영화는 아이러니하게도 무수한 이유로 구성된다. 장르를 떠나 창작물의 수준을 논할 때 좋음과 아주 좋음을 구분하는 것은 '디테일'이다. 어디까지 시선이 다다랐는가 문제다. 다르게 표현하면 얼마나 많은 '왜?'의 레이어를 씌웠느냐의 문제다. 이런저런 작품을 볼 때 간혹 기시감이 든다. 명확한 이유가 중요하다. 이를 통해 단순 차용인지, 작품의 무게를 더하기 위한 오마주인지 구분한다. 막대한 자본이 들어가면 어느 정도 수준, 그러니까 일반적인 좋음에 이를 수 있다. 속칭, 기본빵은 한다. 아주 좋음에 이르려면 디테일이 있어야 한다. 그 디테일을 아우르는 방향성을 철학이라 말한다. 괴물의 디테일이 작품성의 방증이다.
영화의 시작과 끝을 논하며 글을 마무리할까 한다. 영화는 불로 시작해 물로 끝난다. 건물에 화재가 생기며 시작해 태풍과 홍수가 온 마을을 뒤덮는 것으로 끝난다. 불은 파괴와 분노를 상징한다. 건물 화재는 인물들의 삶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의미한다. 인물 안에 억눌렸던 화가 폭발하는 것을 시각화한다. 반면, 물은 재생과 새로운 시작을 상징한다. 홍수는 모든 것을 씻어내고 새롭게 시작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영화의 마지막에 물이 등장하는 것은 정화의 의미다. 비가 그치고 아이들은 밝은 세상으로 나온다. 큰 소리로 웃으며 팔짝 거리며 철로를 뛴다. 지금은 작고한 류이치 사카모토의 아쿠아가 흘러나오며 영화는 끝을 맺는다. 이야기 속 아이들의 행복을 기원하는 찬송가처럼 흐른다. 그럼에도 세상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아이들의 환희는 마지막 씬에서만 영속할 수 있다. 위로를 받는 한편 무거운 짐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