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시절, TV는 내 단짝이었다. 학교 끝나고 집에 가방을 던지고, 허름한 도서대여점으로 달려 가 만화책 3권을 빌렸다. 한 권 300원, 총 900원. 손때 묻은 책을 조심스레 넘기며, 아무리 천천히 읽어도 1시간이면 끝났다. 그다음은 장난감 시간. 문구점에서 산 500원짜리 변신 로봇, 싸구려 플라스틱이지만 내겐 보물이었다. 인간형 로봇이 공룡으로, 비행기로 변신했다. 손가락으로 조심조심 움직였다. 세상의 유일한 상수는 변화란 깨달음까지는 아니고, 500원치곤 구색 잘 맞췄네-하고 감탄했다. 오후 5시쯤, 다리 쭉 뻗고 TV 앞에 자리 잡았다. 화면이 깜빡이며, 만화가 나를 다른 세상으로 끌고 갔다. 그 환상의 문이 열리는 순간, 세상 모든 피곤함이 녹아내렸다.
‘요리왕 비룡’은 그 시간의 왕이었다. 보라 머리 동양인이 접시 덮개를 열면, 천란한 빛이 쏟아졌다. 요리가 눈앞에 펼쳐지고, 심사위원이 한 숟갈 떠서 입에 넣는다. 그리고 터져 나온다—미미! 중국 배경의 이 만화는 요리로 세상을 바꾸는 비룡의 이야기다. 맛을 색과 소리로 그렸다. 용이 뛰놀고, 하늘이 갈라지는 듯한 과장이 내 어린 마음을 뒤흔들었다. “미미”는 그냥 맛이 아니었다. 아름다운 순간, 성우의 열연이 그걸 심장까지 새겼다. 그때부터, 맛있는 건 뭐든 ‘미미’였다. 학교 매점 떡볶이 한 입, 집에서 먹던 김밥 한 조각에도 “미미!”를 외쳤다. 그 말은 남도 다 아는 비밀 암호였다.
그 시절, 만화는 단순한 오락이 아니었다. 고요한 거실, TV 화면의 깜빡이는 빛. 아버지와 이혼한 어머니는 새벽부터 일터로 나갔다. 혼자 집에 남아 냉장고 문을 열었다. 김치 통에서 빨간 국물이 살짝 샜고, 라면 한 봉지를 꺼냈다. 끓는 물에 면발이 풀리며 고소한 냄새가 퍼졌다. 라면 한 입 먹고, 나는 외쳤다. “미미!” 학교에서 친구랑 다툰 일, 숙제가 산더미인 걱정을 잊혔다. 비룡과 함께라면, 그 허름한 셋방도 환상의 주방이었다. ‘미미’는 위로였다, 어린 마음에 스민 습관. 20년 넘게 미미가 내 안에서 살아남았다.
멜번은 커피의 도시, 그야말로 수두루빽빽한 카페 천국이다. 집 옆 히카리에서 크레마가 둥둥 뜬 롱블랙을 마신다. 작은 머그에 담긴 기름진 커피, 골목마다 흔하다. 스타벅스는 한동안 발길이 끊겼다. 예전엔 화장실, 늦은 영업, 콘센트가 카페의 필수 덕목이었다. 이젠 우리 매장 화장실이 있고, 히카리가 저녁 7시까지 열고, M1 맥북 배터리는 하루 종일 버틴다. 스타벅스 고집은 먹고 살만해지면서 내려놨다. 세상이 나를 편하게 놔줬다. 히카리의 작은 머그, 크레마의 고소한 향, 그걸로 충분했다. 그래도, 가끔 스타벅스의 널찍한 테이블이 그리울 때가 있다. 뭔가, 잉여를 끌어안기 좋은 공간이랄까.
시드니에서, 오랜만에 스타벅스에 들렀다. 번화가 한복판, 길 건너 바로 그 카페다. 우리 매장에서 뛰면 30초, 접근성 하나는 압도적이다. 커피 맛은 뒷전이었다. 당장 글을 써야겠다는 마음이 컸다. 노트북을 펴고, 커피 한 잔을 시켰다. 기대? 바닥이었다. 그냥 자리값 내고 앉은 거다. 스타벅스는 그런 곳이다. 뭘 해도 어울리고, 뭘 안 해도 괜찮은 공간. 키보드를 두드리며,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자, 오늘은 어떤 잉여를 끄집어낼까?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누구에게나 잘 맞는 고소함, 살짝 떫은 뒷맛이 입안을 맴돌았다. 이게 스타벅스 커피였나? 그간 스타벅스 커피에 박했음을 깨닫는다. 평범한 한 모금이 묘하게 그때를 떠올리게 했다. 만화 속 ‘미미’ 같은 느낌, 아주 살짝. 라면을 먹던 그 허름한 주방, TV 앞에서 외치던 그 순간. 커피 잔을 내려놓고 잠시 멈췄다. 뭐지, 이 익숙한 기분? 직관적인 고소함이, 어릴 적 라면 한 입의 그 단순한 기쁨과 어딘가 닮아 있었다. 이 카페, 그냥 자리값이 아니었다.
글은 양괄식이 정석이다. 주장, 이유, 예시, 주장. 깔끔하게, 독자가 바로 알아듣는다. 근데 오늘은 미괄식, 끝까지 뭘 말할지 꽁꽁 숨긴다. 독자는 헤맨다,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야?” 의미 전달? 1g의 도움도 안 된다. 하지만 이게 오늘의 컨셉이다. 쓰기의 날, 잉여를 적극적으로 끌어안는 축제. 커피 잔 옆에서 키보드를 두드리며, 나는 소리 안 내고 웃는다. 스타벅스의 널찍한 테이블, 이 공간은 내 잉여를 포용하는 무대다. 뭐,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미미’는 그냥 말이 아니다. 어린 시절 만화, 비룡의 요리가 내게 새긴 흔적이다. 커피 한 모금이 그걸 끄집어낸다. 미미! 뭐, 세상이 뒤흔들릴 정도는 아니지만, 그때의 기쁨이 조용히 떠올랐다. 머릿속 어딘가, 과거의 순간이 지금의 맛과 살짝 스친다. TV 앞 꼬마, 라면을 후루룩 먹던 그 아이가, 지금 카페에 앉은 나와 눈을 마주친다. ‘미미’는 그 순간을 이어주는 가느다란 실이다. 20년 전의 거실과 지금의 스타벅스, 시간 사이를 오가는 작은 다리.
마지막 한 모금, 스타벅스 커피가 보리차에 담근 마들렌이 되었다. 어린 시절 TV 앞, 비룡이 요리를 내놓던 그 순간. 라면 한 입에 외치던 “미미!” 그 단순한 기쁨이 되살아났다. 기대 없이 마신 커피가 그 기억을 톡 건드렸다. 일회용컵에 맺힌 물방울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괜찮네' 미미라는 말이, 이 한 잔에 어울렸다. 스타벅스는 그날의 식탁과 오늘의 테이블을 잇는 무대가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