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나흘 동안 감기 몸살에 시달렸다. 나름대로 건강한 생활을 해왔다고 자부한다. 충분히 자고, 청결을 유지하며, 매일 유산소와 근력 운동을 병행한다. 물도 많이 마시고, 사회적 교류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일주일에 한두 번은 친구를 만나 웃고 떠들며 인간다운 하루를 보냈다. 그런데도 감기에 걸렸다. 몸이 무너졌다.
발단은 토요일이었다. 거의 완벽한 하루였다. 날씨가 좋아 파트너와 유산소도 할 겸 동네 마켓까지 걸었다. 편도로 한 시간쯤 되는 거리였다.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햇살이 내려앉은 거리를 걷는 동안 비타민 D도 충전됐다. 오늘 하루도 어른스럽게 잘 살고 있단 인식이 뒤따랐다.
도착한 곳은 사우스 멜번 마켓. 멜번에서도 손에 꼽히는 유서 깊은 재래시장이자,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공간이다. 장아찌를 만들 요량으로 마늘쫑과 통마늘, 청고추를 골랐다. 디저트로 먹을 파인애플, 그리고 집에 떨어진 생필품도 챙겼다. 대형 마트가 아닌 공간에서 사람 냄새를 맡으며 물건을 사고팔 때 살아 있다는 실감이 났다. 그 하루는 그 자체로 충분했다.
문제는 펍에서 터졌다. 나는 전날 음주 탓에 커피를, 파트너는 가볍게 맥주 한 잔을 시켰다. 이유도 기억나지 않는 사소한 말에서 논쟁이 시작됐다. 우리 관계는 10년이 넘었다. 그러나 어떤 날은 낯설 정도로 멀게 느껴진다. 같은 장면을 보고도 해석이 달랐다. 상식이라 부를 수 있는 것조차 서로에게는 다르게 적용됐다. 어떻게 그런 반응이 나올 수 있지? 대화를 나눌수록 의문은 증폭됐다.
3분 정도 지나면 논쟁은 본질을 잃는다. 그 이후부터는 감정 싸움이다. 다 큰 어른답게 피하려고 애쓰지만, 마음처럼 되진 않는다. 당황함과 서운함이 차올랐다. 눈을 질끈 감고, 한숨을 쉬며 분노를 제어했다. 그러나 이미 대화는 비난의 연속이 되어 있었다. 감정이 깊어질 무렵,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오한이었다. 건강한 하루를 보낸 바로 그날에,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들이닥쳤다. 코가 간질거리고, 목을 큼큼거리는 소리를 무의식적으로 내기 시작했다. 기력이 빠지더니, 차가운 기운이 어깨를 타고 흘렀다. 그렇게 감기 몸살이 시작됐다. 마지막에는 서로 간신히 어른의 얼굴을 되찾았다. 택시를 불러 귀가했고, 식사를 마친 뒤 진통제 한 알을 털어 넣고 잠을 청했다. 그 이후로는 점점 더 고통스러운 나날이었다.
고통은 첫날보다 둘째 날, 셋째 날로 갈수록 짙어졌다. 손오공이 쓰던 '긴고아'가 내 머리에 씌워진 듯, 쥐어짜는 통증이 가해졌다. 머리가 깨질 듯 아프고, 콧물과 기침, 오한, 고열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일요일과 월요일엔 어쩔 수 없이 소화해야 할 일정이 있었다. 몸을 이끌고 운전대를 잡았고, 할 일을 마친 후엔 침대에 쓰러져 하루를 마감했다. 다시금 깨달았다. 건강이야말로 최우선 가치다.
아프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사유도, 판단도 흐려진다. 생각이 아니라 감각만 남는다. 나라는 존재는 희미해지고, 감각만을 인지하는 동물이 된다. 그 고통 속에서, 눈을 질끈 감고 오디오북을 재생했다. 멜번 리딩홀의 다음 도서였던 가보 마테의 『정상이라는 환상』이었다.
책은 현대 사회에서 ‘정상’이라 여겨지는 삶의 방식—감정 억제, 스트레스에 무감각한 태도, 끝없는 경쟁—이 사실상 우리 몸에 얼마나 해로운지를 설명한다. 특히 가족 간의 갈등이 면역력에 미치는 영향을 강조하는 대목에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무리 운동을 하고, 건강한 식사를 하고, 잘 자더라도, 반복되는 부부 갈등은 면역력을 낮춰 병에 걸리게 만든다는 구절이었다.
감정은 단순히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물리적인 결과를 만든다. 그날의 싸움은 분명 내 몸에 영향을 줬다. 책을 들으며,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유레카.
고통은 서서히 가셨다. 그제서야 내면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건강한 관계를 원한다. 더 건강하고 어른스러운 커뮤니케이션을 원한다. 정답은 알고 있다. 다만 실천할 용기가 모자랄 뿐이다. 자존심은 그릇의 크기와 반비례한다. 자존심을 내려놓고 포용하는 연습을 하기로 했다. 그래야 내가, 우리가 건강하다. 그래야 오늘 같은 병치레를 반복하지 않는다.
그리고 다시 일상을 살아간다. 꺼진 불도 다시 보듯, 야채를 씻고, 물을 마시고, 낮잠을 청한다. 고통을 겪고 나니, 작은 실천이 큰 안정을 준다는 걸 새삼 느낀다. 건강은 늘 그 자리에 있었지만, 아플 때 비로소 진가를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