サカナクション sakanaction
‘사카낙숀’은 일본의 밴드다. 일본어를 읽을 줄 아는 나는, 이 이름이 ‘사카나(물고기)’와 ‘액션’의 결합처럼 느껴진다. 마음속에선 자연스럽게 ‘사카나 액션’이라 발음하게 된다. 마치 Wednesday를 보고 ‘웨드네스데이’라 떠올리는 것처럼, 정답은 알지만 발음은 내 방식대로 처리하는 버릇이다. 이름의 유래가 궁금해져 구글 제미나이에 물어봤다. 사카나와 액션, 맞았다. 물고기처럼 자유롭게 헤엄치며 활동하고 싶다는 의미란다. 예상이 맞았다는 사실에서 얻은 건, 그들에 대한 이상한 친밀감이었다. 그런 사소한 예측이, 이상하게도 호감의 출발점이 되곤 한다.
이들의 음악은 처음엔 흘려듣는 소리였다. 일본 대중가요 모음 영상, 유튜브 음악 채널, 혹은 유튜브 뮤직의 무심한 추천이 그 시작이었다. 특별히 찾아 듣지 않았는데 반복적으로 노출되다 보니, 어느 순간 *신다카라지마(신 보물섬)*의 멜로디가 귀에 남았다. 빈도는 정서를 설득한다. 그렇게 하나의 곡을 반복하다 보면, 알고리즘은 다음 후보를 제시한다. *와스레라레나이노(잊을 수 없어요)*도 그렇게 ‘얻어걸린’ 노래였다. 처음엔 배경음처럼 스쳐갔지만, 어느 순간 멜로디에 따라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반복은 습관이 되고, 습관은 취향이 된다. 음악 감상은 종종 우연을 통해 정착한다.
예술가에 대해 나는 단순한 이미지를 갖고 있지 않다. 감정에 충실하고, 사회의 틀을 흔들며, 때론 자기 영역에 갇혀 타인에게 불편을 주기도 한다. 대중예술에서 기대하는 건 익숙한 것에 약간의 변주를 더한 ‘자리 이동’이고, 순수예술에서는 오히려 그 익숙함 자체를 전복해주는 ‘대전환’을 요구하게 된다. 나는 보통 후자에 더 매혹된다. 전자는 기능에 가깝고, 후자는 사유에 가깝다. 그러나 전환은 늘 에너지를 요구한다. 예술은 파괴를 동반하고, 감상자는 그 충격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역설이 생긴다. 파격을 원하면서도, 그 수용에는 인내가 필요하다. 실은 나도 새로움을 원하면서 그 새로움에 전면적으로 열려 있지는 않다. 그러니 감상의 총량은 자연스레 제한적이 된다. 감당 가능한 예술만이 예술이 된다—적어도 나에게는.
그런 기준에서 보면, 사카낙숀은 분명 대중예술의 분류에 있다. 멜로디가 있고, 반복해서 들을 수 있으며, 유튜브 알고리즘이라는 경로를 통해 도달한 음악이다. 그러나 그 안에는 자기 색을 일관되게 유지하면서도, 내 감각에 낯설게 작용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익숙함 안에 낯섦이 삽입된 구조랄까. 그래서 나는 그 음악을 계속 들을 수 있었고, 듣고 싶어졌다. 어느 날 우연히 본 잼 영상은 그 전환점이었다. 완벽히 짜인 무대가 아닌 리허설에서, 예상치 못한 감정의 파동이 들어왔고, 그건 내 안의 기준을 살짝 벗어난 지점에서 인상 깊게 작용했다. 듣는 위치가 감상자에서 목격자로 이동하는 듯한 순간. 낯선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자, 사카낙숀은 조용히 들어왔다. 대중예술의 외피를 두르고 있으면서도, 내 감각의 경계에 미묘한 파열을 만들어낸 존재였다.
며칠 전, 인스타그램 릴스에서 사카낙숀의 ‘잼’ 영상 하나를 우연히 봤다. 일본 아이돌 그룹 칸쟈니가 진행하는 프로그램 ‘칸잼’의 리허설 장면이었다. 원래 포맷은 칸쟈니 멤버들이 악기를 연주하며 다른 아티스트와 협업하는 구성으로 보였고, 해당 영상은 리허설 도중 촬영된 것으로 보인다. 베이스 루프가 먼저 깔리고, 그 위에 사카낙숀의 구성원들이 차례로 사운드를 더했다. 리허설은 기술적 확인 절차에 불과한 것이 보통인데, 그들은 그 순간을 마치 공연처럼 받아들였다. 마지막에 보컬이 들어와 진심을 다해 열창했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는데, 감정이 무대를 만들고 있었다.
그 장면을 보고 나서야 뒤늦게 생각이 정리됐다. 이게 예술이지. 내가 느낀 건 그들이 ‘다르다’는 감각뿐만이 아니었다. 사카낙숀의 음악은 내 기준으로 명확히 독립된 영역에 있다. 장르적 변주나 스타일의 실험이 느껴지지만, 그 변화가 억지스럽지 않다. 간혹 파격을 위해 허술한 전개를 감행하는 경우가 있다. 기괴함으로 예술을 호소하는 사람도 있다. 그럴 때 나는 인기보다 ‘지속성’을 본다. 자신의 사운드를 일관되게 유지하며, 약간씩 각도를 틀 수 있는 사람. 사카낙숀은 곡이 달라도 방향감각이 선명하다. 태그처럼 반복되며, 자기 색을 놓치지 않는다. 설명하긴 어렵지만, 그들에겐 분명 고유한 감각이 있다. 그걸 인지하게 된 건 그 영상을 여러 번 보며, 듣게 되면서부터다.
나는 그 영상에 댓글을 달았다. “좋아하는 곡인데 즉흥 연주로 들으니 더 좋네요.” 별다른 수식도, 말장난도 없는 문장이었다. 그런데 인스타그램을 열 때마다 좋아요 알림이 떴다. 예상 외였다. 번뜩이는 재치도 없었고, 굳이 누를 만한 요소도 없었으니까. 아마도 같은 감정을 느낀 사람들이 반응한 것일 테다. 알림을 클릭할 때마다 영상이 자동으로 재생됐고, 그렇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몇 번이고 다시 듣게 되었다. 감상은 의도보다 반복을 타고 깊어진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단순 노출 효과, 그 말 그대로다.
오늘 카페에 앉아 노트북을 열고 작업하다가, 자연스럽게 사카낙숀의 앨범 *‘834.194’*를 틀었다. 처음 듣는 앨범인데 낯설지 않았다. 곡마다 고유한 질감이 있는데도 방향이 흐트러지지 않는다. 설명할 순 없지만, 자기 색이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이름처럼 자유롭되, 자기 수심을 알고 헤엄치는 물고기 같았다. 그러니까 어쩌면, 예술이라는 건 그런 식으로 드러나는 걸지도 모른다. 누가 설명하지 않아도, 우연히 다가왔지만 계속 남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