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트너가 30분 전에 공항으로 떠났다. 2달 일정이다. 스위스를 시작으로 프랑스, 스페인, 스코틀랜드를 순서대로 돈다. 자기 몸만 한 캐리어와 풍선처럼 부푼 사이드 백을 들고 스카이버스를 탔다. 나는 이 넓은 집에서, 앞으로 두 달을 혼자 지낸다. 본격적인 홀아비 생활의 시작이다.
내 일상엔 ‘당위’가 차지하는 영역이 그리 크지 않다. 직업이 없기 때문이다. 직업이 있는 사람은 대체로 일주일 40시간 노동을 통해 생계를 유지한다. 출퇴근을 포함해 하루 대부분을 ‘해야만 하는 일’에 사용한다. 그건 강한 동기 없이도 지속 가능한 시스템이다. 나에겐 그게 없다. 대신 주체적으로 일정을 설계한다. 집에 있고자 하면 있고, 나가고 싶으면 나간다. 24시간은 온전히 내 몫이다.
이건 대체로 축복이지만, 사소한 구간에선 고통이다. 사르트르는 무제한의 자유가 주는 고통을 말한 적이 있다. 나는 그처럼 심오하게 사유하며 살진 않기에 그 고통을 체감하진 않는다. 다만, 언제든 커피를 마실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지출을 감당하게 돕는 수단이 있다는 데에도 감사한다. 아주 가끔 정적이 극에 달해 고통스럽다.
따분함에는 역설이 있다. 즉각적인 즐거움으로 메우면, 따분함의 총량은 되레 늘어난다. 도파민 때문이다. 노력 없이 얻는 자극은 행복의 기준을 끌어올린다. 기준이 올라가면 일상은 더 공허하게 느껴진다. 최근 읽은 책에서는 행복의 요소를 도파민과 세로토닌으로 구분했다. 도파민은 빠르게 기쁘고 빠르게 허무하다. 세로토닌은 천천히 고조되며 오래 지속된다. 행복의 지속 가능성을 고려할 때, 세로토닌이 더 건강한 방식이다.
문제는 게을러지면 도파민에 끌린다는 것이다. 천천히 기쁨을 끌어올리는 노력보다, 손끝으로 넘기는 자극이 훨씬 간편하다. 세로토닌을 위해선 몸을 움직여야 한다. 운동, 산책, 햇살, 고요, 집중 같은 구체적 실천이 필요하다. 하나의 일에 몰입해야 하며, 독서, 글쓰기, 음악감상, 멍 때리기, 걷기 같은 단순한 행위들에서만 세로토닌은 천천히 축적된다. 이 와중에 멀티태스킹은 금물이다. 최근 나는 도파민에 많이 휘둘렸다. 그 와중에 짧은 탈출처럼 달리기, 볼더링, 독서, 글쓰기를 시도했지만, 대부분은 연속된 도파민의 흐름이었다.
사람은 당위가 있어야 통제 가능해진다. 파트너가 있을 때는 서로의 일상을 조율해야 한다. 식사도 같이, 장도 같이, 쇼핑도 같이. ‘함께 산다’는 명분을 스스로 설득하려면, 함께하는 순간을 확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험난한 결혼이라는 제도를 유지하기 어려워진다. 결혼 덕에 약간의 당위를 안고 산다.
이제 그 일말의 당위가 사라졌다. 따분함이 밀려온다.
따분함을 탓한다고 해서 그 시간이 바뀌진 않는다. 2달은 짧지 않은 시간이다. 이 시간을 통과하기 위한 작은 방침들을 스스로 정리해본다.
첫째, 외출을 자제한다. 사람을 많이 만나는 건 사업가로서 중요한 일이지만, 매번 그럴 수는 없다. 가끔은 디톡스가 필요하다. 이번 기간은 그런 시간으로 설정해본다.
둘째, 될 수 있으면 집으로 초대한다. 사람을 만나면 돈이 든다. 나는 대체로 연장자이고, 소득도 높기에 지갑을 먼저 연다. 최근 절약의 필요를 절감하고 있다. 밖에서 3명이 반주 곁들여 식사하면 200불 정도가 든다. 그 돈으로 장을 보면 훨씬 질 좋고 푸짐한 식사를 만들 수 있다.
셋째, 공간을 정돈하고 유지한다. 어지러운 환경은 내게 큰 스트레스다. 물건이 밖에 나와 있거나, 더럽거나, 정리가 되지 않은 상태를 마주하면 정신 에너지가 빠져나간다. 파트너가 짐을 쌀 때 청소, 설거지, 쓰레기 정리, 빨래, 정리정돈, 기부할 물건 정리를 했다. 스카이버스 탑승구까지 배웅하고 돌아왔을 때, 집은 지난 몇 년 사이 가장 깨끗한 상태였다. 도파민에 빠지는 이유 중 하나는 정신 에너지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에너지가 새지 않도록 환경을 정비하는 건, 가장 기초적인 자기 방어다.
넷째, 물건을 줄인다. 물론 내 물건에 한해서다. 공용 물건은 동의를 구해야 한다. 수납장에 숨겨져 있다 해도 생각은 투시한다. 투시로 꽉 찬 옷장과 서랍을 본다. 물리적으로는 보이지 않아도 마음이 불편하다. 천천히 하나씩 줄여볼 생각이다.
파트너를 배웅하고 집으로 곧바로 돌아왔다. 정리를 마저 끝내기 위해서였다. 그간 미뤄두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처리하기 시작했다. 사운드바 블루투스 연결, 청소기 필터 세척, 주차장 잡동사니 정리.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 일들이 나를 현실에 붙잡아놓는다.
혼자 지내는 삶을 조금씩 실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