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나를 어른이라 불렀다. 스무 살 넘은 법적 의미의 어른이 아닌, 정신적 성숙을 갖춘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나는 민망하게 웃었다. 그런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글을 쓰고 책을 읽다 보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된다. 부끄럽고 어설픈 기억들이 하나둘 떠오른다. 나는 대체로 타인에게 관대하고, 스스로에게도 여유를 두는 편이다. 하지만 균형감각은 놓치지 않으려 한다. 인간으로서의 결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감히 ‘어른’이라는 단어를 쉽게 쓰지 못한다.
워렌 버핏의 말을 자주 떠올린다. 자신의 능력을 정확히 알고, 그 범위 안에서만 투자하라는 조언. 이 말은 삶에도 적용된다. 실패할 확률이 높은 영역에서 무리하지 말라는 뜻이다. 대신 나의 한계 안에서 가능한 것을 찾는 게 합리적이다. 『아주 작은 습관의 힘』이라는 책도 같은 맥락을 말한다. 어렵고 거창한 목표보다, 실패하지 않을 시스템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일상에 이 원칙을 적용하면 이렇다. 나는 내 게으름의 수준과 유혹에 흔들리는 내성의 한계를 잘 안다. 그래서 해야 할 일이 있을 때는 그 게으름으로도 해낼 수 있도록 난이도를 낮춘다. 더 쉽고 간단하게 만들고, 해낸 후에는 보상을 준다. 반대로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을 때는, 그런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있는 환경 자체에 가지 않는다.
이를테면 금주를 예로 들어보자. ‘술을 절대 마시지 않겠다’는 다짐은 쉽다. 그러나 회식 자리에 나가면 친구들이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감탄사를 뱉고, 눈앞에 술이 놓인다. 손만 뻗으면 한 모금이다. 이때는 정신력보다 환경이 결정적이다. 그 자리에 가지 않는 것이 금주의 실질적 전략이 된다. 이를 지키는 사람은, 어쩌면 진짜 어른이다. 나는 그런 방식으로 겨우 실수를 피하는 사람이다.
실제로 나는 한계를 몰라 무리했던 시절을 기억한다. 지금으로부터 7년 전쯤, 살이 꽤 쪘다. 운동을 결심하고, 집 근처 헬스장에 등록했다. 월회비를 자동이체 설정을 했다. 스스로를 채찍질하려는 선택이었다.첫달 몇 번 나갔다. 결제 직후에만 동기부여가 있었고, 시간은 계속 흘렀다. 헬스장 앞을 지나칠 때마다 찜찜함이 쌓였고, 그 감정이 운동을 더 멀게 만들었다. 해지를 하자니 패배자가 된 기분이 들었다. 혹시 한 번 갈지 모른다는 희망으로 1년 넘게 낭비를 이어갔다. 한계를 외면한 선택의 댓가였다. 환경을 바꾸지 않고 의지로만 버티려 했던 무모함의 기록이다. 나는 그 이후로 의지를 덜 믿게 되었고, 환경 설계를 더 믿게 되었다.
어릴 땐 자신의 한계를 모른다.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해보고서야, 자신이 왜 거기 가면 안 되는지를 배운다. 나는 이제 안다. 내 인내심의 끝자락을. 어른은 그걸 아는 사람이다. 절제와 회피를 통해 사고를 줄이는 사람. 나는 아직도 실수를 한다. 빈도는 줄었지만, 0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얼마 전 한 동갑내기를 만났다. 친구의 소개로 알게 된 그는 서울대를 나와 미국 MBA를 마친 후, 대기업의 고위직에 있다. 우리 셋은 그의 집에서 술자리를 가졌다. 그는 로얄 살루트 21년산을 꺼냈다. 순간 감탄이 나왔다. ‘이게 한국 대기업 고위층의 위엄이구나.’ 나는 65불 주고 산 조니워커 루비를 극찬하며 마시는 사람이기에, 더 그랬다.
하지만 진짜 인상 깊었던 건 위스키보다 그의 언어였다. 나는 “직장생활 하면서 졸라 열받는 순간 없어요? 껄껄껄” 같은 표현으로 친근함을 시도했다. 그는 끝내 그런 언어의 영역 밖에서 대화를 이어갔다. 말에는 일정한 품위의 테두리가 있었다. 나는 순간 ‘어른’이라는 단어를 다시 떠올렸다.
경박한 언어를 쓰는 사람을 어른이라 부르기엔, 내 입이 가벼운 편이다. 내 언어엔 상스러움과 친근함이 섞여 있다. 일부러 그렇게 한다. 경계 없는 인간으로 보이고 싶고, 실제로도 그런 편이다. 나는 다가가기 쉬운 사람이 되고 싶다. 부족함을 먼저 드러내는 쪽이 관계에서 편하다. 전략이기도 하고, 진심이기도 하다.
하지만 때때로 정제된 언어를 마주할 때, 나의 언어가 ‘헤헤’거리며 머리를 긁적이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나의 경박함이 갑자기 낡은 장난처럼 느껴진다.
말뿐 아니다. 평일 낮, 전기장판 켠 침대에 누워 숏폼 영상을 보며 깔깔 웃는 내 모습을 파트너는 종종 지적한다. 웃음이 너무 가볍고 유치하다는 것이다. 품위 없는 어른이라는 말도 들었다. 나는 개의치 않고 계속 웃었다. 하지만 반복되는 지적은 스스로를 돌아보게 한다. 메타인지를 작동시켜 유체이탈하듯 나를 바라본다. 방구를 뀌고, 엉덩이를 긁으며, 유노윤호 뮤직비디오를 보며 낄낄대는 나. 이게 어른일까. 아니다. 나도 안다.
나는 어른이 못 된다. 그리고 어쩌면 되고 싶지 않은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나 편하게 말 걸 수 있고,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완전한 아이도, 완전한 어른도 아닌 그 경계. 청소년의 어딘가 즈음에 머물고 싶다. 하고 싶은 것만 하며 사는 건 아이의 일이다. 나는 최소한의 의무와 자기 한계를 알고 있다. 절대 넘지 말아야 할 선은 지킨다. 그 선이 낮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