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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띤떵훈 Jun 01. 2017

[비평] 오영훈- 개인주의자, 인간혐오자

[오영훈의 문화 등정] 개인주의자, 인간혐오자, 현재주의자

오영훈(문화 칼럼니스트)

   최근 몇 년 사이 사람들의 말과 글이 눈에 띄게 과격해졌다. 현직 판사 문유석이 쓴 『개인주의자 선언』(문학동네, 2015)을 읽고 나서, 개인주의나 소위 ‘혼자문화’보다도 ‘과격함’이야말로 최신 소통 경향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됐다.  


- 최근 인터넷을 보면, 사람들이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표현하는 경향이 있다. 힘든 현실을 잊을 용도로 혐오의 대상을 찾아 공격하는 듯하다. 일상에서 모아둔 울분을 거친 언사를 통해 특정 인물, 단체에 쏟아낸다. 몇 년 사이에 다양한 혐오 대상이 생겼다. 물론 그 전에도 존재했겠지만, 행동과 특정 인물을 규정하는 단어가 생기며 혐오의 대상이 구체화되며 대중의 뇌리에 인식되기 시작했다. 여성혐오, 남성혐오, 조선족혐오, 외국인혐오 등은 일상적 용어가 됐다. 네티즌이 즐겨쓰는 유행어만 봐도 그러다. 싫다는 표현을 극도로 혐오한다는 뜻의 '극혐'으로 대체한다.


  예를 들자면 이렇다. 책 속 「나는 사기의 공범이었을까」라는 칼럼은 이렇게 시작한다.

    국민학교 5학년 때의 일이다. 변웅전씨가 진행하던 <묘기대행진>에 속독법이란 것을 배운 여자아이가 출연해 두꺼운 책을 몇 분 만에 독파하는 것을 보고 감명받으신 우리 아버지, 나와 여동생을 봉천동에서 머나먼 광화문까지 150번 버스 타고 다니며 속독법학원에 다니게 명하셨다.   

    “책 좀 빨리 읽어서 무슨 입신양명들을 하시려는지 중고생, 대학생, 직장인까지 열심히 눈알 데굴데굴, 책장 휘리리릭에 목을 매고 있었”다고도 학원 풍경을 묘사한다. 저자는 속독법 열풍과 허위, 학원 원장의 잇속차림, 아버지의 자식을 통한 성공열망 등을 비꼬며 한국사회의 성공지상주의와 쏠림현상, 가부장적 권위주의를 공격한다. 책의 내용도 그렇지만 나는 글쓰기 방식이 내내 거슬렸다. 풍자・해학은 함께 통쾌하게 즐긴다는 상상을 주는 효과는 있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비꼼 받은 ‘아버지’에겐 충격이 아니었을까.

   놀라운 고백으로 저자는 책 첫머리를 시작한다. “고백으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나는 사람들을 뜨겁게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 혐오증이 있다고까지도 할 수 있다.”

    책 뒷면에는 이 “첫 문장부터 끌리지 않을 수 없었”다는 <JTBC뉴스룸> 손석희 앵커의 간략한 추천사도 적혀 있다. 손 앵커는 “문유석 판사 생각의 대부분과 그의 성향의 상당 부분이 나와 겹친다는 데에 경이로움까지 느끼면서 이 책을 잃었다”고 한다.  


- 문유석 판사의 책 개인주의자 선언의 일부를 인용해, 얼마나 혐오가 용인되고, 대중화된 지 설명한다. 혐오의 대중화라고 하기 보다, 권위자, 지식인이 자신들의 인간 혐오를 거부감없이 드러낼 수 있다는 사실이 현 사회 풍조를 우회적으로 보여준다고 봤던 것 같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오영훈이 확대 해석을 한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 손석희의 경우 혐오에 공감한 것이 아닌, 한국의 성공지상주의, 권위주의를 향한 판사의 부정적 인식에 공감한 것이 아닐까? 물론 판사의 경우 자진해서 인간 혐오자라 공표 했으니 할 말이 없다.



   둘 모두 ‘인간혐오증 커밍아웃’을 선언한 셈이다. 인간혐오증이라? 한반도 수천 년 역사에 없었던 생소한 개념이다. 반면 서양에선 뿌리 깊은 개념이다. 사람(anthropos)을 싫어한다(misos)는 고대 그리스어에 근간을 둔 영어 misanthropy로 쓰인다. 플라톤의 『파이돈』에서 소크라테스는 misanthropy가 생겨나는 과정을 이렇게 말했다.   인간혐오증은 어떤 이가 적절한 기술(art) 없이 누군가를 한 치 틀림없이 옳고 완벽하고 의지할 만하다고 믿어 전적으로 의존하다가, 얼마 뒤 그가 나쁘고 믿지 못할 사람임을 발견할 때 생겨난다. 이런 과정이 누군가에게 반복해 일어나면 마침내 그는 모든 사람을 혐오하게 된다.


- 인간혐오는 서구 문화권에서 익숙한 개념이다. 소크라테스의 해석에 따르면, 누군가가 기대에 부응하지 못 하는 일이 반복하면서 생기는 개념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 해석에서 만큼은 혐오가 신뢰할 수 없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믿음에 반하는 행동이 혐오를 불러온다고 했으니 말이다. 즉 믿음을 저버린다는 뜻의 배신과 일맥상통한다. 그래서 소크라테스의 해석은 혐오보다 불신에 대한 해석으로 보인다. 차이라면 신뢰를 주는 대상에 무조건적인 의존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


   세상엔 완벽한 사람도 순전한 악인도 없을 것이다. 플라톤은 ‘적절한 기술’이 있다면 대개 누구나가 선과 악 중간 어디쯤을 오가는 그런저런 존재임을 알 수 있게 된다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한 발 더 나아가 인간혐오가들은 아예 ‘사람’이 아니라고, 짐승 아니면 신이라고까지 주장했다.

    뼛속까지 개인주의자들인 그들도 인간혐오증을 이렇게 진단하는데, 문 판사와 손 앵커 같은 지식인들이 인간혐오증을 ‘근대적 의미의 합리적 개인주의’의 합당한 속성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게 놀랍다. 그 반대로, 인간혐오를 근대적 개인주의의 파생으로 보는 시각은 오히려 오늘날 우리 사회 지식인・정치인・활동가들의 한국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게 아닐까?


- 플라톤과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의 해석을 덧붙인다. 플라톤이 말한 적절한 기술은 문맥상 판단 근거, 즉 이성이 아닐까 싶다. 결국 사고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응당 인간혐오자란 범주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뜻이다. 아리스토텔레스도 마찬가지고. 이들이 생각하는 혐오의 개념을 통해 손석희와 문유석이 갖고 있는 생각이 얼마나 위험하고 잘못된 것인지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혐오의 개념에 대한 무게가 달라서 생긴 문제라고 본다. 그들이 가진 혐오는 아마 인간이라는 종, 존재 자체를 부정하며, 혐오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성공에 대한 맹목적인 추구, 권력을 통해 사람들을 통제하려는 인간의 성향에 비판적인 입장을 견주고 있음을 '인간혐오'란 단어를 통해 말한 게 아닐까?


한국 개인주의는 서양 개인주의와 다르다

    떠오르는 생활키워드 ‘혼자’문화를 두고 개인주의로 나아간다는 얘기들을 한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서양 개인주의를 습득한 결과가 아니다. 서양에서 개인주의는 다른 개인과의 차이를 핵심으로 하는 ‘독자성’이 원천이다. 반대로 한반도의 오랜 유불선 전통 속에 뿌리내린 개인주의는 개인이 사회의 독립된 단위라는 점에서 ‘단독성’이 근본을 이룬다. 독자적이기보다는 단독적인 한국사회의 개인들은, 자유경쟁 자본주의의 무지막지한 확산과 함께 혼자됨의 문화를 짧은 몇 년 사이에 서로로부터 습득하게 된 것이다.


- 한국과 서양의 개인주의가 어떻게 다른지 보여주고 있다. 남에게 의존하지 않는 성향, 혹은 남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특유한 것을 뜻하는 독자성과 사회와 자신을 분리하려는 독립성을 비교한다. 일견 같은 의미같이 보이지만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그 사회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지키는 독자성과 사회와 나를 떼어놓고 구분하려는 독립성은 다르다. 주체적 독자성을 통해 사회의 일부이면서도 자유로운 결단을 추구하는 실존주의 성향의 독자성과 고립, 사회와의 분리를 표방하는 독립성의 개념을 짧게 설명했다. 결국 사회 속에서 자신을 지키는 서양의 개인주의는 한국 패치를 통해 각색됐다.


   혼자문화의 소통 경향은 이해보다는 동의를, 공감보다는 연민을 추구한다. 문 판사의 같은 칼럼에서 소년 문유석은 마침내 ‘속독신동’이 되어 학원원장과 공모하여 19금 소설 『금병매』까지 순식간에 요약하는 속독시범을 보이기도 한다. 귀갓길에 소년은 궁금해 한다. ‘이런 짓을 어린애한테 돈 주고 시키는 어른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그러나 문 판사는 그들이 누구인지, 왜 그런 행동을 하게 되었는지가 궁금한 게 아니다. 정말 알고 싶었다면 한국 근현대사 공부를 했을 것이다. 다만 단지 철회시켜야 할 구습의 담지자들일 뿐이다. 학원원장・아버지로 대표되는 입신양명, 장유유서, 집단주의 따위 기존 한국문화는 문 판사에겐 이해할 수 없는, 없애버려야 할 악습이다. 대신 서양의 근대적‧합리적 개인주의의 전도사로 자처한다.  

- 문유석의 사상이 형성된 사건.


   그러나 이런 단순한 이분법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사람들은 차차 알아나갔다. 무엇보다도 이런 ‘구습’들을 떨쳐버리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 때문이다. 정경유착을 해소하려면 재벌을 해체하면 되는가? 학력서열을 타파하기 위해 서울대를 해체하면 되는가? 입신양명이 싫으면 아예 손 떼면 되나? 노량진에서 따귀 맞을 말이다. 나라를 격랑에 빠뜨린 세월호를 건지기 위해 해경을 해체한다는 발상과 다른 게 없다. 저자도 판사, 손 앵커도 ‘저명한’ 사회인사로 좋건 나쁘건 기득권층이다. 이들의 기득권 비판은 모순적이므로 포퓰리즘이란 비판을 벗어나기 어렵다.  그런 이분법이 통하지 않는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이런 비평들이 이해와 공감보다는 동의와 연민을 구하는 진보주의적(진화론적) 역사・사회관, 즉 ‘현재주의’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 오영훈이 손석희와 문유석을 비판하는 이유- 1) 그들이 기득권이라서 2) 기득권의 해체가 사실상 불가능한데도 구습을 떨쳐버리려 해서 3) 공감대신 동의와 연민을 구해서 // 이해하기 어려운 논리 구조이다. 오영훈의 논리를 보면

 한국 개인주의는 이해보다는 동의를, 공감보다는 연민을 추구(현재주의) -> 손과 문은 구습에 비판적인 시선을 갖고 있음 -> 그것은 한국식 개인주의임 -> 비판해야 함

 정리하면 2가지 문제가 있다. 첫번 째, 문과 손이 혼자문화 소통(현재주의)의 대변인이 아님. 두번 째, 한국식 개인주의가 왜 동의와 연민을 추구하는지에 대한 설명의 부재. 그래서 논리의 비약으로 느껴짐.  


현재주의의 과잉시대  

   현재주의는 역사의 동역학은 ‘변화’가 아니라 ‘진보’라고 본다(물론 ‘진보정당’ 등의 정치적 ‘진보’를 말하는 게 아니라 진보주의 역사관을 지칭한다). 진보의 잣대는 ‘지금의 내 관점’이다. 이에 동조하지 않는 타자의 다른 관점, 역사의 간섭은 혐오대상이다. 진리는 현재의 자기만족을 점검함으로써 추구할 수 있다고도 한다.  현재주의는 사실 새로운 태도는 아니다. 조선 중후기 성리학자들이 천착한 ‘자아의 깨달음’과도 맞닿아 있다. 당시 명산을 찾아 자연의 원리와 피부에 맞닿는 경이를 관찰하여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자 했던 공부방법이 성행했다. 이 시기 발행된 유산기가 천 5백여 편에 달한다고 한다.


 - 오영훈이 생각하는 개념, 현재의 상태를 기준으로 미래를 상상하고 판단하는 개념인 현재주의가 나아가는 길 = 진보다. 현재주의에서는 판단 근거가 자신의 감정, 현재 처한 환경이므로 철저히 개인적이며 기준이 입맛에 따라 변할 수 있다. 그런 특징은 이분법의 개념을 수반하는데 동조하지 않는 이들이 혐오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라는 것인데, 근거가 충분하지 않아 현재주의가 이분법의 개념이 되는 것인지 납득이 안 된다. 그리고 한국식 개인주의 = 현재주의라는 개념도 이해하기 어렵다. 또한 성리학자들의 자아실현을 향한 욕구 역시 현재주의로 해석했다. 그렇다면 성리학도는 편협한 이분법자이며 혐오주의자인가?


   지극히 현상학적인 이 연구방법은 서구 현상학・실존주의의 일부 경향과도 꽤나 닮았다. ‘존재가 본질에 우선한다’는 사르트르의 주관적 실존주의나, ‘마음에 떠오르는 형상은 진리의 일부’라는 윌리엄 제임스의 프래그머티즘과 궤를 같이 한다. 이들 주관주의적 현상학의 전통은 현재의 정신현상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한편으론 몰역사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대중적으로 꽤나 인기를 끌어 오늘날까지 서양 대부분의 국가에서 자유주의적 문화운동의 기본을 이룬다. 동서양을 아우르는 주관주의 현상학적 태도는 현대문학에도 큰 영향을 끼친 듯하다. ‘사회규율을 거스르는 인간 내부의 부정할 수 없는 속삭임’을 그려낸 『채식주의자』가 맨부커 상을 수상한 것은 쉬운 예다. ‘사회…에 반하는 인간 내부…’ 따위 플롯이 사르트르의 『구토』, 카프카 『변신』, 에밀 아자르 『가면의 생』 등등 문학사에 큰 획을 그었던 실존주의 소설들과 닮았다.


- 주관적인 해석은 몰역사적이다. 주관을 다루는 학문은 동서양, 과거 현대 가르지 않는 핫이슈이다. 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게 현재주의 과잉 시대라는 소제목에 맞는 내용인가? 근래의 특성이 아닌 시대와 나라를 아우르는 관심사지, 우리 시대만의 특징은 아니다.


 

존재론적 현실주의  

   이러한 주관주의적, 현재주의적인 문학적 상상력이 일반적인 공감대를 얻기 힘들다면(나무뿌리를 보고 구토를 느끼거나, 딱정벌레로 변신해버린 고뇌, 나무가 되어가는 꿈 등의 줄거리를 읽고 현실생활을 성찰하는 기회로 삼는 독자들이 얼마나 될까), 바탕이 되는 실존철학에 대한 이론적인 반대도 만만치 않다. 사르트르는 존재론적 실존주의의 하이데거로부터, 제임스는 프래그머티시즘의 찰스 퍼스로부터 각각 되받아치기 어려운 반격을 받았다. 이외 헤겔로부터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로 이어지는 반주지주의적 경향도 무시하기 어렵다. 이들은 개인주관의 중요성을 상대적으로 떨어뜨리는 대신 주관을 형성하는 역사‧사회를 강조한다. ‘지금 나의 생각이란 내가 생각하지 못하는 과정을 통해 도달한 결론’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내게 알려지지 않은, 나의 생각에 도달하는 그 과정이란, 내 생각이 무에서 유로 변한 게 아니듯 모든 역사의 소실이면서 미래에로의 효과를 가진다는 존재론적 현실주의다.


 

공감과 이해를 추구하는 현실주의  

   새 대통령이 당선됐다. 지역・계층・세대간 갈등과 불평등을 해소하고 통합을 바라는 목소리가 크다. ‘정의가 통하고 상식이 상식이 되는 사회’를 만들겠다고 한다. 그러나 저 ‘어른들’처럼 그의 ‘정의’와 ‘상식’에 반하는 이들이 있다면 어떻게 할텐가? 모두의 것이 아닌 누군가만의 정의이고 상식이라면 사회갈등을 줄여나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포퓰리즘이 아니라 진정 상처를 치유하는 통합을 바란다면 현재만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 나만이 아닌 다양한 모두를 관찰할 줄 아는 현실주의적 감각을 기대한다. 공감에 바탕한 연민, 이해를 먼저 구하고 동의를 바라는 글은 보다 많은 이들에게 읽힐 것이다.


- 주제는 명확하다. 포퓰리즘에서 벗어나고, 현재주의의 주관적 특성에서 벗어나 변하지 않는 역사, 사회관으로 시대와 세대를 아우르는 대통령이 되길 바란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영훈이 말한 현재주의가 대통합의 정치 이념에 반하는 개념인지는 의문이다. 그리고 손석희와 문 판사가 그 반대 개념의 대변인인지도 모르겠다. 제시된 근거가 주제와 제대로 연결되는 건가 묻는다면 잘 모르겠다. 결국 주장과 근거는 따로국밥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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