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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띤떵훈 Aug 21. 2017

2012년, 오사카에서 보낸 첫 한 달






며칠 전에 옛날 생각이 나서 싸이월드에 접속했다. 5년 전 오늘 내가 쓴 글이라며 첫 화면에 링크 하나가 표시됐다. 당시의 나는 어떤 생각을 했고, 어떤 방식으로 글을 썼을까 궁금했다. 글을 선택하니,  글이 등장했다. 작성한 날은 워킹홀리데이 프로그램으로 일본에서 첫 한 달을 보낸 시점이었으며, 내 생일이었다. 이방인으로서 많은 고민과 걱정이 있었음을 기억했다. 문장들 사이로 일본 생활의 잔상이 비쳤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아서 약간의 수정을 거쳐 블로그에 올렸다.




 일본에 온 지 한 달이 지났다. '찰나 같지만 '이란 역설이 어울리는 시간이었다. 밥 먹고, 잠 몇 번 잤는데 달 한 페이지가 넘어갔다. 그 짧은 나날동안 많은 생각과 감정의 변화가 있었다. 첫날은 설렘으로 동네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초여름 장마철이었다. 그 날은 비가 많이 내리지도, 덥지도 않았다. 일본의 여름은 불쾌지수가 높다고 하더니, 불쾌하지 않았다. 이슬비를 맞으며 동네 정경을 눈에 옮겼다. 그러면서 앞으로의 일 년을 어떻게 보낼지 머릿속에 그렸다. 하나가 나가면 하나가 들어오는 인생의 법칙처럼 날씨 걱정이 썰물에 실려가고, 돈에 대한 압박이 밀물처럼 들어왔다. 불안감이 해수면을 높였다.


첫 지출 품목은 일본제 맥주였는데, 330ml로 130엔이었다. 자판기에서 가장 저렴한 맥주였다. 동전으로 구매한 탓인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동전이 보여주는 환영을 벗어났고 일본의 물가를 실감했다. 남는 게 시간이었던 때라 천천히 앞으로의 지출을 계산했다. 특별히 얼마를 벌고 쓰겠다는 계획이 없었다. '굶어죽지는 않겠지' 안일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한 달 생활비를 계산했다. 식비와 집세, 교통비, 통신비 등을 합치니 10만 엔 정도였다. 부동산 계약금 8만 엔을 내고 수중에 남은 돈은 12만 엔. 한 달 내로 직장을 구하지 못할 시에, 마킹해야 할 객관식의 개수는 '한국으로의 귀국' 하나였다.


온라인 오사카 유학생 커뮤니티를 보는 것이 일과였다. 구인구직 게시판을 하루 몇 번씩이나 들여다보고, 먼저 온 유학생의 글도 몇 시간씩 읽었다. 잘 살고 있는 사람도 많았지만, 눈에 들어오는 건  좌절이나 신세한탄 글뿐이었다. '결국은 준비 부족이었던 것 같네요. 일단 포기하고 한국 돌아갑니다.' '일을 도저히 못 구하겠어요.' 같은 처지가 될까 두려웠다. 일본어 1급 자격증도 있는데, 조기 귀국은 망신이었다.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이런 초조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일본 통신사는 계약서에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열흘 동안 유심을 발급해주지 않았다. 이력서 연락처 란에 이메일 주소를 쓰는 기행을 보였다. 그래도 연락이 닿아 두 곳에서 면접을 볼 수 있었는데, 모두 떨어졌다. 눈 앞이 캄캄했다.


자신감도 활기도 연일 하한가 쳤지만, 한국에 있는 지인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동정받기 싫었고, 어떤 일도 내 힘으로 해내고 싶었다. 열흘 정도 집 값 빼고 쓴 돈을 계산하니 2만 엔 정도, 가져온 돈 20만 엔의 반이 날아갔다. 비슷한 시기에 온 형은 며칠 만에 일을 잡은 듯했으나 일주일도 안 돼서 잘렸다. 형을 통해 알게 된 두 명의 동갑내기 친구들 역시 일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모두에게 힘든 시기였다. 겹치는 악재 속에서 염원하던 핸드폰 개통이 이뤄졌다. 어떤 일이든 닥치는 대로 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며, 구직 사이트의 일자리 정보를 마구잡이로 눈에 넣었다. 진입장벽이 낮은 한국 관련 가게를 찾아보기로 했고, 검색어에 韓国를 입력했다. 검색 결과에 나온 가게는 빠징코를 제외하고 단 한 군데, 한국 음식점이었다. 가게 정보를 숙지한 뒤 지체 없이 핸드폰 버튼을 눌렀다.


중년 남자의 목소리 수화기 저편에서 들려왔다. 한식당 아르바이트 모집 글을 보고 연락했다 말했다. 일본어 실력에 나름대로 자신감을 갖고 있었지만, 사투리 섞인 상대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없었다. 긴장해서 다시 한번 말해줄 수 없냐고 재차 부탁했다. 짧은 대화 후에 돌아온 대답은 이미 사람을 구했단 말이었다. 완곡한 거절이었다. 그럼 그렇지.. 하며 끊으려는 순간, 지원한 곳은 인원이 다 차서 어렵지만 다른 점포는 사람이 필요하다 말했다. 그는 면접 볼 의향이 있냐 물었다. 벼랑 끝에서 서 있는 내게 동아줄이 내려왔다. 혼신의 힘을 다해 잡았다. 대화는 일사천리로 진행돼, 다음날 아침 면접을 보기로 했다.


다음날 동네 편의점 앞에서 그 중년 남성을 만났다. 인터뷰이의 편의를 봐서 집 앞으로 온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같은 동네 주민이었다. 대화를 통해 그에겐 나와 비슷한 나이대의 자녀가 있고, 타국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됐다. 비슷한 처지인 내게서 아들의 잔상을 본 건지, 특별 대우를 해줬다. 밤 늦게까지 그의 뒤를 쫓아다녔다. 그가 택시비를 부담한 덕분에 편하게 여러 점포를 구경했다. 그 날 바로 채용되어 다음날부터 일하게 됐다. 월급날 교통비가 따로 지급됨에도 불구하고, 지하철 정액권을 끊어줬다. 일정의 끝에서 그는 푸짐한 전골 요리를 사줬다. 감당하기 힘든 친절에 저의를 의심했다.


다행히 그는 장기밀매 업자, 혹은 인신매매범 따위가 아니었다. 투입된 점포는 연배가 있는 분들 중심으로 운영했는데, 다들 친절했다. 말로만 듣던 가족 같은 분위기가 실재함을 확인했다. 일이 금방 익숙해져서 첫날 포스 머신에서 돈 계산을 했고, 사 일째 되는 날에는 오픈 멤버에게 사고가 생겨 혼자서 가게를 오픈했다. 사장님 딸이 급하게 지원 왔는데, 준비를 잘 해놔서 인정받는 기회가 됐다. 다른 점포 점장님의 눈에 들어 자기와 같이 일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원 없이 일할 수 있었고, 삼시 세끼가 제공되어 가계부에 식비를 적지 않게 됐다.


현재는 동갑내기 한국인과 같이 일하고 있다. 일손이 부족하다는 말에 직접 추천한 친구다. 파견 근무를 나가 또래 친구들을 사귀게 됐고, 그들의 친구와도 알게 됐다. 같이 일하는 분들은 집에서 가져온 일본 가정요리를 격일 꼴로 식탁에 올려 주신다. 어제는 같이 일하는 일본 아주머니가 생일 선물이라며 만 엔 지폐가 담긴 봉투를 내밀었는데, 몇 번의 사양 끝에 갈무리했다. 어느 틈엔가 생활은 안정 궤도에 올랐다. 귀가 후엔 짬뽕가게 점장님이 선물해준 나가사키 짬뽕을 먹었다. 오늘 부로 나이도 한 살 더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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