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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띤떵훈 Aug 30. 2017

글쓰기야, 나를 특별한 사람으로 만들어줘








 글을 쓸 땐 특별한 사람이 된다. 힙스터는 인디를 추구하지만 힙스터 범주에선 인디가 아니다. 그러나 전체로 볼 땐 상대적 인디이므로 그 자신은 특별한 자아를 즐길 수 있다. 마찬가지로 세상에 글 쓰는 사람이 수천만 명쯤 되겠지만, 주변에 한 명도 없으므로 특별한 자아를 즐긴다. 옆 집 봉필이의 취미는 축구, 윗집 똘구의 취미는 붓글씨, 아랫집 맹자의 취미는 음악 감상. 나와 겹치는 인물이 하나도 없군. 나는 정말 특별하다니까. 글쓰기라는 마이너 중 마이너 취미를 가진 자신이 좋아서 어쩔 수 없다. 특별하지 않지만 시야를 극단적으로 좁혀 특별하다고 합리화한다.


'야 저 오빠 글 쓴데' 내 입으로 저는 글쟁이입니다. 글 쓰는데 많은 시간을 쓰고 있습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내 입으로 말하면 자의식 과잉, 근거 없는 자신감 폭발, 프로 글쟁이 빙의한 병신이 되므로 지퍼를 채운다. 그럴 필요도 없다. 주변 사람들이 대신해서 나와 글의 관계를 설명한다. 막을 권리도 없고 굳이 막을 필요도 없다. 사람들은 내가 글을 쓰는 것을 알고, 나는 자뻑 병신이 되지 않아도 된다. 그야말로 윈윈 시츄에이션이다. 이로써 나는 쿨하고 특별한 맛이 느껴지는 사람이다.


글쓰기가 많은 것을 바꿨다. 글을 쓰지 않았다면 나의 인생은 지금과 달랐을 것이다. 여자친구에게 흥미를 불러일으키지도 못 했을 것이고, 진지한 관계를 시작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설령 어떻게든 만남을 갖게 됐다 해도, 미래의 장인 장모님의 불만은 컸을 것이다. 나 이 결혼 반댈세. 우리 귀한 딸을 이런 무지렁이에게 줄 수 없네. 우리 딸은 세계 대학 순위 27위에 빛나는 멜버른 대학교 석사 출신이라고. 어디서 감히 한국 이 년제 전문대 관광 일본어과 출신이 우리 딸을 탐하는가!!!라는 불호령이 떨어졌을 리는 없겠지만, 못 배운 워킹홀리데이 출신 외국인 노동자라는 인상이었을 것이다. 그나마 글 좀 쓰고, 여자친구가 그 안에서 그들의 입맛에 맞는 글을 부모님께 보여준 덕분에 극단적인 평가는 피했다. 내 입장에선 이득이다. 넘모 귀엽고, 똑똑하고, 사랑스러운 여자친구와 만났고, 이혼하지 않는 한 오~~랫동안 같이 살 수 있으니. 


글을 쓰려면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하고 손가락을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밖에서 보면 에세이를 쓰는지, 과제를 하는지, 일기를 쓰는 건지 알 수가 없지만, 그 모두가 생산적인 일임을 부정할 수 없다. 5시간 넘게 움직이지 않고 자판 두드리는 일은 내게 학구적인, 혹은 열정적인 사람이란 이미지를 준다. 현실은 낙서 같은 생각의 부스러기를 나열하는 것뿐이지만 그들이 알 리가 없다. 어딜 가나 글쓰기가 요구하는 자세 덕분에 쿨가이로 존재할 수 있다.


글 쓰며 오버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특히 술에 취했거나 카페인에 취했을 때 그렇다. 내 감정을 수치화해서 0부터 10까지 구분할 수 있다고 가정하면, 거의 모든 일이 3~7을 오간다. 0,1,2,8,9,10은 일 년에 몇 번 있을까 말까 한다. 웬만한 일에는 감정의 동요가 없다. 가끔 4의 감정을 이야기할 때, 1이라고 말한다. 살짝 아쉽네 수준의 감정을 슬프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게 말하면 글에 나도, 상대도 몰입할 수 있어서. 가까운 예로, 최근에 쓴 천재와 파격에 대한 글이 있다. 사실 천재가 아니라, 파격이 아니라 슬프다고 표현한 것은 오버다. 천재였으면 좋을 텐데, 수준이지 슬픈 정도는 아니다. 천재가 얼마나 된다고. 1/2 확률에 속하기도 힘든데 1/ 100,000,000이 나이길 바라는 것은 과한 욕심이다. 그러나 이런 오버 덕분에 자신이 특별함이 주는 특별 맛을 즐길 수 있다.


굳이 글쓰기 소모임을 만들어서 운영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다. 글쓰기에 열정 없고, 관심 적은 사람들을 모아 같이 한 번 써보자 제안한다. 꾸준히 오래 참여할 수 있는 인물이 없다는 것은 알지만, 결과적으로 봤을 때 그들에게 큰 영향을 줄 수 없다는 사실 또한 알지만, 모임을 유지하고 있다. 무료함을 달랠 용으로, 혹은 한 시간 뒤에 꺼질 글쓰기 열정을 들고 올 누군가를 위해 모임은 열려 있다. 그들만을 위한 모임은 아니다. 내게 아무 이득 없는 활동을 유지할 생각은 없다. 그들이 조언을 요구할 때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몇 가지 조언을 건넬 수 있다. 훈수를 두며 글쓰기 뽕에 취한다. 오우 내 글쓰기 실력이 눈부시군. 글쓰기 권력이 주는 특별함을 맛본다. 음~ 맛 좋아.


최근에 쓴 SNS 중독 탈출하기란 글을 이렇게 끝맺었다. 

소셜 미디어에 지속적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유용함을 자신에게 설득한다면 중독이다. 이는 결국 중독에 명분을 주는 것이다. SNS에서 얻는(다고 믿지만, 실재하지 않는) 사회적 지지를 맛보며, 타인에 끼치는 자신의 영향력에 취한다. 물론 그것은 착각이다. 우리에겐 착각의 세상에서 벗어나게 해줄 파란 알약이 필요하다. 글쓰기라면 바꿀 필요가 있다. 글쓰기에서 얻는(다고 믿고, 몇몇은 실제로도 얻는) 사회적 지지를 맛보며, 자신의 영향력에 취한다. 반백수 한량이 시간낭비 오지는 잉여의 삶을 살 때 죄책감이 머리를 채운다. 그럴 때 글쓰기가 특효약이다. 글 쓰며 한심한 인간 군상 중 하나가 특별한 인물로 신분을 세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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