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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띤떵훈 Sep 05. 2017

미루지 마세요









 어제 매니저를 만났다. 2년 넘게 전체 고객의 반 이상을 담당하고 있는 중요한 인물이다. 그녀가 성실하고 꼼꼼하게 일해온 덕분에 문제없이 비지니스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녀는 2주 후에 한 달 반의 긴 휴가를 갖는다. 한국에서 식을 올리고, 신혼여행도 갈 예정이다. 휴가 기간의 스케쥴을 조율하기 위해 정오가 살짝 넘은 시간에 미팅을 했다. 혼자 커버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다른 직원과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어느 정도 스케쥴 조율이 끝나고, 매니저와 둘이 남아 사담했다. 결혼 준비는 어떻게 되어 가냐, 남자 친구 직장은 어떠냐, 시부모님이랑 관계는 어떠냐 등. 예민할 수 있지만, 오랫동안 쌓아온 관계를 방패 삼아 질문이 사생활 깊숙이 들어갔다. 편한 분위기에서 서로의 근황과 앞으로를 물었다.


그러다 갑자기 그녀가 조심스러워졌다. 저 사실 드릴 말씀이 있어요.라는 서두는 중대한 결심이 있었음을 앞서 알려줬다. 다음 한마디가 있기 전에 빠르게 마음을 다잡았다. 결혼식을 마치고 호주로 돌아오고 일을 그만두겠다고 했다. 오랜 비지니스 관계의 마지막을 말한 셈이다. 결혼이라는 큰 전환점은 마음가짐뿐만 아니고 그녀의 생활 전반을 바꿀 것이다. 모든 시댁 식구가 한국에서의 살림을 정리하고 호주로 넘어올 계획을 세웠단다. 내 청소 사업을 전적으로 맡아 일했던 경력을 발판 삼아 그녀는 시숙과 함께 청소 사업을 하기로 했다. 시숙은 영어가 되고 매니저는 청소 노하우가 있으니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수 있는 동업자가 될 것이다.


결혼 후엔 사회인으로서 책임감이 한층 무거워진다. 한 가정을 이끌어야 하고, 자식에게 좋은 환경을 제공해야 하기 때문이다. 더 많은 수입과 커리어가 필요할 터이다. 그녀가 떠나면 많은 불편함과 귀찮음이 뒤따르겠지만, 의견을 존중하기로 했다. 그녀의 시숙 역시 가정을 꾸려나가야 하는 처지여서 많은 돈이 필요하다. 배우자가 호주에서 간호 대학을 다닐 예정이고 그가 다소간의 학비를 부담하기로 했단다. 호주는 학비가 만만치 않다. 시숙에게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사업이 올바른 선택이다. 막대한 초기 자금이 가장 큰 벽인데, 매니저의 시부모님, 즉 시숙의 부모님의 경제력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녀와 시숙 입장에서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대략적인 상황 판단이 끝나고 그녀에게 이해한다는 말을 건넸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었다. 그녀는 호주에서 사진을 배우고 싶어 했고, 일하는 중간중간 입학을 입에 올렸다. 언젠가 떠날 것을 알았지만, 개인 사업을 이유로 떠날 줄은 몰랐다. 학교 입학은 어떻게 되는 건지 물었다. 그녀는 확실히 정하지 못 한 것 같았다. 그녀 말에 따르면, 한국으로 치면 전문대급 교육 기관인 테이프에서 사진을 전공할 수 있다. 멜버른에 사진 커리큘럼을 가진 테이프가 마침 한 군데 있고, 학비도 일반대학교 대비 4분의 1이다. 그녀가 언제든 갈 수 있는 수준이다. 그러나 그녀는 생활이 안정된 다음에 다시 생각하겠다고 말했다. 어쩌면 시민권 취득 후에 갈 수도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이민법이 바뀌어 시민권을 취득하려면 6년이란 시간이 필요하다. 그 사실을 아냐고 물었고 그녀는 안다고 대답했다. 아이를 가질 계획이냐고 물었고 그녀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아이를 낳으면 사실상 대학에 입학하기 어렵다고 말했고, 그녀는 그 사실을 충분히 이해한다고 답했다. 그래도 여건이 되면 꼭 가고 싶다고 말했다. 자신의 미래가 통째로 가족에게 쓰일 것이란 사실이 부담을, 꿈을 포기해야만 하는 상황이 죄책감을 불러온 것인지 모른다. 껄끄러운 감정을 애써 외면하기 위해 언젠가 사진과에 입학, 졸업, 취직해서 자신의 전문성을 키울 거라는 실현 가능성 없는 꿈을 방패 삼고 있었다.


그녀와 나는 공통점이 많다. 감정을 이입한 이유다. 어제까지는 불편함이 두려워 차마 말하지 못 했지만, 이렇게 된 김에 확실히 말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녀가 모른 척하는 사실을 더는 외면할 수 없게 구체적으로 풀어 입 밖으로 내뱉었다. 호주에서는 아이가 학교에 입학하면 법적으로 통학을 같이 해야 한다. 입학 전에도 물론 같이 시간을 보내야 한다. 결국 임신을 한 순간부터 아이가 혼자 통학할 수 있는 나이가 될 때까지의 15년 동안은 학교도 다닐 수 없고, 풀타임으로 회사 일을 할 수도 없다. 파트타임으로 일하기 위해서는 학위와 몇 년의 필드 경험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풀타임으로 일하고 싶다면, 보모를 구해야 한다. 사회 초년생의 월급으론 보모 비용을 감당하기 어렵다. 결국 진정으로 배우고 커리어를 쌓고 싶다면 당장 입학해서 몇 년이라도 경력을 쌓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녀 스스로도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던 내용이었기 때문에 금세 납득했다. 계획을 다시 세워보겠다고 말했다. 현실을 말하는 것은 당장 귀에 쓰겠지만 그녀가 진정으로 경력을 쌓고 싶다면 약이 될 것이다.


마치 인생을 온전히 통제하는 양 이야기했지만 나 역시도 비슷한 고민이 있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결혼과 동시에 임시 영주권을 따고 학비 감면을 받으며 대학 생활을 하려 했다. 그러나 이민법이 바뀌는 바람에 혜택을 받으려면 7년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됐다. 이미 나중에 좋은 혜택 받을 수 있을 때 입학해야지라는 생각으로 2년을 허비했다. 조금씩 미루다 아무것도 못 하고 나이 먹는 게 두려웠다. 결단을 내려야 했다. 결국 빚을 지더라도 모든 학비를 다 내고 입학하기로 정했다. 그녀에게 내가 가졌던 고민과 결론을 말했고, 그 말이 영향을 끼치길 바랐다. 한편으로 행동의 당위를 말하면서 그간 그녀의 고립을 외면했던 자신의 이기심을 보게 됐다. 내게 닥칠 피해를 걱정해 남의 인생을 무시했던 셈이다. 자신의 이기성이야 잘 인지하고 있었지만, 막상 구체적인 사례를 목격하니 씁쓸했다. 현실을 외면하며 떠날 시기를 미룬 것은 그녀뿐만 아니다. 나 역시 떠나보낼 시기를 미루고 있었다. 그게 미안해서 앞으로는 미루지 말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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