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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띤떵훈 Oct 16. 2017

소용돌이

 양손으로 핸들을 들고 차를 기다렸다. 컨베이어 벨트가 10분이 지났음을 알리고 같은 방향으로 차량의 뼈대를 움직인다. 도색도 안 된 빈약한 차가 내 앞에서 멈췄다. 터벅터벅 걸어가 운전석에 앉았다. 들고 있던 핸들의 방향을 맞춰 구멍에 끼웠다. 딸깍 소리가 났다. 그 상태로 핸들을 한 번 더 강하게 밀어 두 번째 딸깍 소리가 나게 만들었다. 확실히 부착된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좌로 한 번, 우로 한 번 핸들을 돌렸다. 문제없이 돌아갔다. 이번엔 누군가의 멱살을 잡고 흔드는 것처럼 강하게 당기고 밀기를 반복했다. 무표정으로 심드렁한 분노를 핸들에 쏟아부었다. 문제가 없음을 확인하고 운전석에서 나와 옆에 있는 컨베이어 3호 전용 의자에 앉았다. 다른 핸들팀 노동자들도 어느새 각자의 자리에 앉았다. 우리 부서 컨베이어는 총 10호까지 있는데, 나는 3호를 담당하고 있다. 주 5일, 저녁 11시부터 아침 7시까지 동그란 핸들을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 꽂았다.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입대했고 군 복무를 마친 해에 바로 입사했다. 대기업 생산직인 나는 주변 친구들과 비교해 경제적으로 풍요로웠다. 친구 열에 아홉이 부럽다고 말했다. 내가 입사한 때는 회사 창립 이래 가장 많은 TO가 생긴 해였다. 세 명 중에 한 명이 합격했단 뜻인데, 지금과 비교해서 10배 낮은 경쟁률이었다. 합격이 발표되자, 배운 거 없는 고졸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직장이라며 친척 어른들은 축하를 아끼지 않았다. 다들 그러니 그런가 보다 생각했다. 내가 불만을 말하면 안 될 것 같아 감사한 마음으로 회사 생활을 해왔다.


야간 핸들팀 2호 컨베이어 김영환은 내 또래였다. 그도 나와 같은 해에 입사했다. 5년 정도 다른 부서에서 일하다 2년 전부터 같은 부서 같은 파트가 됐다. 주간 타이어 부서였던 그는, 저녁 일을 하는 여자친구의 스케쥴에 맞춰 야간부서로 지원을 했었다. 콜센터에서 야간 상담을 했던 그 여자친구와 작년에 결혼을 했다. 둘의 월급은 3배 차이였다. 2호 김영환은 정규직이었고, 콜센터 상담사인 여자친구는 비정규직이었다. 사람들은 뒤에서 2호 김영환이 아깝다고 말했다. 교육 수준을 기준으로 최하위에 위치한 고졸 분류 중에서 또 등급이 나뉘었다.


김영환은 집에서 휴대용 스피커를 챙겨 와서 크게 노래를 틀었다. 10호 권혜솔이 노랫소리를 들을 수 있는 정도였다. 특별히 취향 타는 노래가 아니어서 누구도 별 말하지 않았다. 되려 최신 가요를 들을 수 있다고 좋아하는 편이었다. 나는 특별히 선호하는 음악 장르가 없었고, 들을만 해서 김영환의 스피커가 내뿜는 음악을 거부하지 않았다. 김영환은 매주 월요일이면 그 날의 인기 순위 1위부터 100위까지의 곡을 업데이트했다. 자연스럽게 차트에 오래 살아남은 곡은 몇 주 동안 듣게 됐다. 책을 읽다가 무의식적으로 노래를 따라 불렀다. 


우리 회사 사람들은 여유롭게 일했다. 실제 핸들을 설치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3분 정도였고, 핸들 설치에 주어진 시간은 10분이었다. 검수 과정에서 문제가 없는 한 절반 이상의 시간을 느긋하게 쉬면서 보냈다. 우리는 자주 동료의 일을 봐주기도 했다. 한 사람이 몇 시간 동안 옆 호 동료의 일을 하고, 다른 하나는 잠을 자거나 핸드폰으로 예능, 드라마나 스포츠 녹화 방송을 시청했다. 나도 극히 피곤한 경우엔 2호 김영환이나 4호 강창모에게 품앗이를 부탁했다. 업무 시간에 잠을 잔다는 것이 찜찜해서 보통 내 할당량은 직접 처리하는 편이었다. 쉬는 시간엔 책을 읽었다. 누군가가 선물로 준 책 읽게 된 것이 시작이었다. 특별히 좋아한다는 자각은 없었지만, 안 읽는 것보단 나은 것 같아 계속 읽었다. 큰 사고 치지 않는 이 생활이 30년 정도 유지될 것이다.


10대 시절엔 교과서도 쳐다보지 않았다. 운동을 잘하는 것도 없었다. 인문계 고등학교에 입학한 것이 기적 같은 일이었다. 고교 시절에도 모습은 변하지 않았다. 수능이 끝나고 반 친구들이 대학 진학을 고민할 무렵, 나에겐 지방에 있는 대학밖에 선택지가 없었다. 배우고 싶은 것도 없었고, 지방대 졸업장이 주는 이점에 회의적이어서 입학을 포기하고 입대를 선택했다. 군에선 TV 보고 선임 따라 공 차며 무난한 22개월을 보냈다. 운 좋게 입사한 회사에서 처음 읽었던 책은 '20대, 공부에 미쳐라'였다. 남은 인생 공부에 미칠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단지 동창 친구의 선물을 버릴 수 없어 읽게 됐다. 책 전반에 걸친 작가의 말이 거슬렸지만, 토달지 않고 다 읽었다. 그 후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치며 나름의 이정표가 생겼다. 베스트셀러보다 흔히 '고전'이라 불리는 작품이 실패 확률이 낮았다. 특정 출판사에서 나온 세계고전문학전집 30권과 한국고전문학전집 20권을 차례대로 읽었다. 그 후에는 유명인, 유명 단체 추천 도서 목록 위주로 구매했다. 서울대 철학 교수 아무개의 추천 도서 목록, 정치인 아무개의 추천 도서 목록, 공중파 앵커 누군가의 추천 도서 목록, 인디 밴드 보컬 아무개의 추천 도서 목록, 서울대 추천 도서 목록, 유명 출판사 추천 도서 목록을 참고했다. 목록의 도서를 다 읽으면 인터넷 포털 검색창에 '추천 도서 목록'을 검색했다. 핸드폰에 목록을 저장하고 서점에 갔다. 특별히 좋아한다는 자각은 없었지만, 안 읽는 것보단 나은 것 같아 주말마다 책을 몇 권씩 샀다.


2번 김영환, 4번 강창모 외 7명과 인사를 나누고 회사 셔틀버스에 올랐다. 먼동이 틀 때 우리는 집으로 향했다. 나를 제외한 9명의 핸들팀 사람들은 자가용이 있었다. 모두 외제차는 못 몰지언정 국산 승용차를 타고 다니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초반 몇 번은 팀원들의 호의를 거절하지 못 해 그들의 차로 귀가했지만, 영 불편해서 어느 순간부터 셔틀버스로 퇴근하겠다고 못을 박았다. 집까지는 자가용으로 15분, 셔틀버스로 30분이 걸렸다. 셔틀버스 정류장에서 내리면 10분 정도 걸어야 했다. 이른 출근길에 오른 사람들과 교차하며 바통 터치를 하는 기분이 들었다. 생활 패턴의 차이가 주는 묘한 감정이 싫지 않았다. 메아리는 없었다. 열정적인 무관심이었다. 10분 동안 무언의 인사를 나누고 집에 도착했다.


책 전용 선반을 산다고 지난 몇 년을 다짐했다. 15평 원룸의 현관문을 여니 벽 한쪽이 책으로 가득했다. 바닥부터 시작해서 성인 키 높이까지 쌓인 책 탑이 20개 정도 있었다. 어마어마한 위용을 보니 엄두가 나지 않아 매번 구매를 포기했다. 입사 첫 해에 읽은 책이 100권, 그다음 해엔 150권, 그리고 그다음 해에 250권이 됐다. 더 읽는 속도가 빨라지지는 않았다. 지난 4년 동안 한 해 평균 250권~ 300권 정도의 책을 읽었다. 사놓고 손을 대지 않은 책도 적지 않았다. 이 천 권의 책이 가구 외의 빈 공간의 1/3을 차지하고 있다. 자취 초기, 인터넷에 문제가 생겼었다. 지역 브로드밴드 업체 인터넷이었는데, 수리 기사 내방 시간이 좀처럼 맞지 않아 다음을 기약하다가 지금까지 인터넷 없이 살고 있다. 인터넷으로 특별히 할 게 없었고, 검색이 필요하면 핸드폰을 사용했다. 집에서 딱히 할 일이 없었다. 특별히 좋아한다는 자각은 없었지만, 멍 때리고 있는 것보단 나은 것 같아 집에 있는 시간에도 책을 읽었다. 샤워를 하고 책을 읽다가 오전 10시쯤에 잠이 들었다.


 


일어난 지 10분이 다 되어가는데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눈만 뜬 채로 천장을 바라볼 뿐이었다. 커튼을 치고 자는 것을 깜빡해서 방 안은 여전히 환했다. 발코니 창을 통과해서 들어온 빛이 원룸을 가득 채웠다. 업무 태만인 형광등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형광등은 원형이었다. 형광등의 원을 따라 눈동자를 굴렸다. 동그랗게 동그랗게 동그랗게. 멈추려고 했지만 눈동자가 말을 듣지 않았다. 눈알 돌아가는 소리가 너무 커서 귀가 찢어지는 것 같았다. 온 정신과 몸이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가는 느낌 들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회전에 겁이 났다. 소용돌이에 휩쓸려  점점 저 깊은 곳으로 내려갔다. 아무것도 없었다. 눈을 감은 것인지 해가 저문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머리맡에 있는 핸드폰이 울렸다. 알람이 세상으로 나를 건져 올렸다. 저녁 10시 알람이었다. 12시간을 잤다. 


서둘러 옷을 입고 셔틀버스 정류장으로 뛰었다. 인파 속으로 서둘러 발을 움직였다. 낮의 경험을 무엇이었을까? 꿈이었을까 아니면 가위에 눌렸던 것일까? 판단을 할 수 없었다. 그 일은 지나갔고, 나의 하루는 어쨌든 다시 시작됐다. 확실한 것은 컨베이어 2호 담당자로서, 오늘도 핸들을 끼워야 했다. 모두가 부러워 마지않는 생산직 노동자의 업무가 나를 기다렸다. 추가 수당까지 넉넉히 챙겨주는 야간 일이, 정년을 보장해주는 야간 일이 나를 기다렸다. 버스가 회사에 도착했다. 


버스 밖으로 발을 내딛자 현기증이 찾아왔다. 머리가 핑글핑글 돌았다. 볼트가 된 기분이었다. 컨베이어 라인이 분주히 움직이는 공장 안으로 들어갔다. 


6호 컨베이어 담당인 핸들팀 윤 팀장은 나의 몸상태를 걱정해줬다. 안색이 좋지 않다며 어디 아프냐고 물었다. 괜찮다는 나의 물음을 무시하고 아버지뻘인 그가 내 이마에 손을 얹고 미열이 있다고 말했다. 팀장은 2호 김영환과 4호 강창모를 불러 상황을 설명하고 나를 조금 쉴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 대신 그들의 업무 카드에 2시간씩 추가 근무한 것으로 기재해준다고 말했다. 나는 사양했지만, 팀장은 막무가내로 쉬라고 했다. 어쩔 수 없이 의자에 앉아서 시간을 축내게 됐다. 컨베이어 돌아가는 모습을 멍하게 쳐다봤다. 급하게 나오느라 책을 챙기는 것도 잊었다. 책을 갖고 왔다한들, 남이 내 일을 해주는 상황에서 염치없이 읽을 수 없었다. 컨테이너가 움직였다. 2호는 핸들을 꽂아 부지런히 돌렸다. 좌로 한 번 빙글, 우로 한 번 빙글. 속이 좋지 않았다. 시선을 돌려 천장을 바라봤다. 환풍기 펜이 돌아가고 있었다. 끝나지 않을 것처럼 같은 궤적에서 부지런히 돌아갔다. 시선을 떼려고 했으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돌아가는 펜을 계속해서 보자 정신이 조금씩 아득해졌다. 소변이 나왔다. 작업복 슬랙스가 젖었고, 바닥에 소변이 떨어졌다. 어지러움이 심해져서 시야가 점점 좁아졌다. 몸이 급하게 떨리는 것이 느껴졌고, 의자가 넘어가 육체가 철퍼덕 소리를 내며 지면에 부딪쳤다. 2호 김영환이 다급하게 내 이름을 부르는 게 들렸다. 펜에서 시작된 소용돌이가 다시 심연의 아래로 나를 이끌었다. 



눈을 뜨자 낯선 풍경이 보였다. 하얀 천장과 하얀 벽이 보였다. 옆에는 어머니가 앉아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어머니는 내가 깨어난 것을 깨닫고 격앙된 목소리로 몸상태가 어떤지 물었다. 아무렇지 않다고 대답하고 전후 상황을 물었다. 이내 근무 중에 발작을 일으키고 기절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12시간 동안 기절해 있었고, 지금 막 일어났다고 했다. 의사는 일과성 허혈 발작 진단을 내렸다고 한다. 발작의 전구 증상으로 실금이 있었다고 덧붙였다. 며칠 더 병원에 머물면서 혈압 및 혈당 조절을 하고 안정을 취할 것을 권했다. 어머니는 회사와 이야기가 다 됐으니 마음 놓고 쉬라고 했다. 상황 파악이 끝나고 오랜만에 어머니와 대화를 나눴다. 어머니는 간밤에 윤 팀장에게 연락을 받았다고 했다. 그녀가 의정부 집에서 용인까지 택시 타고 오느라 10만 원이나 썼단다. 할 이야기가 더 남지 않아서 어머니에게 의정부 집으로 가서 쉬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걱정스러우니 오늘 하루는 여기서 머물겠다고 대답했다. 모든 부모의 역할이 그런 것일까. 조금 과할 정도로 신경 쓰는 게 그들의 기본 행동 양식인 것 같다. 실랑이를 하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 편한 대로 하라고 말했다. 그냥 자려고 했으나 어머니 성화에 못 이겨 점심으로 어머니가 사 온 쇠고기죽을 먹었다. 익숙한 맛이었다. 전국적으로 유명한 프랜차이즈 죽집에서 사 온 죽이었다. 이게 공인된 맛있는 죽이다. 죽 한 그릇을 비우고 나서야 잠을 허락했다. 부모 역할을 하는 입장도, 당하는 입장도 피곤하다.


3시간 정도 지난 것 같았다. 핸드폰 시계는 오후 3시 34분을 가리켰다. 몸상태는 괜찮았다. 아무 불편도 없었지만, 딱히 침대를 벗어날 이유를 찾지 못 해서 그냥 누워있기로 했다. 특별히 좋아한다는 자각은 없었지만, 멍 때리고 있는 것보단 나은 것 같아 책을 읽기로 했다. 주변에 책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머니에게 읽을 책이 있냐 물었다. 어머니는 지금은 없지만 곧 가져다주겠다고 말했다. 병원 도서관을 이용하면 된다고 했다. 직접 가고 싶었으나 어머니의 만류에 누워서 기다렸다. 어머니가 자리를 비우자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머니의 걱정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는데, 그게 부담이 됐다. 병원에 누워 있다는 사실이 불쾌했다. 별 일 아니라면서 기절했다는 이유만으로 병원에 머물러야 했다. 나는 멀쩡한데 환자복을 입고 있다는 이유로 특별 대접받는 것도 불쾌했다. 불쾌한 게 한 둘이 아니었다. 내가 원래 이렇게 투정이 많았나?


어머니는 책 한 권을 들고 왔다. 병원 도서관에서 가장 인기 있는 책이라고 했다. 책 제목을 봤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표지를 한 번 훑어보고 다시 천장을 바라봤다. 20대의 마지막을 보내는 나에게 보내는 응원의 메세지일까? 20대는 다들 힘들구나. 힘든 20대에게는 위로가 필요하구나. 조용히 중얼거렸다. 책을 집어 들었으나 좀처럼 첫 페이지를 펼칠 수 없었다. 어머니가 다시 자신의 본분에 충실하기 위해 말을 걸었다. 몸은 어떻니, 불편한 곳은 없니. 몇 분 전에 괜찮다고 말했는데 그새 잊으신 걸까 아니면 몇 분 사이에 상태가 안 좋아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전제한 것일까? 괜찮다고 말하고 더 말을 걸기 전에 책을 펼쳤다. 책을 읽자 어머니는 간병인 침대에서 잠시 눈을 붙이겠다 말했다. 기꺼이 그러시라고 말했다. 


"싫다..."


30페이지가량 책을 읽었다. 글자를 읽다 보니 속이 안 좋아졌다. 청춘으로서 마땅히 읽어야 할 책이었으나 더 이상 읽을 수 없었다. 다시 현기증이 생겼다. 책을 침대 옆 선반에 던졌다. 


나는 며칠 후 아무렇지 않게 출근했다. 사건은 지난 일이 됐다. 나는 불평 없는 사람이었다. 사실 아무렇지 않다는 것은 거짓말이었다. 불평 없는 나의 존재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일이 너무 편해서 불편했고, 친구들이 나의 직장을 부러워해서 불편했고, 대중가요 가사가 귓가에 맴돌아서 불편했고, 사람들이 20대의 마지막은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말하는 게 불편했고, 식당 음식에 맛있다 말하는 게 불편했고, 30년 남은 정년이 불편했고, 보람 없던 2000번의 독서가 불편했고, 어머니의 존재가 불편했고, 다 불편했다. 손에 쥔 핸들을 운전석 구멍에다 꼈다. 좌로 한 번 돌리고 우리 한 번 돌렸다. 핸들의 움직임은 멈췄으나 시선은 그 관성을 따라 원형을 그렸다. 눈동자가 쉼 없이 동그라미를 그렸다. 정신이 아득해질 무렵 작게 한 마디 뱉었다.


"불편하다."


소용돌이의 회전이 약해졌다 다시 나를 집어삼킬 듯 빨라졌다. 다급해진 나는 조금 더 크게 말했다. 그리고 소용돌이와 힘겨루기를 했다. 나의 행동과 표현이 커질수록 소용돌이의 힘은 약해졌다. 나는 점점 더 크게 불편을 말했고, 이내 10인의 컨베이어 노동자가 다 들을 수 있게 소리쳤다. 창피함은 크게 문제 되지 않았다. 불편함을 말할 수록 해방감이 커졌다. 핸들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낼 수 있는 가장 큰 소리를 질렀다.


"씨팔 불편해!"


나는 조퇴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며칠 뒤 직무를 수행할 수 없는 정도의 정신적 장애가 발생했다는 이유로 휴직계를 냈다. 김영환과 강창모는 경계하면서도 나를 걱정해줬다. 일을 할 수 없었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모든 것을 거절하고 싶었다. 모든 것을 거절해야 했다. 어머니와 다른 가족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당연한 소리들이 괴로워서 집에 머물며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어떤 것도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뭘 해도 나는 무리의 하나였다. 어떤 행동도 행위 주체자 범주에 속하는 것이었다. 나의 아무것도 안 하기도 쉽게 규정지어질 것이었다. 뭘 해도 분류의 올가미를 벗어날 수 없다. 죽음도 마찬가지였다. 자포자기했다. 




상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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