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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우은실 Aug 16. 2024

x의 욕망을 적극적으로 y화하면서 분열(2)

-박서련과 이미상을 중심으로

1. 타인의 것을 적극적으로 자기화하면서 분열’: 욕망이 거세된 자의 대리 욕망

-박서련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이하 「게임」)은 독특한 형식적 구조를 취하고 있다. 이 소설의 서술자는 인물을 ‘당신’이라고 칭한다. 이때 ‘당신’은 누구인가? 아들의 사교 활동 및 사회생활을 위해 아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되게끔 만드는 것이 곧 자신의 욕망이라 믿고 자긍심을 가지는 듯 보이는 어머니인가? 분명 서사 속 (내포 작가라고도 할 수 없는) 서술자가 지시하는 “당신”은 어머니라는 인물 같아 보이지만, 제목인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을 보면 이때 “당신”은 “아이”이거나 그에 준하는 독자로 읽히기도 한다.

‘당신’의 자리에 어머니-되기로의 욕망에 둘러싸인 여성 인물, 어머니-되기를 촉구하는 자녀 인물(및 남편 인물), 이를 관망하면서 어머니-당신에게 이입하거나 혹은 자녀-당신에 이입하는 독자라는 세 개의 층위가 세분화되어 있는 소설의 호명 방식은 이 사이에 가로놓인 인물 및 인물과 멀지 않은 독자의 욕망을 헤아리는 데 긴요하게 작동하는 서사 전략이다. 특히 (아직은 불분명하게 느껴질) 어떤 ‘욕망’이 ‘어머니’ 표상을 중심으로 모아진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에 서사 속에서 지칭하는 당신-어머니가 어떤 식으로 스스로를 묘사하는지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소설에서 ‘당신’의 위치가 여러 레이어로 나눠져 읽히기는 하지만, 정작 서사의 전개 자체는 어머니 인물에 집중되어 있다. 이때 서술자의 위치가 자못 애매하다. 분명히 인물을 삼인칭으로 지시하고 있기는 하지만, 인물에 대한 판단에서 완전히 물러서 있는 것 같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서술자의 묘한 위치 감각 때문에, 독자는 더더욱이 이 소설이 삼인칭으로 호명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당신은~”) “당신”이라 불리는 인물이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느낀다.

우리는 이렇듯 서술자의 판단 감각 위에 우리의 판정 기준을 슬쩍 올려 두며 인물을 평가한다. 이 소설이 “당신”의 목소리를 가감 없이 내보인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소설 속 “당신”의 고백은 “당신” 자신이 해석한 자신의 내면에 해당할 텐데, “당신” 아이에게 헌신적인 어머니이길 원하고 그것에 자부심을 가진다는 사실은 독자로 하여금 비판적 시선을 갖게 할지도 모른다. 가령 아이들 사이의 대화에서 엄마의 외모가 놀림의 원인이 된다는 걸 알고 난 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 직후 “결혼했다고 긴장 푸는 여자들하고 달라서 당신이 좋”*다는 남편의 말이 겹쳐지는 순간 그녀는 탈모 방지 샴푸를 구매하는 어머니-여성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박서련,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 민음사, 2022, 16쪽.)

이 여성 인물이 욕망하는 것은, 자기비판 없이 그저 남성 중심적 시각에서 이미지화된 자녀와 남편에 대해 헌신적이고 영원히 늙지 않는 어머니인 것만 같다. 이러한 ‘어머니-되기’ 욕망을 인물이 자신의 내면 그 자체로 드러냈을 때, 우리는 그 욕망에 동조하는 입장이든 그것을 비판하는 쪽이든 불편감을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다. 김미정에 따르면 “과장된 순응과 어리석음은 서술자와 독자는 알고 있지만 ‘당신’ 스스로는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어 서술되듯 우리(독자)는 이 모습을 보고 모종의 불편감을 느낀다. 그 까닭은 “‘당신’을 만들어낸 이 세계의 리얼리티가 곧 서술자-독자가 공유하는 그것이기 때문”**이다.

**김미정,〈「여성 서사의 자긍심 : 박서련,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민음사, 2022)/김유담, 『돌보는 마음』(민음사, 2022)〉, 《문학과사회》 2022년 여름호, 285쪽.

김미정의 이 해석을 떠올리며 소설의 내용을 되짚어 보자. 우선 “당신”은 자신의 모순을 정말로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하는가? “당신”을 어머니 인물로 볼 때, 그녀는 자신이 자인하는 ‘좋은 엄마 되기’의 욕망이 그 자신이 아니라 외부의 시선을 충족시키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적어도 서술자에 의해 “솔직히 말해서 당신은 가끔 당신 아이가 되고 싶다”***며 슬쩍 흘러나오는 내면은 자신이 추구하는 ‘좋은 엄마 되기’의 욕망이 그 자신을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향해 있지 않고 ‘자녀에게 바쳐지는 어머니상’에 있음을 드러낸다. 즉 그녀에 대한 발언을 자신이 원하는 것이 곧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님을 균열적으로 인식한 결과로 볼 때, 인물의 자기 판단에 대한 이러한 진술은 분열적 해석의 지점을 지닌다. 

*** 박서련, 앞의 글, 같은 쪽.

한편 서사의 관건이라 할 수 있는, 좋은 엄마 욕망하기의 프로젝트의 대미는 아들을 ‘대리’할 ‘게임 하는 엄마’가 되는 장면에 있다. 게임 과외를 받는 그녀는 k대 남학생에게는 성추행을 당하는 한편 그 뒤에 새로 구한 s대 여학생으로부터는 그녀 자신의 가능성을 독려받는다. 그녀는 “당신의 몸이 아니라 당신이 실제로 해낸 일”에 대해 칭찬받는다. 그녀는 ‘엄마-되기’의 욕망에서 시작했으나 ‘여성-되기’로서의 경험이 중첩되어 가는 게임 과외를 지속하면서, 그녀가 게임 세계 안팎으로 사람들이 ‘여성’ 그 자체를 욕으로 삼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녀는 게임을 못 하는 유저 일반을 여성화하는 사례로서 “혜지”에서 시작해 “김 여사”라는 멸칭을 청취하는 것을 거쳐, 마침내 그녀가 아이 대신 경헌이와의 게임을 대리해 주는 과정에서 “엄마”라는 단어가 욕으로 검열되는 것을 목격하기에 이른다.

소설의 초반에 그녀가 욕망했던 ‘어머니-여성 되기’가 실은 아이와 남편이 원하는 모습에 대한 대리 욕망이었음에 화자는 균열을 느낀다. 그녀는 게임을 통해 어머니-여성으로서 그 대리 욕망의 실천 속에 자기의 욕망을 발견해 나가다가, 결과적으로 게임에서 ‘엄마’라는 언어가 욕으로 사용된다는 것을 목격하면서 급격하게 분열되는 형국을 맞는다. 이는 어쩌면 ‘어머니’와 ‘여성’ 사이에 하이픈이 주어져 있는 한 좌측 혹은 우측 가운데 어느 쪽의 욕망이 더 크게 작동하든지, 얼마간 그것이 ‘대리 욕망’의 자장 속에 있을 것임을 즉, ‘여성’은 과연 남성을 주축으로 삼는 대리 욕망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말하는 것만 같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당신’과 거리를 두어 그녀 자신의 욕망과 그녀가 대리 실천하는 욕망을 조금 떨어져서 지켜보고 있는 서술자와 독자로 인해, 그리고 서사 말미에 자신의 엇갈리는 대리/욕망의 종착점에 이르러, 우리는 ‘당신’이라는 명명 하에 분열하는 존재로 묶이고 만다. 소설 속 서술자가 온전히 객관적 서술자이거나 그녀를 옹호해 주는 서술자 가운데 어느 쪽도 아니듯이, ‘당신’ 또한 ‘어머니’로서의 자신과 ‘여성’으로서의 자신 사이에서 끊임없이 길항하는 욕망 속에서 위태롭게 자신을 다잡아  가고 있으며, 독자 또한 이러한 어긋나는 욕망의 확인과 실천의 서사 속에서 현실과 문학을 자주 교차하며 혼란을 느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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