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서련과 이미상을 중심으로
2. 자기의 욕망을 자기화하면서 분열: 여성이 ‘언어’를 얻을 때 일어나는 일
- 이미상 「티나지 않는 밤
박서련의 소설의 언어적 형식이 ‘대리 욕망의 실천자’인 여성이 겪는 일종의 분열적 증상 가운데 하나라고 본다면, 이미상의 소설은 그 분열의 ‘극복’이 아니라 이러한 분열 자체가 곧 여성의 욕망을 수행하는 언어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독특한 사례다. 박서련의 소설과 마찬가지로 이 소설의 서술 방식 역시 특이점을 지닌다. 이 소설은 기본적으로 삼인칭을 유지하면서 ‘수진’의 시선과 내면을 따라간다는 점에서 박서련 소설의 삼인칭 시점과 비슷하다. 그러나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박서련 소설의 서술자는 소설 속 인물은 아니되 내포 작가라고 하기에는 보다 적극적인 가치 판단을 유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독자의 이중 판단을 실천하는 내포 독자-서술자의 역할을 담지한다. 한편 이미상의 서술자는 기본적으로 삼인칭(서술자 A)으로 유지되고 있으나, 수진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목소리를 듣는다는 설정을 통해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서술자는 서술자 B이거나 미지의 캐릭터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이 독특한 서술자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소설에 개입한다.
ⅰ
우듬지를 생각하고 있는데 새 말을 기입하는 건 새 세계를 들여오는 일 엉뚱한 문장이 수진의 귓가로 흘러들었다. 누가 말을 걸었나 싶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
ⅱ
모르는 단어가 점점 줄고 있었다. 수진의 어휘력이 향상돼서이기도 했지만 생활 반경이 협소한 게 더 컸다. 매일 가는 곳, 매일 보는 얼굴, 매일 듣는 소리. 서사가 진행되지 않는다고 누구 죽이지 말고 되도 않는 반전 꾸미지 말고 움직이고 또 움직일 것! 핫팩이 식었다. (...) ‘획기적인 이동!’ 수진은 혼자 큭하고 웃었다. 만약 어디로든 갈 수 있다면…… 수진은 스스로 물었다. ‘어디로 갈까?’ 답은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수진은 밤의 베란다가 미치게 좋았다. 일 밤 누려도 좋았다. **
*이미상, 「티 나지 않는 밤」, 『이중 작가 초롱』, 문학동네, 2022, 157쪽.
**이미상, 위의 글, 166쪽.
위의 인용에서 기울임체로 드러난 구절이 미지의 인물/서술자 B의 존재를 드러내는 부분이다. 이러한 불특정한 존재의 개입은 수진의 의식을 서술하는 과정에서 문장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불쑥 끼어들 뿐만 아니라(ⅰ), 마치 ‘작가로 여겨지는 존재’의 목소리가 순간적으로 소설 세계에 진입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ⅱ). 정체가 뚜렷하게 밝혀지지 않은 인물로 생각하면 그만일 것 같은 이러한 발화에 구태여 서술자 B의 레이어를 덧대어 보려는 것은, 여성의 분열적 언어화와 관련해 박서련의 화자가 독자를 순식간에 인물로 끌어당겨 일치감과 이질감을 경험하게 했듯, 이미상의 소설 또한 그 낯설고 불편한 불일치의 감각을 현시하려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형식적 실험에 그치지 않고 이 소설의 주인공인 ‘수진’이 여성으로서의 경험을 자기 언어화하는 과정에 파편적으로 개입되는 서술자 B의 발화가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그로 하여금 마침내 ‘자기 언어’를 획득해 나간다는 이 소설의 내용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