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서련과 이미상을 중심으로
intro. 분열된 언어와 여성의 욕망
여성은 어떻게 욕망하는가. 여성의 분절적 언어성이 곧 사회 안에서의 여성인 ‘나’를 인식하고 드러내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할 때, 이는 여성 젠더가 사회에서 어떤 식의 요구를 욕망으로 전유해야만 하며 그 과정에서 어떤 분열이 발생하는지를 파악하는 주요한 요소가 된다. 이에 여성이 욕망을 표출하는 것과 유비적 상관성을 지니는 듯 보이는 여성적 발화의 한 형태에 대한 이야기에서 시작해 보고자 한다.
아마도 이 산문집을 질투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다행이에요. 얼마 전에 산문을 발표했는데 교정지에 편집자가 디자이너에게 보내는 메모가 함께 스캔되어 있었다. ‘글이 너무 파편적이라 문단을 나눠야 할 것 같아요.’ 확인사살 감사합니다. 파편이 내 삶의 숙명 같아요. 엄마로 시인으로 작가로 가사노동자로 선생으로 살면서 매일 갈기갈기 찢어지고 있습니다. 그래, 그게 숙명이라면 파편의 대마왕이 되고 말 거야.
모두가 침묵할 때 함께 침묵할 수 있는 힘을 주세요. 그러면 내가 살 것 같아요.
(...)
뭔 소리 하는 거야? 하고 느끼셨다면 그 생각을 의도한 게 맞습니다만. 자세한 얘기는 하기 싫어서요. 공감받는 건 정말 별로니까.
너도 사실은 네가 누군지 알기 싫잖아. 나도 내가 누군지 알고 싶지도 않고 함부로 정의당하기도 싫어.*
*백은선, 「시와 산문 사이를 우왕좌왕하며」, 『나는 내가 싫고 좋고 이상하고』, 문학동네, 2021, 14~15쪽.
백은선은 에세이에서 “파편적”이라 인식되곤 하는 자신의 글쓰기가 곧 자신의 정체성의 분화와 관련되어 있음을 자필한 바 있다. 이는 기실 하나의 글에서조차도 다변하는 그녀의 쓰기의 ‘형식’에서 엿보이는 특징이거니와―어떤 문장의 톤이 거칠어지거나 격정적으로 치달았다가 금세 시무룩해지기도 하고, 다듬어진 것처럼 보였다가도 정제되지 않은 감정이 튀어나오기도 하고, 산문이었다가 시가 되었다가 사진이 등장하기도 하는 등― 그녀의 시에서도 익히 잘 드러나는 것이기도 하다. 이때 ‘파편성’은 단순히 에세이와 시의 발화가 뒤섞여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여성’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이 여러 방식으로 분절되고 파편화되는 방식으로 조직되어 있음에 대한 인지가 ‘분열적 언어’로 표출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비교컨대 이는 통일되고 일관된 ‘정제된 언어’로서 자기를 규정하는 일이 얼마간 환상에 불과한 것일 뿐만 아니라, 그러한 환상성이 합리성을 자처하는 ‘남성적’ 언어가 (그 자신과 타인까지도) 지시하는 무결성의 환상에 기대어 있음을 보여 준다.
여성이 여성으로서 자기를 지시하는 언어가 파편적이고 분열적인 방식으로 직조되어 자신을 구성하고 있음을 인지함으로써 곧 ‘분열적 언어’ 그 자체로 자신을 바라본다는 관점에 근거할 때, 최근 서사에서 드러나는 ‘여성의 욕망’에 대한 이야기를 이러한 언어 차원에서 다뤄 볼 수는 없을까? 여성이 파편화되고 분열적인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자각할 때 그러한 ‘자기 언어화’의 욕망은 외부적 억압과 그에 대한 내재적 재생산 및 저항의 모순을 둘러 어떤 방식으로 발현되는가? 이때 욕망 또한 분열적 감각과 연관되어 있지는 않은가. 만약 그렇다면 여성들은 분열적 자기 정체화의 욕망을 어떤 식으로 경험하는가? 박서련, 이미상의 소설을 통해 ‘욕망-분열’의 처세의 양상을 살펴보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