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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안녕, 에리>(후지모토 타츠키) 리뷰/해석

가장 후지모토 타츠키스러운 만화가 무엇이냐고 내게 묻는다면.

by 우언타이

※ 스포일러 있음.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도록 이야기의 마침표를 찍는 예술은, 필연적으로 호불호가 극명하게 나뉠 수밖에 없다고 확신한다. <파이어 펀치>, <체인소 맨>, <룩 백>, <17-21>, <22-26>의 만화가 후지모토 타츠키의 <안녕, 에리>는 앞서 말한 형태의 만화이면서, 몹시 아리송하면서도 상당히 충격적인 작품이다. 마지막 페이지에 도착한 자들 중 당혹감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이는 아마도 몇 명 없으리라 예측되는.


이 기기묘묘한 만화의 테마를 누가 감히 하나로 단정 지을 수 있을까. 아들과 엄마의 애틋한 가족이야기로 시작해 친구와 친구의 우정이야기로 나아가 소년과 소녀의 사랑이야기를 거쳐 모두를 울리는 성장이야기로 끝낼 듯하다가, 허무한 상실의 비극과 의문이 가득한 판타지로 독자를 강렬히 연타하는 이 희한한 작품을. 그리고 바로 이러한 종잡을 수 없음이, <안녕, 에리>가 품은 가장 치명적인 매력일 것이다.


미스터리한 그 결말에 대한 나의 해석을 말하기 앞서, 이 다채로운 스토리를 간략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삶이 얼마 남지 않은 엄마와의 추억을 영화로 만든 주인공 유타는 이를 자신이 다니는 학교에서 상영하지만, 영상의 괴상한 마무리로 인해 모두에게 비난을 받고 생을 포기하려 할 정도로 좌절한다. 그러다 자신의 팬임을 고백하는 동급생 소녀 에리를 만나 용기를 얻고, 유타는 그녀와의 영화 훈련을 통해 자신과 자신의 작품을 무시했던 이들이 인정할만한 걸작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그 자신의 현 상황을 그대로 활용함에 더해 에리가 흡혈귀라는 설정을 넣은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영상을 찍던 중, 그녀 역시 죽어버린 엄마와 마찬가지로 목숨을 위협하는 몹쓸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럼에도 촬영은 계속되고, 유타와 에리는 그들의 영화 속에서 서로를 애정하는 연인의 모습으로 열연한다. 그녀가 점점 수척해지는 애틋한 순간들이 이어지다가 서글프고도 감동적인 장면을 끝맺음으로 하는 소년의 두 번째 작품은, 소녀의 소원대로 모든 학생들을 눈물바다로 이끄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이 과정 속에서 감춰진 비밀이 드러나는데, 첫 번째 영화에 담긴 자상한 모습과 달리 그의 엄마는 사실 무척이나 이기적이면서도 폭력적인 사람이었다. 그러한 인간마저도 아름다운 존재로 표현시킬 수 있는 유타의 뛰어난 영화적 능력이, 에리가 말한 대로 그녀가 그의 작품에 관심을 갖게 된 주된 이유 중 하나이자 소년과 소녀를 운명적으로 연결한 것이다.


오랜 시간이 흘러, 유타는 더 이상 새로운 작품을 만드는 것을 접어둔 채 가정을 이뤄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를 제외한 일가족이 교통사고로 인해 모두 한 번에 세상을 떠나고, 유타는 인생의 의미를 완전히 잃어버려 어렸던 날의 그때처럼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해 폐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그곳에서 그는 이미 사망한 에리와 다시 조우하고, 그녀의 정체가 실제로 죽음과 부활을 반복하는 흡혈귀였음을 알게 된다. 충격에 빠진 유타에게 에리는 그의 영화가 지닌 가치를 일깨워주고, 무언가를 깨달은 유타는 그녀에게 작별을 고한 뒤 미소 지으며 폐건물을 폭파시킨다. 그렇게, 만화는 끝이 난다.


예상컨데, 유타가 어른이 된 이후의 흐름에 대해 대부분이 상당한 석연찮음을 느꼈을 것이다. 분명 창작자가 숨겨놓은 진실이 있으리라 추측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파악할 수 없어 발생하는 각자의 다양한 해설들. 물론, 아래의 내용 역시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안녕, 에리>라는 멋진 예술을 더욱 입체적이면서 다면적으로 조각하려는 나의 자유로운 의견이다. 어떤 절대적인 풀이 같은 것이 아닌 그저 한 개인의 생각.




[네 번의 죽음 그리고 세 번의 탄생]

이 만화에는 총 개의 영화가 존재한다. 첫 번째는 어린 유타와 그의 엄마에 대한 것, 두 번째는 소년 유타와 소녀 에리에 대한 것, 마지막 세 번째는 중년 유타와 흡혈귀 에리에 대한 것.


첫 번째 이야기에서 죽는 대상은, 다들 알고 있듯이 유타의 엄마이다. 그리고 그녀의 죽음은, 소년의 예술적 자아를 탄생케 했다. 정확히는, 엄마와의 이별이 유타가 자신의 정체성을 예술가로 공표한 계기가 된 것이다.


두 번째 이야기에서 죽는 대상은 둘인데, 하나는 소녀 에리이고 또 다른 하나는 방금 언급한 유타의 예술적 자아이다. 그녀의 죽음 이후에 그가 더 이상 다른 영화를 찍지 못하는 점에서 이를 눈치챌 수 있다. 탄생의 대상은, 당연하게도 흡혈귀 에리이다. 정확하게는 재탄생이 그녀에게 더 어울리는 표현 것이다.


세 번째 이야기에서 죽는 대상은 유타의 가족들이다. 그렇다면 탄생의 대상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이는 그동안 죽어있던 그의 예술적 자아라고 대답하겠다. 이 역시 탄생보다 부활이라는 단어가 더 적합하겠지만.


요약하면, 이 작품은 탄생과 죽음이 서로를 꼬리를 물고 있는 서사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별과 만남, 소멸과 구원의 공존이라는 신비로움이 스며든 <안녕, 에리>를 자연스레 곱씹게 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세 거짓 관계]

첫 번째 영화에 담긴 소년 유타와 그의 엄마의 관계는 무척이나 좋아 보인다. 이는 그의 아빠에 의해, 거짓으로 드러난다.


두 번째 영화에 담긴 소년 유타와 소녀 에리의 관계는 열렬히 사랑하는 사이이다. 이는 유타 자신에 의해, 거짓으로 드러난다.


세 번째 영화에 담긴 중년 유타와 흡혈귀 에리의 관계는 결국 헤어지는 인연이다. 그리고 나는 영화 바깥에서의 그 두 존재가, 영화와는 달리 결코 허무하게 이별하지 않았으리라 짐작한다. 외로운 서로의 소중한 벗으로서, 영화에 대한 각자의 의견을 주고받으며 오랫동안 만남을 이어가리라 상상한다. 그리고 이런 해석을 떠올렸을 때, 내가 이 작품을 가장 아름답게 여길 수 있었다.




이제 이 긴 글을 마치려 한다. 탁월한 예술에 대한 나의 견해를 타인들에게 공유하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그렇기에, 후지모토 타츠키라는 희한한 천재가 창작한 다른 작품들에 대해서도 언젠가 이곳에서 이야기하고 싶다. 끝으로 그의 만화세계에 대한 내 소견 하나를 말하면 다음과 같다. 타츠키의 최고작은 <룩 백>이겠지만, 가장 타츠키 다운 만화는 바로 이 <안녕, 에리> 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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