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언컨대, 21세기 최고의 국문학 데뷔작 중 하나.
※ 스포일러 있음.
장편소설 <밝은 밤>으로 우리에게 감동을 준 최은영의 단편집 <쇼코의 미소>는 이별을 다루는 7개의 서로 다른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그 제목들을 하나씩 열거하면, <쇼코의 미소>, <씬짜오, 씬짜오>,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 <한지와 영주>, <먼 곳에서 온 노래>, <미카엘라>, <비밀>이다. 물론, 이들 모두 흔쾌히 추천할 만한 인상 깊은 작품들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에서는 <쇼코의 미소>를, 다음 글에서는 <씬짜오, 씬짜오>를 소개하려 한다. 두 소설은 다음의 요소들을 다룬다는 점에서 닮아있다. 각자의 모국어가 아닌 제3국의 언어로 소통하는 이들의 진심, 오랫동안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만드는 지난날의 짧은 만남,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간신히 헤아릴 수 있게 된 누군가의 마음.
단편집의 제목이기도 한 <쇼코의 미소>는 이 작가의 데뷔작이다. 고등학생 때 잠시 자신의 집에 머무른 일본인 친구 쇼코와의 소중한 인연을 영어가 적힌 편지로 이어나가는 주인공은, 그녀와의 관계가 우정과 사랑 사이 어딘가에 놓여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연애는 우정 같고, 어떤 우정은 연애 같다. 쇼코를 생각하면 그 애가 나를 더 이상 좋아하지 않을까 봐 두려웠었다."
흥미롭게도, 쇼코는 주인공의 할아버지와도 꾸준히 서신을 주고받는다. 자신의 조부는 혐오하지만 타국의 노인과는 친밀하게 소통하는 이의 마음속엔, 대체 어떤 외로움과 갈증이 들어있었을까. 그러나 어느 순간 쇼코는 주인공과도, 할아버지와도 연락을 끊고, 이에 따라 남겨진 이들은 쓸쓸함에 잠긴다.
졸업 후 대학 생활을 하던 주인공은, 그리워하던 쇼코를 만나기 위해 일본에 도착해 그녀의 집을 방문한다. 그런데 그곳에서 마주한 쇼코는 무척이나 약해진 상태였기에, 이를 예상하지 못했던 주인공은 큰 충격을 받고 그녀를 떠나 한국으로 돌아온다. 시간이 흘러 서로를 마음 한 구석에 묻어둔 채로, 쇼코는 물리치료사, 주인공은 영화감독이라는 각자의 길을 걷게 된다.
꿈이 자신을 추구하는 자에게 던지는 무자비한 고난 속에서, 주인공은 좌절을 겪고 자신만의 세계에 갇히게 된다. 조심스럽게 추측하자면, 이제야 그녀는 그때의 쇼코가 품고 있던 괴로움을 조금이나마 이해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수렁에 빠져있던 주인공을 건져 올린 사람은, 쇼코도, 그녀 자신도 아닌, 바로 고향집의 할아버지였다.
많은 이들이 그러하듯, 한 집에서 함께 살아온 혈연관계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꽤나 서먹했다. 그렇지만 이들에게는 쇼코라는 친구와 서로에 대한 사랑이라는 공통점이 있었고, 건강이 악화된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그녀와 그녀의 엄마, 그녀의 엄마의 아빠는 그동안 나누지 못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늦게나마 온전한 소통에 이르게 된다.
그 후 주인공은 쇼코에게 편지를 보내, 그녀에게 할아버지의 죽음을 공유한다. 그런데 사실, 마음이 회복된 쇼코는 언젠가부터 할아버지와 다시 서신으로 왕래했기에 그의 몸상태가 나빠진 사실을 이미 인지하였고, 이를 알게 된 주인공은 두 사람에게 잠시 서운함을 느끼게 된다. 물론 이런 상황에서 섭섭하지 않을 사람은, 아마 한 명도 없을 테다.
망자를 기념하고자 쇼코는 한국을 다시 방문하고, 두 친구는 정말 오랜만에 재회하게 된다. 둘은 주인공의 방에서 그녀가 만든 영화를 보고, 할아버지가 남긴 편지를 읽으며 이제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는 자를 추억한다. 그리고 이 소설의 마지막에는, 일본으로 돌아가는 쇼코와 그녀를 배웅하는 주인공이 담겨있다. 독자들에게 뭉클함을 선사하는, 그야말로 멋진 결말.
짐작컨대, <쇼코의 미소>에는 작가 본인의 경험이 투영된 것으로 보인다. 그녀 역시 소설 속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한동안 창작의 고통에 빠져있었기에. 그러니까 이 단편을 이루는 성실하고도 정직하면서 감각적이고 강렬한 문장들은, 자신의 아픔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데 성공한 창작자의 눈부신 성취이다.
등장인물들이 형성하는 저마다의 관계가 다른 점 역시 흥미롭다. 주인공과 쇼코, 쇼코와 할아버지, 할아버지와 주인공은 모두 서로를 소중히 여기지만, 각자는 각자에게 보여줄 수 있거나 보여주고 싶은 것들만 부분적으로 드러낸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복잡하고 양면적인지를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상당히 훌륭한 설정.
무엇보다도, 형언하기 어려운 어떤 미세한 감정들을 문학이라는 매체를 통해 제대로 구현해 냈다는 점이 굉장하다고 느껴졌다. 다시 말해, 누군가의 마음의 풍경을 어떻게 남들에게 들려줄 것인가라는 예술의 오래된 질문에, 최은영은 자신만이 적을 수 있는 답을 성공적으로 제시한 셈이다.
위의 내용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분명 <쇼코의 미소>는 21세기 최고의 국문학 데뷔작 중 하나이다. 심지어, 위 문장에서 '중 하나'를 뺀다 해도 과언이 아니라 믿는다. 그런데 이렇게나 칭찬한 <쇼코의 미소>보다 더욱 탁월한 단편이, 더 사무치는 이야기가, 바로 이 다음에 있다.
2025. 04. 05.
(이어서 계속)